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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가 굵지 않은 기다란 손가락이 아름다웠다.
마주칠 때마다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어 깨닫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에릭 러셀은 흔치 않은 미인이었다. 피부 또한 샘날 정도로 뽀얘서 여장하면 웬만한 여자 배우들보다 예쁠 것 같았다.
‘그런데 건물을 잘랐지.’
성에서 테라스가 깔끔히 분리되던 그 순간을 떠올리자 다시금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도 사람인가. 그쯤 되면 인간 병기 아닌가. 광선검 같아서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보기에만 그럴듯한 게 아니었다.
그 괴물 같은 힘을 목격하고 나자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돌덩이를 자를 수 있다면 사람이라고 못 자르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가로로든 세로로든 반 토막 내는 게 일도 아닐 터였다.
‘일단 나를 왜 납치했는지부터 알아야 할 텐데.’
분명 계획된 납치였다. 아마도 테라스 바닥의 도형은 시합이 시작되기 전 미리 설치해 둔 이동 마법진일 것이다. 성안에선 이동 마법이 불가하기에 테라스를 잘라내 공간을 분리한 후 마법진을 발동시킨 게 아닐까.
2황자와 엘리제가 사라진 후 테라스는 그대로 추락했을 테고 설치됐던 마법진 또한 부서져 망가졌을 것이다. 추적이 쉽지 않을 거란 소리였다.
“깼어?”
조심스럽게 실눈을 뜬 것이 무색하도록 금방 걸렸다. 그녀의 연기력이 상당한 수준임을 생각하면 2황자는 매우 예리한 편인 듯했다.
엘리제는 최대한 자연스레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여기가 어디예요?”
“목마르지? 마실 것 좀 줄까?”
눈치가 빠른 거에 비해 말 돌리는 솜씨는 형편없었다.
“괜찮아요.”
목이 마른들 납치범이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을 수 있을 리 없다. 약을 탈지 독을 탈지 알게 뭔가.
“그래….”
그녀의 냉정한 대답에 그는 협탁 위 주전자를 향해 뻗던 손을 도로 움츠렸다.
“왜 저를 데리고 시합장에서 이탈한 거죠?”
당차게 말하곤 있지만, 엘리제는 지금도 살짝 겁먹은 상태였다. 웬만한 건 겁나지 않았다. 이미 한번 죽어 봤었고, 죽어 봤자 지옥행은 아님도 알고 있다. 게다가 이 몸도 제 것이 아니니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엘리제가 염려하는 건 단 하나였다.
아픈 건 싫다. 당해 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겪어 봤기에 아는 두려움이었다. 2황자가 혹시나 가학적 성향의 사이코패스일까 봐 걱정됐다.
테라스를 잘라 냈듯 팔이나 다리 하나쯤 끊어 낼지도 모른다. 인질이 도망갈까 봐 불구로 만드는 건 스릴러 영화의 매우 흔한 장면 아닌가.
“겁먹을 필요 없어, 엘리제.”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음에도 그는 엘리제의 심리를 금방 눈치챘다.
“내가 널 해칠 리 없는걸.”
“…정말요?”
“그래. 나보다 널 위할 사람은 없어.”
연기가 통하지 않아 당황한 것과 별개로 엘리제는 조금쯤 마음을 놓았다. 뒤통수치는 게 취미인 이중인격자가 아닌 한, 해치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 같았다.
“그렇다면 동의라도 구하고 데려왔어야죠.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내가 하는 말을 네가 믿지 않을까 봐 그랬어. 나조차도 믿기 힘든 얘기라.”
엘리제는 긴장한 채 그를 바라봤다.
“대체 할 말이란 게 뭔데 그래요?”
“엘리제, 믿을 수 없겠지만 진실이니까 잘 들어.”
그가 크게 심호흡하고는 말했다.
“나 루카스야. 너의 하나뿐인 오빠, 루카스 클랜튼.”
엘리제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나도 굉장히 혼란스러워. 황자로서 살아온 기억도 분명 내 안에 남아 있거든. 하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비롯한 모든 것이 내가 루카스 클랜튼임을 말하고 있어.”
절반 정도, 아니 그보다 높은 확률로 블레이크가 루카스일 거라 짐작했던 엘리제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시나리오 후반부에나 비중이 있는 2황자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에릭이 횡설수설했다.
“믿기지 않지? 실은 나도 그래.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하지만 짐작 가는 건 있어.”
“…….”
“네 결혼식 날, 간절히 기도했거든.”
“기도요?”
“그래. 내겐 정말 아무런 힘도 없었으니까. 네가 그토록 싫어하던 대공과의 결혼을 막을 방법도 없었지.”
잠시간 침묵하던 엘리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이라고 딱히 힘이 있어 보이진….”
병석에 누운 황제 대신 황태자가 실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2황자가 가진 힘은 블레이크만도 못했다. 물론 <타락한 연인>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상황이 달라지지만, 지금은 시에나조차 등장하지 않은 초반부 아닌가.
“그, 그렇지 않아. 적어도 이제 난 클랜튼 후작가에 매인 몸도 아니고 최선을 다해서 힘을 모으고 있어.”
남자 주인공이 작정하고 힘을 키우면 가능할 것 같긴 했다. 원작에서도 2황자를 도와 황태자를 끌어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한 루카스 클랜튼이기에. 하지만 그 원동력이 되는 건 여동생 엘리제가 아니라 여자 주인공 시에나다.
‘이거 상황이 대체 어떻게 돼 가는 거야? 아니, 일단 쟤 말이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잖아. 꿍꿍이를 가지고 거짓말하는 거라면?’
에릭이 제3의 빙의자라면, 제 정체를 숨기려고 일부러 이런 연극을 펼치는 걸 수도 있다.
“솔직히, 믿기 힘든 말이네요. 당신이 내 오라버니라니.”
“알아.”
그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영혼이 옮겨 가는 현상을 믿지 못할 것이다. 전생의 엘리제도 그랬을 테니까. 어느 날 눈을 떴는데 갑자기 기네스 팰트로의 몸에서 눈을 떴다고 해보자.
‘으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