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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가 악마를 두들겨 팼을 때,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했다. 메리처럼 쌤통이라며 배를 잡고 웃을 순 없었지만, 기분만은 동일했다.
“오, 잘했어요. 지금 당신 표정 잘 봐둬요.”
엘리제의 말에 루카스는 상념에서 벗어나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엘리제의 말대로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다.
“자, 이쪽 입꼬리도 같이 올려 보면?”
루카스의 반대쪽 입꼬리를 검지로 삐죽 올려본 엘리제의 입에서 풉,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 웃지?”
“이렇게는 안 되겠어요. 일단 안면 근육 먼저 풀어 보죠.”
그리 말한 엘리제가 그의 볼을 열심히 조물거렸다. 그녀의 밀가루 반죽 취급에 루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봐,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지?”
“그럼요. 배우들은 다 이렇게 해요.”
물론 아니다. 그러나 <타락한 연인>의 주인공답게 루카스의 피부는 최고였다. 탱탱하며 부드러워 계속 조물대고 싶은 유혹을 이기기가 어려웠다.
그 후 ‘아에이오우’를 반복하며 안면 근육을 풀고 발성에 도움이 되는 훈련을 한참이나 했다.
“쉽지 않군.”
대련을 수십 명과 해도 호흡 하나 흐트러진 기색이 없던 루카스가 지금은 몹시 지쳐 보였다.
“살면서 굳어 버린 표정을 바꾸는 게 쉬울 리가요. 그래도 처음보다는 좀 풀어졌어요. 혼자서도 거울을 보며 지금 했던 연습을 꾸준히 하도록 해요.”
“네가 볼 땐 가능성이 있어 보이나?”
“그럼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해서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이건 아니에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너무 절제하며 살아온 습관 탓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뿐, 당신에게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분명 크게 웃고 울며,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루카스의 표정이 편안하게 풀렸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리 말하는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람다워, 엘리제는 활짝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춤 연습으로 넘어가 볼까요?”
연회 날, 홀로 서 있는 시에나에게 다가간 루카스가 그녀에게 춤을 청하는 장면이 있다. 시에나는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둘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춤을 추게 된다.
“춤은 좀 춰요?”
“필요할 것 같아서 익혀 두었다.”
“다행이네요. 일단 뭘 제일 잘 추는지 좀 볼까요?”
시에나에게 청하는 타이밍을 조절하면 되므로 춤곡은 그가 원하는 것으로 고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도 없는데?”
“내가 흥얼거려 줄게요.”
엘리제의 흥얼거림에 맞춰 그와 그녀는 왈츠부터 시작하여 폴카, 미뉴에트, 알르망드를 골고루 춰 보았다. 자신 있게 말한 대로 그는 모든 춤곡들을 어떻게든 소화했다. 다만 사교댄스임에도 너무 뻣뻣한 게 문제였다. 검술을 익힐 때와 같은 방식으로 춤을 배운 듯했다.
“엘리제. 너는 춤도 잘 추는군. 평소엔 굼뜬데.”
아마 루카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비아냥거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솔직담백한 루카스였고, 지금 그녀의 몸이 아주 속 터지는 상태라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여기와 비슷한 시대 배경인 드라마에 출현해 본 적이 있어서요. 이런 건 몇 개만 제대로 배워 놓으면 그리 어렵지 않아요.”
애초에 그녀 못지않은 비실이들이 코르셋 콱 졸라매고도 출 수 있는 것이 이 시대의 사교댄스였다. 웬만큼 어려운 뮤지컬 안무도 소화해낸 적 있는 그녀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으음. 그런 건가.”
동의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그는 답했다. 아마도 춤을 고루 익히느라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인도 춤에는 영 재능이 없었지. 늘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했는데.’
부러 같이 남아서는 연습실 바닥을 데굴거리며 몸치라고 놀리면 그는 몹시 분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좀 너무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신한테 불리한 건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 탓에 카인 탓만 했지만, 그때도 지금도 이기적이고 짓궂은 그녀의 성격은 그대로였다. 어쩌면 쌓인 게 하도 많아서 마지막에 복수한 걸 수도 있었다.
‘아, 몰라. 그래도 걔가 나빠.’
찜찜함을 털어 버리려 엘리제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다 비슷비슷한 수준인 것 같은데. 이 중에 뭘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게 좋을까요?”
“글쎄. 난 무엇이든 상관없다. 네 생각은 어떻지?”
“으음…. 대본에 묘사된 걸 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둘이서 추고, 느리며 우아한 춤곡이라고 돼 있네요. 스킨십이 좀 많은 것 같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고른 춤곡은 알르망드였다. 그나마 쉬울 것 같아 고른 건데 뜻밖의 변수가 있었다.
“이 동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자의 팔을 꺾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거예요. 천천히 부드럽게, 상대 때문에 박자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회전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유독 회전이 많은 춤이다 보니 연습을 하는 동안 엘리제는 그의 과격함에 몇 번이나 눈물을 찔끔 흘려야 했다.
“으으, 내 어깨….”
그때마다 루카스가 치료해 준 탓에 금방 나아지긴 했지만, 시에나와도 이런 일이 생길까 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춤 매너가 이런 사람이랑은 두 번 다시 안 만날 것 같은데.’
특히 시에나의 춤 솜씨까지 별로라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안 되겠어. 이런 뻣뻣함으론 도저히 관계가 진척될 것 같지 않아.’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루카스에게 엘리제가 말했다.
“춤동작에 일일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럼?”
“지난번에 내 몸을 만졌던 거, 기억나요? 그때처럼 상대를 느끼고 교감하는 데 집중해요.”
엘리제는 그의 손을 끌어다 허리에 얹었다.
“어떻게 굴곡이 졌는지 느껴져요?”
“그래.”
“잡은 손의 크기, 촉감은 어떠한지도요. 눈 색은 어떠한지, 상대의 눈동자 안에 비치는 당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그런 게 왜 필요한 거지?”
아름다운 보석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녹안을 응시하며 엘리제가 말했다.
“<타락한 연인>에서 시에나와 루카스는 그날 처음 만나 춤을 추었죠. 그 장면을 무슨 의도로 넣었을까요?”
그녀의 말에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마도 그는 이야기의 결말에 다다르는 거만 생각했지 이 장면이 어째서 필요한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가 맡은 배역은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와 크게 상관이 없었고, 요원의 역할은 악마를 감시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주인공의 몸을 차지한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이제부터 당신과 시에나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의 목적은 한 가지죠. 당신이 그녀와 춤을 추고, 사소한 잡담을 주고받으며, 입 맞추고 관계를 갖는 것 모두 사랑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에요.”
잠시간 침묵하던 그가 물었다.
“너는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아나?”
엘리제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거기에 대해선 완전 낙제생이죠. 그냥 흉내만 낼 줄 알아요.”
“어째서지? 너는 유명한 배우였다지 않았나. 외모 또한 아름다우니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인기는 많은 편이었는데 그런 것과 연애는 또 다르니까요. 예쁘장하다고 교제를 신청했던 놈들도 내 성격을 알면 질겁해서 도망가더라고요.”
“네 성격이 어때서 그러지?”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리석군.”
엘리제는 방긋 웃었다.
“그렇죠? 내 성격이 뭐가 어때서.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아, 내가 말한 적 있나요? 당신도 정말 괜찮은 사람 같아요.”
“칭찬 고맙군.”
답하고 나서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 역시 사랑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 상관도 나를 파견 보낼 때마다 항상 그걸 배워 오라 말하는데 짐작조차 가질 않아.”
“으음. 그럼 당신도 저처럼 흉내만이라도 내요. 혹시 알아요?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랑에 빠지게 될지.”
“…그럴까.”
“그런 사람도 많더라고요. 연기일 뿐이었는데 상대 배우를 진짜 사랑하게 된다든지.”
그의 녹안이 반짝였다.
“그런 사례가 있다는 거군.”
“그럼요. 의외로 많아요.”
“좋아. 나도 최선을 다해 흉내 내도록 하겠다.”
각오를 다진 후 루카스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흉내 내야 하는지 알려 줘.”
“그래요.”
엘리제는 웃으며 그에게 몸을 붙였다.
“말했다시피 춤을 추는 건 당신과 시에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속해요. 최소한 시에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야만 하죠. 그러니 춤을 추느라 서로에게 닿는 몇 분의 시간 동안, 모든 감각을 동원해 상대를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봐요. 당신이 사랑할 만한 구석을 찾는 거예요.”
조곤조곤 설명하는 그녀의 말을 그는 열심히 마음속에 새겼다.
“알겠다. 해보지.”
그는 그녀의 말대로 모든 감각을 한계까지 일깨웠다.
춤을 시작하는 기본자세보다는 아주 살짝 가까운 거리. 손바닥이 마주 닿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세게 쥐면 부러질 듯 가느다랬다. 그는 제 손의 3분의 2도 되지 않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감아쥐었다.
허리에 손을 올릴 때나 그녀의 등을 받칠 때, 루카스는 얇은 옷감 너머 이미 한번 만져 보았던 엘리제의 살결을 떠올렸다. 부드러워 녹을 것 같은 희고 고운 몸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춤곡을 흥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즐거운 듯 미소 짓고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제자리에서 빙글 돌 때마다 연보랏빛 머리칼이 꽃잎처럼 퍼졌다가 내려앉았다.
그녀 역시 은근한 손짓으로 그의 등을 쓸었고, 잡은 손을 꼬물거려 손바닥을 간질였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를 담고 반짝였다. 세상에 오직 그 하나만 남은 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감각에 집중한 탓일까. 언제부턴가 쉽게 쫓을 수 있게 된 그녀의 체취가 한층 더 잘 느껴졌다. 생전은 물론 지난 500여 년간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언뜻 맡기엔 달콤하고 향긋했으나 그 아래 깔린 향은 농염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야릇한 살내였다.
‘사랑할 만한 것.’
저도 모르게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팔을 뻗어 멀어질 만하면 아쉬움에 마음이 초조해졌고, 품 안에 들어오면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턴을 할 때도 시선만은 그녀를 좇았다.
아까는 길게만 느껴졌던 몇 분의 시간이 몹시도 짧게 느껴졌다.
“당신, 훌륭한 학생이네요.”
그녀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어느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곡조가 끝나 있었다.
춤곡 한 번에도 그녀의 호흡은 가빴다. 가슴이 바쁘게 오르내리는 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다.
엘리제는 항상 그랬다. 형편없는 체력으로 온 열정을 쏟았다. 곁에서 지켜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여자였다.
그는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동그란 귀 뒤로 넘겨주었다. 뺨과 귓불, 목덜미. 그녀와 닿은 곳마다 열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정말 잘했어요.”
달싹이는 붉은 입술을 담는 순간, 루카스는 어쩐지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