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 같아 엘리제는 상념을 휘휘 날려 버렸다.
“증거… 있어요? 당신이 정말 내 오라버니라는 증거.”
“본래 2황자, 에릭 러셀은 검술에 재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난 검기를 일으킬 수 있어. 아까 테라스에서 봤지?”
“그건 황자님이 숨기고 있던 실력일 뿐인지도 모르잖아요.”
검기를 일으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한 마법적 재능이란 얼마나 희귀한 것인지 전혀 모르기에 엘리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당황한 표정으로 침묵하던 에릭이 갑작스레 손뼉을 짝 쳤다.
“그럼 과거의 추억들을 얘기해 볼까? 나는 네가 몇 살에 마지막으로 이부자리에 실수했는지도 알고 있어.”
엘리제는 할 말을 잃었다. 엘리제 클랜튼의 과거를 누군가 떠들어댄다 해도 그녀는 진실과 거짓을 분간해낼 수 없다.
‘이부자리에 몇 살까지 실수했는지 알 게 뭐람.’
차라리 남자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정보를 묻는 편이 나을 것이다. 조연에 불과한 엘리제 클랜튼에 대한 정보보다는 많을 테니. <타락한 연인>의 대본에 뭔가 단서 될 만한 게 있었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엘리제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장면이 떠올랐다.
“첫 키스!”
“…응?”
“당신 첫 키스, 몇 살에 어디서 처음 했어요?”
그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서, 설마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어서 대답이나 해요.”
머뭇거리던 그가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열네 살 생일에, 식탁 아래서.”
“…….”
정확한 답이었다. 만약 에릭의 안에 든 것이 진짜 루카스 클랜튼이 아니라면, 대본을 다 외우고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장면에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대사였기에. 엘리제 또한 카인 리베르토 탓에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굉장한 우연이네. 내 첫 키스도 열네 살이었는데. 그것도 식탁 아래서.]
[진짜? 누구랑? 열네 살이면 우리 둘 다 극단에 있었을 때잖아.]
[글쎄? 누굴까?]
[뭐야, 비밀이야? 누군진 모르지만 걔 데려다가 대공비 역 맡기면 되겠다.]
[어차피 최후의 승리자는 너라는 거지?]
[당연한 거 아냐? 첫사랑 따위 잊게 할 만한 여자잖아, 내가.]
카인의 첫 키스 상대가 누구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지만, 덕분에 루카스 클랜튼에 대한 정보 하나는 확실히 기억하게 된 셈이었다.
‘정말 얘가 남주야?’
엘리제는 에릭 러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고요한 연녹빛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 응시했다. 눈치가 빠르고 표정도 읽히지 않는 상대에게서 진실을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되면 단서를 모아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여전히 믿기 힘들지만, 일단은 알겠어요.”
그녀의 대답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침울하기만 하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자 사람이 달라 보였다.
“고마워, 엘리제. 역시 너라면 알아줄 거라 생각했어.”
“…잘도 그랬겠다.”
그랬으면 납치는 왜 했나.
“응?”
“아니에요.”
귀가 밝은 건지 눈치가 빠른 건지, 하여튼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얘기 끝났으니 이제 돌려보내 줘요.”
엘리제의 말에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왜?”
“…왜냐니?”
“돌아갈 필요 없잖아. 가지 말고 나랑 있어.”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돌아갈 필요가 왜 없는가. 시합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알아야 하고, 내기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지금쯤 애타게 그녀를 찾아 헤맬 블레이크도 마음에 걸렸다. 엘리제가 실종된 걸 알면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짓지 않을까.
‘또 우는 건 아니겠지.’
상상하자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오라버니가 곤란해질 거예요. 절 납치했다고 오해라도 사면 어쩌려고요.”
물론 누가 봐도 납치한 게 맞지만, 엘리제는 ‘우리 오빠가 그럴 리 없어’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있지도 않은 신뢰를 억지로 내비치는 엘리제 탓에 에릭의 동공이 와르르, 흔들렸다.
“아직 절 구해낼 준비를 완벽히 마친 것도 아니잖아요. 도망자 신세로 쫓겨 다니고 싶진 않아요. 대공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죠?”
알고 보면 순둥이일 뿐인 블레이크지만, 대외적으로 받고 있는 오해를 잘도 이용했다.
“…그래. 알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데려다줄 수 없어. 시합장으로 통하는 이동 마법진은 파괴됐고, 마차를 타고 가기엔 너무 늦었으니까. 아침 일찍 출발하자.”
더 이상의 타협은 불가할 눈치였기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착하네, 우리 엘리제.”
그가 옅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오늘 밤은 다른 생각 말자. 이렇게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것도 오랜만인데. 그립지 않아?”
엘리제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뭐야. 지금 나랑 같이 자겠다고 한 거야?’
물론 손만 잡고 자자는 의미일 수도 있다. 피는 전혀 통하지 않아도 둘은 어쨌든 남매지간이었으니까.
“그러게요. 그립네요.”
엘리제는 가능한 한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하고서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뺨을 쓰다듬는 손이 도통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게다가 은근슬쩍 귓불까지 만지작대고 있지 않나.
“오라버니, 저 목이 마른데….”
“그래? 잠시만.”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상체를 일으키는 그의 모습에 엘리제도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에릭이 협탁 위로 손을 뻗어 주전자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컵에 따르지도 않고 입을 벌려 제 입에 머금는 게 아닌가.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엘리제의 어깨를 감싸 안은 그가 그녀에게 입술을 겹쳤다.
“흡….”
바짝 마른 입 안과 목구멍을 적시며 시원한 물이 흘러들었다. 엘리제는 암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젖은 입술에 마지막으로 입술을 살짝 비비고서, 그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이런 걸로 우릴 비난할 사람은 없어, 엘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