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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는 침대에서 내려와 서둘러 옷을 걸쳤다.







엘리제와의 독대를 청할 때 루카스는 분명 누이를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와 만난 직후 엘리제는 깨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 온 만큼 그녀의 지병에 대해 의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문을 열고 방을 나서자 창백한 얼굴로 복도에 서 있는 클로드의 모습이 보였다.







“주군…!”







몹시도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블레이크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클로드, 혹시 제도에서 나올 때 루카스 클랜튼도 함께 왔나?”



“저희와 함께 온 것은 아니나, 새벽쯤에 당도하여서는 비전하를 뵙고 가겠다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예상대로였다.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닌 작자였으나, 겉보기와 달리 동생을 위하는 마음은 진짜인 듯했다.







“데려와. 어서.”



“네, 주군.”







다급히 뛰어나간 클로드가 오래지 않아 루카스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블레이크는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루카스를 조용히 응시했다. 마음이 몹시도 복잡했다. 그의 평생에 타인에게, 그것도 싫은 감정만 가득한 상대에게 도움을 청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대공 전하.”







그의 앞에 멈추어 선 루카스가 고개를 숙여 예를 취했다.







“클랜튼 경.”







몇 번이나 말을 고르던 블레이크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싸워 보자는 건가 싶어 그의 주먹에 시선을 주었던 루카스는 이어지는 블레이크의 말에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염치없지만, 도움을 청하려고 불렀소.”



“…도움…이라고 했습니까?”







루카스의 반문에 블레이크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소. 내 부주의 탓에 엘리제의 몸이 상한 듯한데… 방법이 있다면, 경이 좀 살펴주었으면 해서.”



“주군….”







놀란 것은 루카스만이 아니었다. 뒤에 서 있던 클로드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루카스의 시선이 닫힌 문으로 향했다. 얼마나 상태가 안 좋기에 저 오만하고 성격 나쁜 대공이 이렇게 저자세로 굴까 싶어 괜스레 초조해졌다.







“알겠습니다. 대신, 둘만 있게 해 주십시오.”



“…알겠소.”







입술을 꾹 깨문 채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는 블레이크와 클로드를 뒤로하고 홀로 방에 들어갔다.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하얀 방 한가운데,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가 덩그러니 있었다.







문을 닫고서 잠시간 주변의 기척을 살피던 그가 빠른 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체취가 더욱 짙게 풍겨 왔다.







엘리제는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간혹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대공의 말대로 어딘가 아픈 듯했다.







“엘리제.”







툭툭 건드려 보았으나 그녀는 깨어나지 않았다.







외상이 있다면 그곳을 중심으로 치유하는 편이 나았기에 루카스는 이불을 들추었다.







잠옷이라도 입고 있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엘리제의 드러난 몸을 보고 그의 동공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엉망이군.”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자연스레 상상이 갔다. 안 그래도 엘리제에게 집착하는 블레이크가 최음제에 중독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미쳐 날뛰었겠는가.







어차피 어느 한곳 가릴 것 없이 울긋불긋했기에 그냥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고 힘을 발휘했다.







화악-!







하얀빛이 번뜩이고 나자 엘리제의 몸은 깨끗이 회복되었다.







치유의 힘을 일으키는 순간 루카스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자는 것일 뿐이었다. 몸에 쌓인 피로와 자잘한 상처를 모두 없앴으니 이제 곧 깨어날 것이다.







다시 이불을 덮어준 루카스는 침대 곁에 쪼그리고 앉아 엘리제의 자는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봐.”







이제 앓는 소리도 내지 않고 행복한 표정으로 쿨쿨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납치됐다는 걸 알고 얼마나 당황했던가. 중간지대의 조사관 메리는 그와 쿤을 붙들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만 자고 좀 일어나 보지?”







흔들어 깨울까 고민하던 차에, 엘리제가 길게 하품을 했다.







“으응…. 더 잘래. 더 잘 거야.”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검지로 엘리제의 볼을 꾸욱 눌렀다.







“네 동료들이 얼싸안고 징징 짜고 있는 건 아나?”



“내 동료…?”







눈을 감고 잠시간 웅얼대던 엘리제가 번쩍, 눈을 떴다. 그녀의 연보랏빛 눈에 반짝반짝한 윗세계 요원의 얼굴이 들어찼다.







“어라?”







엘리제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블레이크는요?”



“복도에. 네가 깨어나질 않으니 대공이 큰일 난 줄 알고 나를 불렀다.”



“아.”







그의 말에 엘리제는 간밤의 일을 떠올렸다.







성을 헤매고 다니며 엉겨 붙은 이들을 목격했을 때부터 그녀는 궁금했었다. 본능만 남은 블레이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할지.







그래서 그에 대한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유혹하여 관계를 가졌고 모든 게 상상 이상이었다. 절제력을 잃은 블레이크는 발정기의 짐승 그 자체였다. 끝도, 한계도 몰랐다.







“진짜 죽을 뻔했지.”







역시나 그녀의 가짜 남편은 여러모로 최고였다. 만족감에 웃음이 나왔다. 일 년 동안 섹스를 안 해도 고프지 않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밤을 보냈다.







“죽을 뻔했다고? 뭔가 위험한 일이 있었던 건가?”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엘리제는 작게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시합은 어떻게 됐어요? 혹시 나, 기권 처리된 건 아니죠?”







스스로 시합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장소를 이탈했으니 기권으로 처리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을걸.”



“응? 왜요?”



“놈이 악마의 힘을 끌어다 사용했거든.”







루카스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기는 너의 승리다, 엘리제.”







동그래졌던 엘리제의 눈에 기쁨이 번졌다.







“세상에, 멍청한 악마 놈 같으니! 예뻐 죽겠네!”







렉스에게 대가를 받아낼 걸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루카스도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엘리제는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신도 좋아요?”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했다.







“놈은 내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악마의 힘을 사용했다. 규칙을 어겼다는 증거를 벌써 하나 확보한 셈이지.”



“오, 그렇군요. 잘됐어요.”







엘리제는 신이 나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루카스의 일이 잘 풀리니 그녀도 기뻤다. 루카스는 제 어깨를 두드리는 그녀의 손을 힐끗 쳐다보면서도 싫은 기색 없이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대체 2황자는 왜 널 납치한 거지?”



“아, 그 얘길 깜빡할 뻔했네요.”







엘리제가 그를 향해 바짝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에릭 러셀의 몸에 <타락한 연인>의 남자 주인공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뭐? 그게 정말인가?”



“본인 말로는 그래요. 꽤나 신빙성도 있고요. 제가 진짜 ‘엘리제 클랜튼’인 줄 알고 납치한 거였어요.”







엘리제는 그가 했던 말과 행동, 제 손목에 채워 둔 수갑의 용도에 대해서 루카스에게 간략히 전해 주었다.







“그런… 캐릭터였던가. 나름 선하고 정의로운 측에 속하는 줄 알았는데.”







그녀의 얘길 들은 루카스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모르죠, 뭐. 자기 몸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삐졌는지 어쨌는지. 아무튼, 좀 수상한 구석이 있어서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긴 해요.”



“알겠다. 나도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지.”







그때, 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엘리제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악마 놈이 왔다.”







커튼을 젖혀 밖을 내다본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멀쩡해 보이는군.”



“안 멀쩡할 건 또 뭐예요?”



“블레이크에게 하체를 위주로 꽤 오랫동안 맞았거든.”



“…네?”







엘리제는 제가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싶어 루카스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블레이크가 황태자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공격했다. 다리라도 부러뜨리려 한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실패했다. 힘을 써서 빠져나갔거든.”



“설마, 그래서….”







그 몇 마디 말로 엘리제는 사건의 정황을 알아차렸다. 황태자고 뭐고 무자비하게 쥐어 패는 블레이크 탓에 렉스가 악마의 힘을 사용한 것이리라.







“우리 남편… 괜찮은 걸까….”



“아마 황태자도 딱히 문제 삼진 않을 거다. 성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놈도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많을 테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루카스는 커튼을 도로 내리고 다시 그녀 쪽으로 와 앉았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지? 이제 곧 시나리오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야.”



“알아요. 그래서 말인데, 이왕 치료사 역할을 맡은 김에 며칠 더 제 곁에 있겠다고 해요. 나도 적당히 아픈 척할 테니까.”







블레이크가 먼저 도움을 청한 모양이니, 아마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거짓말을 하라는 건가.”



“네. 시에나를 만나기 전에 바짝 특훈해야죠.”







생긋 웃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이따가 다시 오도록 하지. 황태자가 블레이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야겠다.”



“그래요. 대본 리딩하게 미리 연습 좀 해두고요.”



“그러지.”







손을 흔드는 엘리제를 뒤로하고 루카스가 방을 나갔다.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하고서 엘리제는 똑바로 누웠다. 내기에서 이겼으니 황태자에게 보상을 요청할 일만 남았다.







‘황궁의 지나가는 시종 13’역을 맡았던 중간지대 조사관은 메리의 사촌 정도로 둔갑시킨 후 저택에 고용시켜 달라고 떼를 쓰면 될 것이다.







‘그리고 질문은….’







그녀는 새하얀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곳에서의 삶이 나름대로 재밌다 한들 결국은 모든 게 가짜였다. 아직도 그녀에겐 생전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이기에 렉스에게 묻고 싶은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황실 소유의 별장인 만큼 상주하여 일하는 사용인들이 존재할 테지만, 엘리제의 시중을 들기 위해 방에 들어온 이들은 모두 대공저의 시녀였다.







엘리제는 내온 음식을 말끔히 먹어 치웠다. 안 그래도 허기지던 참이라 꿀맛이었다. 찝찝하던 몸을 개운하게 씻고서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새 시트가 깔린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풀썩 드러누워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제는 재빨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문가를 바라봤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더니 블레이크가 들어왔다.







“블레이크….”







엘리제는 제게 다가오는 그를 향해 힘없이 미소 지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엘리제. 몸은 좀 어떻습니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당신은요? 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걱정이 한가득 담긴 그녀의 눈빛에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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