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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나는 내 것이 필요한 거거든? 섹스나 즐기려는 게 아니야.”
엘리제는 흥미 없다는 투로 대답하며 의자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가만 보니 당신, 말만 번드레하지 별 능력도 없는 것 같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이게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 아냐!”
“그래서 그 사정이 뭔데?”
“악마라고 다 내키는 대로 살 수 있는 줄 알아?”
엘리제는 홀짝,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충분히 내키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즐길 거 다 즐기고. 아하, 미래의 동료를 위해 네 걸 양보하기는 아깝다 이거지?”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까.”
렉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엘리제가 말했다.
“알겠으니까 내기 결과나 정산하자. 납치되는 바람에 난 결과를 몰라. 어쨌든 기권하거나 당신에게 잡히진 않았으니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렉스가 악마의 힘을 사용했다는 걸 알만한 존재는 윗세계 요원뿐이기에 엘리제는 그것에 대해서는 모른 척했다. 그녀와 윗세계 요원이 정보를 주고받고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된다. 어차피 내기의 내용이 적힌 계약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 야비한 악마라도 결과를 속일 순 없을 것이다.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내기는 네 승리야. 약속대로 네 동료를 풀어줄게.”
그러고 나서 그는 품을 뒤적거렸다. 뭘 하나 했더니 손바닥만 한 유리병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잘 봐. 거기 들어 있잖아.”
렉스의 말에 엘리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유리병 안을 들여다봤다. 너무 작아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얼핏 사람처럼 보이는 개미만 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마개를 열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별게 다 가능하구나. 신기하네.”
“깨뜨리지 않게 조심해. 그랬다간 안에 든 놈도 산산조각이 날 테니까.”
엘리제가 유리병을 손수건으로 감싸 갈무리해 넣을 때까지 렉스는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기에 엘리제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중간지대 조사관들은 그녀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야 할 뿐, 약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되찾는 게 그녀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져야 했다.
“자, 그러면 다음 보상을 요구할 차롄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하는 엘리제를 보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말해 봐. 질문이 뭔데?”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엘리제가 물었다.
“카인 리베르토 말이야, 혹시 이 세계에 있어?”
엘리제는 렉스의 한쪽 눈썹이 움찔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왜? 이것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야?”
“응. 발설할 수 없어. 계약서상에 명시된 거라.”
“알았어. 그럼 다른 걸 물을게.”
잠시 말을 고르던 엘리제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걔 기억을 가져갔잖아. 그럼 카인은 날 기억 못 해?”
그녀의 질문에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영원히?”
“그런 건 아니고. 내기가 끝날 때까지만.”
“흐음…. 그렇구나.”
그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질문은 끝인 거지?”
“응. 그 정도면 됐어.”
조금 전의 질문들로 엘리제는 확신을 얻었다. 카인 리베르트는 전생의 기억을 잃은 채 이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렉스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그건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였다. 얼핏 짐작했음에도 거짓을 말할 수 없는 계약의 보호망 안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만큼.
지금까지 발견한 정체불명의 회색 점은 총 셋. 그중 한 명은 <타락한 연인>의 남자 주인공이다. 황자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나머지 둘의 정체는 모호하다는 소리였다.
‘바트와 블레이크, 에릭 중 하나가 카인일 가능성이 있어. 혹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거나.’
아직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만큼 제3의 빙의자를 더 만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동안 악마의 행동을 예측하며 상대하려면 카인 리베르토를 찾는 것과 동시에 놈의 목적, 즉 내기의 내용을 알아내야 했다. 단순히 조사관들을 구출하고 시나리오를 무사히 마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 녀석이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곤란해.’
아무리 윗세계 요원이라 할지라도 악마의 소유가 된 영혼을 빼돌리긴 어려울 것이다.
‘내기의 내용이 뭘까. 나와 연관이 있는 걸까?’
내기가 끝날 때까지 그녀에 대한 걸 기억해선 안 되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위치를 발설할 수 없는 이유 또한.
“마법 수업은 연회가 끝난 후에 시작하자. 지금은 아무래도 황궁이 복잡하니까.”
“좋아.”
일전에 약속한 마법 수업에 관해 이야기한 후 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연회 때….”
철퍽!
갑자기 창가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는 말을 멈췄다.
“……!”
따라 일어나던 엘리제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렉스는 보지 못한 무언가를 그녀는 목격한 터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신경 쓸 것 없어. 어서 가보기나 해.”
창문 쪽을 막고서 등을 떠미는 엘리제 탓에 그는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방을 나서야 했다.
“그럼 태자 전하, 부디 살펴 가세요.”
“대공비, 속히 쾌차하시길.”
클로드를 의식하여 예의 바르게 인사한 엘리제는 그가 멀어지는 걸 보고 방에 돌아왔다. 재빨리 걸음을 옮겨 창문을 열자 보이는 건 창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두루미였다.
“…혹시 쿤이니?”
“뚜루.”
목이 긴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창문에 와서 철푸덕 부딪힌다 싶더니만 역시나 쿤이었다. 창문을 등지고 있던 렉스가 그 꼴을 보지 못해 다행이었다.
거의 창문 크기만 한 커다란 두루미를 잡아당겨 겨우 안에 들여놓고서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고서 여기까지 온 거야? 깜짝 놀랐잖아.”
비둘기였을 때 목이 부러질 뻔한 걸 교훈 삼아 두루미로 변신한 모양인데, 너무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뚜루루루….”
두루미가 제 발목 쪽을 부리로 가리켰다. 그곳엔 주머니 하나가 매여 있었다. 풀어서 열자, 돌돌 말린 자그마한 종이가 보였다.
‘엘리제 님, 큰일 났어요! 사라의 의상실을 겨우 찾긴 했는데 망했는지 사람이 없어요!’라는 내용이 쓰인 종이였다.
“뭐? 진짜?”
<타락한 연인>의 초반부, 여자 주인공 시에나는 사교계 시즌에 맞춰 제도 블럼데일에 오게 된다. 발이 넓은 투리스 자작부인이 그녀의 이모였고 동갑인 사촌, 카밀라 투리스와도 친한 사이라 몇 달간 거기서 머물며 신랑감을 구하기로 한 것이다.
제도의 유행을 살피러 의상실 거리를 구경하던 시에나는 ‘사라의 의상실’을 발견하게 되고, 작고 허름한 그곳에서 그녀를 무도회의 여신으로 변신시켜 줄 디자이너를 만나게 된다.
“왜 망한 거지?”
바로 그 의상실의 ‘사라’가 엘리제가 구해야 할 마지막 중간지대 조사관이었다. 메리의 말에 의하면 사라는 세계의 균열을 보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인재였다. 시에나의 조력자 역할인 만큼 메리나 쿤과 달리 경력이 상당하다고 들었다.
“…일단 가 봐야겠어.”
대본을 열어 확인해 보니 시에나가 드레스를 구경하러 돌아다니는 날짜가 바로 내일이었다. 당장에 그곳에서 드레스를 맞추는 건 아니지만, 의상실 내부를 둘러보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 만큼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했다.
“쿤, 메리에게 가서 의상실 근처 마차가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서 있으라고 전해. 나도 곧 출발할게.”
알겠다는 듯 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열어 낑낑거리며 두루미를 내보낸 엘리제는 다급히 방을 나섰다. 렉스의 마력을 쪽쪽 빨아먹은 임시 이동 마법진이 이미 완성되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엘리제, 그건 왜….”
엘리제의 무릎에 놓인 물건들이 신경 쓰였는지 블레이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잘 챙겨 두려고요.”
빙긋이 웃으며 엘리제가 답했다.
블레이크가 카인 리베르토일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하면 찜찜할 법도 하건만, 엘리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그를 대했다.
모든 걸 의심하기 시작하면 신경쇠약에 걸리기 마련이다.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때까지 엘리제는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카인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경계하고 떠본다 한들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그의 정체는 카인 외의 이들을 제하는 소거법으로 알아내야 했다.
‘어쨌든 블레이크는 아닐 거야. 카인이 얘처럼 귀엽지는 않잖아.’
임시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마차째 제도로 넘어온 그녀의 무릎 위에는 예의 가죽 수갑과 채찍이 놓여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던 겁니까?”
“네.”
아무리 강한 마법사나 기사라 할지라도 무력하게 만든다는 수갑이니만큼 유용할 것 같아 챙겼는데, 블레이크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보니 짓궂은 생각이 치밀었다.
사슬에 매인 채 참느라 입술을 깨물 블레이크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약속을 어기면 채찍을 사용해도 좋다고 말한 건 그였으니, 못 이기는 척 써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팔 힘이면 고통을 주기는 힘들 테고, 간지러운 쾌감에 몸부림치게 되지 않을까.
‘나중에 꼭 써 봐야지.’
음흉한 웃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엘리제는 입꼬리에 힘을 줬다. 그녀가 저를 두고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면 그는 질겁하여 도망갈 것이다.
‘나도 그런 변태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렉스에게 영향을 받은 탓인지 아니면 블레이크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인지 자꾸만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흘렀다.
어쨌든 지금은 그보다 급한 일이 있기에 엘리제는 도로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번잡한 중심가를 통과하고 있어 마차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혹여 놓칠세라 눈도 깜빡이지 않은 보람이 있어, 엘리제는 고양이를 안고 대로변에 서 있는 메리를 놓치지 않고 발견할 수 있었다.
“앗…! 블레이크, 잠시만 마차 좀 세워줄 수 있나요?”
블레이크는 의아해하면서도 마부석 쪽 벽을 톡톡 두 번 두드려 마차를 세웠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제 시녀 메리가 저기 있어서요. 표정이 좋지 못한데 무슨 일인지 가 봐도 될까요?”
한낱 시녀의 기분 따위에 신경 쓰는 그녀가 이상할 법도 하건만, 블레이크는 군말 없이 마차에서 내려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메리!”
“엘리제 님!”
엘리제를 발견한 메리가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왔다. 블레이크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메리에게 바쁘게 다가간 엘리제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엘리제 님, 저는 정말 어떻게….”
“세상에, 그랬니?”
뭐라 뭐라 웅얼대는 메리를 더 꽉 안으며 엘리제는 아무렇게나 맞장구쳤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담.”
“……?”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겠구나.”
메리의 눈가를 훔쳐 주며 엘리제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메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메리의 숙모가 오래전부터 운영해 온 의상실이 문을 닫았다니,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니.”
“네? 어, 그게 그러니까….”
“아니야.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어서 가보자꾸나.”
눈치 없는 메리의 입을 막기 위해 엘리제는 그녀의 발을 지그시 밟아 주었다. ‘조용히 하렴, 메리.’ 다행히 메리는 그녀의 입 모양을 읽고 입을 다물었다.
뒤편에 서 있던 블레이크를 돌아보며 엘리제가 물었다.
“블레이크, 바쁘면 먼저 돌아가시겠어요? 급하게 가볼 곳이 있어서요.”
“아니요. 같이 가지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듯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블레이크가 마차를 경호하던 클로드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는 사이 엘리제에게 다가온 루카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길 만한 부분을 발견했어요.”
엘리제의 말에 놀랐는지 그의 눈이 평소보다 아주 살짝 커졌다.
“뭐? 정말인가?”
“네. 시에나가 드레스를 맞춰야 할 가게가 문을 닫았어요.”
“그렇군.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다.”
딱히 악마와 얽힌 문제 같진 않았지만, 엘리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많을수록 좋았다.
잠시 후, 블레이크가 클로드와 함께 돌아왔다. 마차와 말 몇 필을 남겨둔 채 기사단은 저택으로 출발했다.
블레이크는 엘리제와 함께 있는 루카스를 보고도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나름대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뭔가 대화가 오고 간 모양이었다.
제도의 의상실들은 중심가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곳에 모여 있었다. 경쟁하듯 화려한 드레스를 전시하여 귀부인들의 시선을 끌어보려 애썼다.
그러나 메리가 앞장서 안내한 곳은 중심가에서 벗어난 곳에 자리한 건물이었다. 건물 자체는 허름하지 않았지만, 자리가 좋지 못하고 가게 또한 자그마했다.
엘리제가 유리창 안쪽 컴컴한 내부를 기웃거리는 사이, 루카스는 가게 문을 똑똑 두드리다 잡아당겼다. 중간에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어쨌든 문이 열렸다.
엘리제는 루카스를 앞세워 메리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다행히 블레이크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유리창 너머로 보니 그는 상가 건물을 올려다보며 클로드와 뭔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누구시오?”
안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이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