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기
-59-





이에 답한 건 엘리제였다.







“당신은 누구지? 난 이 의상실의 주인을 만나러 왔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그녀의 자연스러운 하대에 사내가 머뭇거리며 답했다.







“난 이 건물의 관리인이오만….”



“건물 관리인?”







의아한 표정으로 엘리제가 물었다.







“건물 관리인이 닫힌 가게에 들어올 이유가 있나?”







같은 입장이었음에도 그녀의 태연하고도 뻔뻔스러운 태도에 사내는 뭐라 따지지 못하고 순순히 답을 들려주었다.







“세를 받지 못한 지 보름이나 된 탓에 여기 있는 드레스들을 처분하려던 차였소.”



“흐음. 보름이나 세를 받지 못했다?”



“그렇소. 그런데 정말로 누구신지….”







사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메리가 냉큼 답했다.







“프로이젠 대공비세요. 그리고 이 분은 네프러스 기사단의 부단장이신 클랜튼 경이시랍니다.”







관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짐작했던 것 이상의 고위 귀족임을 알게 된 그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괜찮네. 모르고 그런 것이니.”







그는 가게 안쪽에 자리한 소파로 그들을 안내했다.







“잠시 앉아 계시면 제가 뭐라도 대접할 걸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일단 어떻게 된 상황인지 먼저 듣고 싶은데.”



“아…. 네, 알겠습니다.”







사내는 주인을 대신하여 이 건물을 관리하는 관리인이었다. 엉거주춤 선 채로 그는 그 동안의 일들을 설명했다.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가는 시점, 건물 주인이 가게 보증금을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당장에 지불할 목돈이 없었는지 사라는 얼마간의 말미를 요청했고 다행히 주인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재계약 직전 가게 문을 닫고 사라진 그녀가 지금까지 깜깜무소식이라는 것이다.







월세를 받을 시기까지 지나 버리자 가게 안에 전시된 드레스라도 처분하려던 차에 엘리제가 나타났다.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아무리 훌륭한 조사관이라 한들 건물주가 보증금을 올려 달라고 할 것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연히 현실과 다름없는 이 세계에서 돈이 없어 식은땀을 흘렸을 사라를 생각하자 엘리제는 헛웃음이 나왔다.







“한데 비전하께선 무슨 일로 의상실에 방문하셨습니까? 혹 드레스를….”



“아니. 그런 용무가 아닐세.”







엘리제가 메리를 끌어다 사내 앞에 세웠다.







“이 아이가 사라의 친척이거든. 아끼는 시녀가 소식 없는 숙모 탓에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모른 척하고 싶지 않아서 와 봤네.”



“아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말인데,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이 가게를 내가 대신 임대하고 싶네.”



“네? 이 가게를요?”







놀란 관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세를 받지 못하면 다른 이에게 가게를 내줄 것이 아닌가. 주인에게도 나쁜 얘긴 아닐 것 같은데.”



“물론 그럴 겁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신지요? 속히 이 건물의 주인을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관리인이 나가고 나자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돈 구하러 간 것 같지?”



“그러게요. 제 생각에는….”







곰곰이 생각하던 메리가 말했다.







“용을 잡으러 갔을 것 같네요.”



“뭐?”



“그게 가장 돈이 되니까요.”



“…돈이야 되겠지만, 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가 문제 아닐까?”







이 세계의 용이 정확히 어떤 생명체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판타지 세계에서 그들은 최강의 존재로 그려지지 않나. 그걸 잡을 수 있는 능력이라면 이깟 보증금 따위가 문제 될 리 없다.







“그런데 이 가게를 임대해서 어쩌시게요?”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어떻게든 유지시켜야지.”



“네가 직접 와 있을 생각인가?”







루카스의 질문에 엘리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마침 배역을 잃은 조사관 둘이 있잖아요.”







그리 말한 엘리제가 품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냈다.







“어, 그건…?”



“이번에 황태자와의 내기로 받은 대가야.”







마개를 열자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퍼져 나갔다. 연기가 걷힌 자리에 나타난 사람은 반백의 머리칼을 가진 중후한 인상의 사내였다. 연기가 매웠는지 그는 한참이나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아앗! 피터!”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메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메리의 품에 있던 고양이도 함께 달라붙었다.







“이런, 오랜만이구나. 메리와 쿤.”







허허, 웃으며 메리와 쿤을 도닥인 그가 고개를 들어 엘리제를 바라봤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제 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뵙는 건 처음이군요.”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의 정중한 인사에 엘리제는 어색하게 답례했다.







“어, 네. 반가워요, 피터. 고생 많았죠?”



“아닙니다. 황태자의 몸을 하필 악마가 차지하는 바람에 도움도 못 되고 잡혀 버린 게 송구할 따름입니다.”







피터는 <타락한 연인> 최고의 악당이라 할 수 있는 황태자를 가까이에서 감시하기 위해 황태자궁의 시종 역을 맡았다. 경력자인 만큼 시종으로서 해야 할 역할은 훌륭히 감당했으나 상대가 악마였던 게 문제였다. 악마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특수능력을 사용하다가 걸린 것이다.







“중간지대 조사관들의 특수능력은 악마에게 간파당하기 쉽지.”



“당신은….”



“아, 이쪽은 윗세계 요원이에요. 본래 프로이젠 대공 몸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일이 잘못돼서 루카스 클랜튼이 되었죠.”



“네? 남자 주인공 말입니까? 세상에,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새려 하자 엘리제가 손을 저어 주의를 환기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급한 일부터 마무리해요. 건물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엘리제는 피터를 위해 사라가 의상실을 비우고 사라진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바로 내일, 여자 주인공이 여기에 방문한다는 것 또한.







“저런, 문제군요.”



“그래서 말인데. 당분간은 피터가 이곳 의상실을 맡아 줬으면 좋겠어요. 수석 디자이너로서요.”







그리 말한 엘리제가 쿤을 달랑 들어 올리며 말했다.







“쿤이 보조하는 것으로 하고.”



“네? 제가 어떻게 수석 디자이너를….”



“얘기할 테니 들어봐요. 임시로 세운 계획이지만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거예요.”







엘리제는 시에나가 방문하였을 때 피터와 쿤이 각자 담당해야 할 일들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다. 피터의 특수능력과 쿤이 가진 재능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피터는 다소 불안해했고,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는군.”







루카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한 것 같은데요? 역시 엘리제 님이야!”







물론 메리는 귀가 아프도록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일단은 이런 방식으로 내일의 위기를 모면하고서 뒷일을 생각하기로 해요.”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지요.”







쿤 역시 앞발을 들며 각오를 다졌다.







대강의 논의를 마무리 지었을 때였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안쪽 자리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아 클로드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엘리제를 따라 다른 일행들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블레이크.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죠? 건물 주인이 오면 금방 얘기를 끝낼 수 있을 거예요.”







엘리제의 말에 그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관리인에게 대강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게를 유지하길 원한다고요.”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당분간만이라도요.”



“알겠습니다.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요.”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던 그가 뒤늦게 피터를 발견하고 시선을 주었다.







“한데 저쪽은….”



“메리의 당고모부인 겔로그 남작이에요. 마침 이쪽 일에 경험이 있어서 부탁드리려던 참이었어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공 전하. 피터 겔로그입니다.”







블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에 답했다.







“반갑네. 아내를 도와준다니 고마운 일이군.”







말은 그리 하면서도 그는 예민하게 날 선 눈빛으로 피터를 살폈다. 낯선 사람에게는 대부분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다시 한번 문이 열렸다. 이번에 가게 안에 들어온 것은 멜릭과 클로드였다.







‘멜릭은 언제 온 거지? 오라는 건물주는 안 오고.’







황실 별장에서 보지 못했던 멜릭의 등장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군.”







묵례 후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멜릭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블레이크에게 건넸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이제 이 건물은 프로이젠의 소유입니다.”



“……?”







이어지는 멜릭의 말에 엘리제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옆 가게와 합하여 구조를 손보면 적당히 봐줄 만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군이 염려하신 대로 이 앞쪽 건물이 해를 막고 있더군요. 함께 매입했습니다. 상급 마법사를 두 명 정도 고용하면 오늘 중으로 말끔히 치울 수 있을 겁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직원 고용도 오늘 중으로 마무리 지을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믿겠네, 멜릭.”



“…….”







‘그 정도는 해야지’라는 표정으로 태연히 답하는 블레이크의 모습에 엘리제는 할 말을 잃었다. 역시 어느 세계에서든 돈이 최고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











그날 밤, 블레이크는 중요한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엘리제에게 양해를 구한 후 자리를 비웠다. 연기 연습이 시급했던 루카스에겐 매우 다행인 일이었다.







엘리제는 대본을 열어 그가 등장하는 부분을 확인했다.







“대사는 다 외운 거죠? 대본 리딩부터 한번 해 봐요.”



“그러지.”







엘리제는 홀로 루카스의 상대역을 모두 소화하며 장면 몇 개를 쭉 맞춰 나갔다. 그는 거의 더듬지도 않고 루카스 클랜튼의 대사를 줄줄 읊었다.







“거의 다 외우긴 했네요.”



“암기는 그런대로 자신 있다.”







루카스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요. 중요한 건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데….”







엘리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예의 바르고 다정한 원작 남자 주인공의 성격을 루카스가 과연 카피할 수 있을까. 엘리제는 실험 삼아 대사 몇 개를 따라 해보게 시켰다.







“부드럽고 나긋한 어조예요. 유의해서 따라 해보세요. 내게 당신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내게 당신을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야말로 무뚝뚝함 그 자체였다.







‘저 표정. 저 표정을 어떻게 하면 좋지.’







본인이 평생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은 단기간 연습한다고 해도 만들 수 없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엘리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캐릭터를 조금 수정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엘리제는 루카스에게 웃는 표정을 다양하게 주문했다.







“당신은 기분이 좋아지면 입꼬리만 아주 살짝 들어 올려요. 이걸 상대가 알아챌 만큼 확실하게 보여 주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그랬나?”



“자, 이리 와서 거울 앞에 앉아 봐요.”







그를 화장대 앞 의자에 앉힌 엘리제가 그의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였다.







“살면서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 봐요.”







엘리제의 말에 그는 고개를 기울인 채로 기억을 더듬었다.







짧은 생전의 삶과 요원으로서의 삶을 통틀어 가장 기분이 좋았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생각을 시작하기가 무섭게 즉시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매우 선명히 남은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