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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내 걱정을 합니까.”







생각보다 더 침울해하는 블레이크를 보니 연기도 적당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루카스를 곁에 둔다는 목적은 이뤄야겠지만.







엘리제는 이불 속에서 꼼지락 손을 움직여 가운 끈을 느슨하게 해두었다.







“미안해요, 블레이크. 또 걱정을 끼쳤네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이불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모두 내 잘못….”







말을 하다 말고 그는 말을 멈췄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목덜미와 가슴골에 시선이 닿은 탓이었다. 커다래진 눈으로 블레이크가 그녀를 팔을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엘리제, 잠시만 내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다급한 외침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뭘….”







엘리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느슨했던 그녀의 허리끈을 당겨 풀고는 가운을 벌렸다. 밀부를 가린 자그마한 속옷을 제외하면 완전히 드러난 그녀의 몸은 마냥 희었다. 붉은 흔적도, 멍도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그는 좀 더 확실히 하려는 듯 그녀의 다리 사이도 확인하려 들었다. 블레이크의 기세에 떠밀려 도로 침대에 누운 엘리제는 다리를 벌려 허벅지 안쪽도 보여 주었다. 엘리제의 고혹적인 자태에 넋을 잃은 것도 잠시, 블레이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다 나았군요.”



“제 몸에 상처가 있었나요?”



“그랬습니다. 게다가 심하게 앓기까지 했습니다. 클랜튼 경이라면 혹시 부인의 몸을 회복시킬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도움을 청했는데, 이런 결과까지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아…! 그럼 오라버니가 절 치료한 건가요?”







엘리제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척했다.







“오라버니의 치유력은 비밀이라고 했는데….”







혼잣말에 가까운 그녀의 중얼거림에 블레이크가 멈칫하여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저뿐이었거든요. 본인의 생명과 맞바꾸는 거라서 절대 타인에게는 알릴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럼….”



“저를 치료해 준 만큼 오라버니도 고통받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늘 표정이 안 좋은 거고요.”







루카스가 들었다면 정색할 법한 얘기지만 블레이크는 그녀의 말을 믿는 듯, 한 대 맞은 표정이 돼 버렸다.







“그랬던… 거군요.”







충격을 받은 듯한 그를 보고 있자니 아주 살짝 양심이 찔려 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밑 작업을 해두는 편이 나았다. 성격 나빠 보이는 루카스의 무표정 탓에 블레이크도 그를 더 싫어하지 않나. 굳이 사이좋게 지낼 필요까지는 없어도 서로를 경계하거나 싫어하는 건 피해야 한다.







“당신이 오라버니를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저도 멀리하려 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 버렸네요. 이제 전 괜찮으니까 오라버니는 돌려보내셔도 돼요.”



“불편하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낯을 좀 가려서 그랬던 겁니다.”







그리 말해 놓고 블레이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동안 루카스에 대해 오해했던 것 그리고 앞으로도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앞으로는 부인이 신경 쓰지 않게 내가 잘 하겠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엘리제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우리 남편 낯가린대!’







자신이 못됐다는 건 알지만, 엘리제는 그가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가여워라. 나라도 위로해 줘야지.’







그래서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고선 제게로 끌어당겼다. 블레이크는 순순히 그녀에게 끌려왔다.







쪽, 가볍게 맞닿는 입술에 그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고마워요, 블레이크.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죠?”



“…네. 압니다.”



“언젠간 이 모든 걸 갚을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엘리제를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기울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엘리제의 입술을 부드럽게 누르고 스며 나오는 따스한 숨결을 만끽했다.







지그시 감은 그의 눈과 눈썹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엘리제는 스스로 입을 벌려 길을 내주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침범한 그의 혀가 헤매지 않도록 제 혀로 맞이하여 깊이 끌어들였다.







벌린 다리 사이로 지그시 눌린 그의 것이 느껴졌다. 몸을 비틀 때마다 아래가 비벼지며 절로 숨이 가빠졌다. 뒤엉킨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둘 다 모른 척 입맞춤에만 몰두했다.







‘양심이 있으면 또 덤벼들진 못하지.’







간밤에 온 시트와 그녀의 몸이 사정액으로 뒤덮일 만큼 안고도 아직 성욕이 남아 있는 게 참으로 대단했다.







입술을 떼고 나면 그녀를 놔줘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그는 도통 끝낼 줄을 몰랐다. 한참의 입맞춤이 끝났을 때 둘은 섹스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흐트러져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숨을 고르던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으로는 언제 돌아가나요?”







며칠 후, 드디어 두 주인공이 만난다. 연회에 참여하려면 그녀 역시 준비가 필요하기에 가능한 한 빨리 대공저로 돌아가는 편이 좋았다.







“마차를 타고 가는 건 아직 무리일 것 같아서 임시 이동 마법진을 설치 중입니다. 마나만 주입하면 되니 곧 마무리될 거예요. 혹시 그 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시녀들에게 얘기하면 됩니다.”



“네, 그럴게요.”



“그리고….”







잠시간 머뭇거리던 블레이크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황태자가 부인을 만나고 싶다는군요.”



“태자 전하께서 저를요?”



“2황자가 벌인 짓에 대해 황실을 대표해 사과하고 싶다고 합니다. 거절하려 했는데 그, 수갑을… 풀어야 할 것 같아서….”



“아….”







제 손목을 쳐다본 엘리제의 뺨이 붉어졌다.







‘팔이 뻐근하긴 했지만, 나름 재미있었지.’







에릭이 정말로 블레이크가 했던 그런 야한 짓을 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를 순순히 풀어줄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내가 거부하리란 걸 짐작했던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락한 연인> 속 엘리제 클랜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은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그녀가 귀족이 누릴 수 있는 권력과 호화로운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남매는 진즉에 야반도주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중 대공비는 그러지 않았다. 대공비로서 누릴 수 있는 삶을 포기하지도, 의붓오빠 루카스 클랜튼을 어장에서 놓아주지도 않았다. 그러니 대공과 이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애꿎은 시에나만 갖가지 망신을 주며 괴롭힌 것이다.







‘나 못지않게 이기적인 캐릭터란 말이야.’







어찌 보면 그만큼 비슷한 구석이 많기에 눈치 빠른 남자 주인공이 누이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걔 앞에서는 조심해야지.’







의심이라도 하게 되면 이야기가 틀어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대공비와 황자는 마주치기 쉽지 않은 관계였다. 작정하고 피해 다니면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별문제 없을 것이다.











***











황태자를 만나기에 앞서 엘리제는 대공가 시녀들이 챙겨온 드레스를 입고 호신용 팔찌도 찼다.







떼를 썼는지 어쨌는지 그는 기어코 엘리제와 단둘이 만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대신 방문은 반쯤 열어둔 채로 클로드가 지키게 했다.







‘뭐, 마법으로 소리를 차단하면 그만이니까.’







그녀의 예상대로 황태자는 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손을 휘저어 방 전체에 마법을 걸었다. 그러고는 짜증스럽게 외쳤다.







“네 가짜 남편은 악마보다 더한 놈이야!”







찻잔을 기울이며 엘리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라는 건지.”







성큼성큼 다가온 렉스가 잔뜩 심통 난 표정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내 다리를 부러뜨리려 해놓고도 사과 한마디 안 하더니, 여기 오자마자 그놈의 이동 마법진을 만들어 내라고 들들 볶더라니까. 내가 진짜 황태자였으면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쪽쪽 빨려서 앓아누웠을 거야.”



“그래서? 한 소리 했어?”



“한 소리 하긴 뭘. 시키는 대로 했지.”



“와아. 대단하네.”







그녀의 성의 없는 감탄에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네 가짜 남편이 얼마나 악랄한지나 잘 알아 둬.”



“악랄한 게 아니라 똑똑한 거지.”



“…….”







그는 우아한 자태로 차를 마시는 엘리제를 쳐다보다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2황자랑 무슨 일 있었어?”







그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왜? 궁금해?”



“아니, 뭐. 손목에 그런 것까지 채워 뒀으니. 너도 꽤 흥분한 상태였을 거 아냐.”







윗세계 요원의 정체를 모르는 그는 엘리제 또한 최음제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었을 거라 믿는 듯했다.







“아쉽네. 같이 즐겼으면 더 좋았을걸. 혹시 난교해 봤어? 한번 해보면 그 맛에 푹 빠질 거야.”







야살스럽게 웃으며 혀를 내어 입술을 핥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었다. 어째 악마는 갈수록 정신이 이상해졌다. ‘지져’ 공격에 당해서 뇌에 이상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뇌가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거나 풀어 줘.”



“그래. 당연히 풀어 줘야지.”







그는 태연하게 그녀의 손목을 감아쥐었다. 맨살에 닿는 손이 뱀처럼 차가워 소름이 돋았으나 엘리제는 티 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손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인다 싶더니 가죽 수갑 위로 마법진이 드러났다. 아주 작게 ‘철컥’ 소리가 들린 연후, 수월히 손을 뺄 수 있을 정도로 헐거워졌다.







엘리제가 냉큼 손을 빼자 손에 쥔 수갑을 흔들며 그가 물었다.







“이거 나 가져도 돼?”



“아니? 안 되는데?”



“…응?”







당연히 된다고 할 줄 알고 가져가려고 하던 그가 멈칫하여 그녀를 쳐다봤다.







“왜? 쓸 일도 없으면서.”



“블레이크랑 쓸 거야.”







그의 손에서 수갑을 가져가며 엘리제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도구는 영 익숙지가 않지만, 그래서 더 자극적이었다. 게다가 마법이 사용된 도구이니만큼 이 세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 아닌가.







“우리 남편이 도구를 꽤 잘 사용하더라고.”



“뭐, 뭐?”



“누가 시합장에 그딴 장난질을 쳐 놨는지 몰라도, 덕분에 아주 즐거웠어. 피부도 좀 좋아진 것 같지 않아?”







그의 표정과 눈빛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황자와 했냐고 물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간밤의 일을 떠올리는 듯 황홀한 미소가 만면 가득 드리워져 있었기에, 렉스는 엘리제가 저를 집요하게 살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블레이크가 너무 좋아져서 큰일이야. 이러다 이 세계에 눌러앉고 싶어지면 어쩐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나랑 같이 가야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엘리제가 물었다.







“혹시 카인이 안 되면 쟤라도 나 줄래? 둘 다 주면 지금 바로 계약서 쓴다, 내가.”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그의 입에선 즉답이 나오질 않았다.







블레이크 안에 든 것이 어떤 이의 영혼이든, 아직 악마의 것이 아니란 소리였다. 게다가 엘리제와 사이가 좋아지는 것에 대해 짜증스러워하는 기색이 언뜻 보였다.







“너도 정말 남자 보는 눈이 없다.”







내뱉는 말이 겨우 그런 것이었다.







“왜? 더 괜찮은 남자라도 있어?”



“당연하지.”



“누구? 데려와 봐.”







잠시간 잠잠하던 그가 도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그의 금안이 요사스럽게 번뜩였다.







“나랑 한번 할래? 블레이크 따위 생각도 안 나게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