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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맺혀 흐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엘리제가 입술을 달싹였다.
“화…나셨어요?”
“그래 보입니까?”
되돌아온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겁먹은 것 같은 모습에 그는 멈칫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아니, 화난 게 맞았다. 그녀가 다른 이를 가엽게 여기는 게 싫었다. 호의를 보이는 게 싫었다. 그녀의 모든 관심과 애정은 오로지 그의 것이어야 했다. 그 누구와도 나눠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배우자의 사생활에 정도 이상 관여하지 않는 게 당연시 여겨지는 귀족 사회에서 그의 그러한 욕심을 엘리제가 어찌 생각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멈추고 입을 굳게 다문 채 손에 마나를 주입했다. 푸른 마나가 맺힌 손에 힘을 주어 수갑과 맞붙은 사슬 끝을 비틀자 어렵지 않게 툭, 떨어져 나갔다.
“아…!”
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손목 탓에 비틀거리는 그녀를 그가 조심스레 붙들었다. 수갑을 풀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에게 몸을 기대고서 팔을 주무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뒤늦게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무서웠다면 미안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사죄의 말을 건넸다.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묶어 놓고 괴롭혔으니 마음 여린 그녀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황자에게 허락하네, 마네 지껄여댄 탓에 그의 치졸한 질투를 그녀 또한 눈치챘을 것이다.
고개를 든 엘리제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블레이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불안하고 초조하여 가슴이 조여들었다.
잠시 후, 그녀의 연보랏빛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니에요. 당신을 걱정하게 만든 제 잘못인걸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싸더니, 짓씹고 있던 블레이크의 입술을 엄지 끝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다정한 손길에 그제야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블레이크…. 왜 이렇게 몸이 뜨거워요?”
엘리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얼굴도 빨개요.”
“아.”
그가 멈칫하여 그녀의 허리에 둘렀던 팔을 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음 성분의 독을 제때 풀지 못한 탓이었지만 굳이 그녀에게 밝힐 필요는 없었다. 황자에 대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그녀를 괴롭히긴 했지만 안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 같은 상태에서 그녀를 품었다가는 적당히 끝내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야 어떨지 몰라도 점점 이성을 잃어 짐승처럼 굴 게 빤했다. 이미 한차례 놀라고 실망했을 그녀에게 이보다 더 못난 꼴을 보일 순 없었다.
“여기서 잠시만 쉬고 있어요. 곧 기사단이 도착할 겁니다.”
그녀를 제게서 떼어 놓고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그를 엘리제가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리를 벌리자 찢어진 드레스를 간신히 걸치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망막에 선명히 새겨진 후였다.
“블레이크…?”
도톰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너무도 달았다.
“왜 절 피하세요? 역시 화나신 거죠?”
엘리제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블레이크는 당황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급한 외침에 놀랐는지 엘리제가 어깨를 움츠렸다. 블레이크는 목이 바짝 타는 걸 느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저 지금 내가, 약… 그러니까, 안 좋은 성분의 약에 중독돼서 그렇습니다.”
더듬거리며 털어놓자 엘리제가 알겠다는 듯 그의 허리춤을 내려다봤다.
“아….”
그녀의 시선에 그는 절로 굳어졌다.
“야한 마음이 들게 하는 독이 풀렸다더니, 당신도 당한 거군요.”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가 들뜬 것처럼 들렸다. 아마도 지금 그가 제정신이 아닌 탓이리라.
“어쩌면 좋아. 일단 옷을 벗어서 열을 떨어뜨리는 편이 좋겠어요.”
“아니….”
곧 클로드가 해독제를 가지고 올 거라고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 수많은 독에 대한 내성과 지독하다 할 만한 인내심 덕에 버티고 있으나 한계를 벗어나면 도리가 없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녀를 말리고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머뭇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몹시도 가증스러운 짓이라는 건 잘 알지만 조금만 더 그녀의 상냥함에 기대고 싶었다.
기대감, 아니…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낑낑대며 제 옷을 벗기는 그녀가 몹시도 귀엽고 예뻤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바지를 벗기려 할 때 엉덩이까지 들어 주며 협조했다.
최음제에 노출된 데다가 그녀의 손길에 더욱 성이 난 그의 페니스가 투명한 액을 질질 흘렸다. 바라는 것이 뭔지 참으로 알기 쉬운 모습이었다.
한참을 애쓴 끝에 엘리제는 그의 옷을 모두 벗겨 침대 아래 쌓아두는 데 성공했다.
“욕실에서 차가운 물수건을 좀 가져올까요? 아니면 제가….”
뺨을 붉힌 채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방법으로 도울 수 있을까요?”
유혹처럼 느껴지는 건 이번에도 아마 그의 기대감이 빚은 착각일 것이다.
블레이크는 그녀의 말에 답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남은 이성이 위험 신호를 보내왔으나 짐승 같은 본능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녀가 살짝 몸을 일으켜 그의 무릎에 걸터앉았다. 목덜미에 엘리제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한 가슴이 단단한 몸에 눌려 이지러졌다.
모든 감각이 그녀를 느끼는 데 집중되었다. 지상에 현현한 밤의 여신이라 해도 그녀처럼 매혹적이진 않을 것이다.
“블레이크.”
그녀의 입술이 귓불에 닿았다. 달아오른 숨결을 흘리며 그녀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참을 필요 없어요.”
“……!”
속절없이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
클로드는 프로이젠의 청, 홍, 백 세 기사단의 단장 중 가장 충성심이 강하고 성실했다.
블레이크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왔고, 여태껏 그를 실망하게 만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어떤 선택을 하든 주군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듯했다.
비스듬히 열린 방문을 닫아야 할까, 내버려 둬야 할까. 들어가서 블레이크에게 해독제를 건네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어느 것 하나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루카스 클랜튼이 엘리제의 보호를 자처하는 바람에 클로드는 친목 시합에 참여하지 않았고, 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부서진 테라스의 잔해에서 이동 마법진을 발견하고 경로를 역추적하기까지 대공은 정말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뒤늦게 호출을 받고 달려갔으나, 그의 입에서 욕지거리와 함께 흘러나오는 몇 안 되는 단서들로는 상황 파악이 힘들었다.
엘리제의 보호자였던 루카스 클랜튼이나 시녀 메리 역시 별 도움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클로드가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게 된 건 블레이크의 파트너로 시합에 참여했던 마법사 모리스 덕이었다.
‘비전하가 납치됐다니!’
청천벽력할 일이었다. 게다가 블레이크를 포함한 대다수가 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블레이크는 해독이고 뭐고 이동 마법진의 경로가 밝혀지자마자 달려 나가 버렸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며 만류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독이 성안에 풀린 경위와 독의 정확한 성분을 알아내기엔 시간이 없었다. 클로드는 중독된 기사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해독제를 먹여 보고 그중 효과가 있는 것을 찾아내 블레이크를 뒤쫓았다.
엘리제가 납치된 장소는 제도 인근 황실 소유의 별장이었다. 기사단으로 하여금 본관을 에워싸도록 지시한 후 그는 홀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복도에 발을 들였을 때, 그는 2황자 에릭 러셀을 발견했다. 황자는 비스듬히 열린 문을 등지고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황자 전하.”
클로드의 부름에도 황자는 꼼짝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서야 힐끗 쳐다보더니 음울한 표정으로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대로 그를 보내도 되나 싶었지만, 대공가의 기사일 뿐인 그에게 황자를 체포할 권한은 없었다.
일단은 블레이크를 만나 해독제를 전하는 게 우선이란 생각에 그는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안에 들어서기 직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흐윽… 제발, 블레이크… 그만….”
가냘픈 신음이 방 안에서 새어 나온 것이다.
‘이 일을 어쩌지.’
클로드는 늦었음을 직감했다. 중독된 상태로 대공비와 몸을 섞기 시작했으니, 체력이 다하기 전까진 멈추지 못할 것이다.
애원에 가깝던 대공비의 목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하고, 오래지 않아 거의 들려오지 않을 지경이 되자 클로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클로드는 대공비의 건강이 몹시 좋지 못하다는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쓰러진 후 며칠이나 깨어나지 못하다가 오늘에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다시 또 의식을 잃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대공에게 해독제를 먹여야 하는 게 아닐까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국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날이 샐 때까지 애꿎은 머리만 쥐어뜯었다.
***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밝은 햇살이 침대 위까지 스며들었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끙끙 앓는 소리에 블레이크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엘리제가 그의 가슴에 등을 붙이고 안겨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그녀의 몸은 붉은 자국과 멍으로 엉망이었다. 심지어 그녀 안에는 여전한 크기의 제 것이 박혀 있기까지 했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간밤의 일들에 그는 숨쉬기를 멈췄다.
“내가…. 무슨 짓을….”
엘리제가 괴로워하든 말든 제 욕심만 채웠을 뿐 아니라 그녀가 의식을 잃고 나서도 그만두지 않고 짐승처럼 범했다.
몸을 물리다 보니 그녀의 허벅지에 든 피멍이 보였다. 블레이크는 제 목을 조르고 싶었다. 엘리제가 연달아 겪어야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 부족했다.
“엘리제….”
그녀는 그가 도닥여도 힘없이 앓는 소리만 낼 뿐 깨어나지 못했다.
‘나 때문에….’
이러다 그녀가 영영 깨어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엘리제. 제발 눈 좀 떠보십시오.”
손을 쥐어도 그녀는 마주 잡아 주지 못했다. 놓으면 힘없이 툭 떨어질 뿐이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던 블레이크가 힐끗 문가를 바라봤다.
비스듬히 열려 있던 문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문 앞은 물론 그가 있는 곳 사방에서 기사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제도에서 멀진 않지만, 의원을 불러오려면 한참이나 걸릴 것이다. 게다가 블레이크는 엘리제가 얼마 살지 못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그들을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우연이든 아니든 엘리제를 깨어나게 만든 남자였다.
“루카스 클랜튼.”
정말 싫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