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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에릭의 상태를 살폈다.







성에 들어온 지 5분 정도 되었을 2황자는 아직 이지를 잃을 정도로 중독된 것 같진 않았다. 실핏줄이 몇 가닥 터져 있긴 해도 눈빛이 아직 선명했다. 다짜고짜 덮치진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보물’을 찾아서 기쁜 건 알겠는데, 좀 놔주시겠어요?”







엘리제는 예의 없는 2황자의 가슴을 쭈욱 밀었다. 다행히 그는 그녀를 순순히 놔주었다. 다만 도망갈 것이 염려되었는지 손목은 여전히 잡은 채였다.







엘리제는 잡힌 손목을 힐끗 내려다봤다. 황태자에게 선물 받은 팔찌는 블라우스에 가려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여차하면 지지고 도망가면 되니까 일단은 상황 파악을 먼저 해야겠네.’







같이 온 파트너와 에릭 중 어느 쪽이 회색 점이며 정체가 무엇인지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은 후 도망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는 지금 당장 엘리제의 목걸이를 빼앗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자님과는 인사 몇 번 나눈 것이 다인 것 같은데요.”







엘리제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에게 말했다.







“대뜸 이름을 부르시네요. 잊으셨는지 몰라도 저는 프로이젠 대공의 아내랍니다.”



“그래. 그렇게 되었지.”







그의 눈빛이 다시금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엘리제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손목이 잡혀 있는 그녀도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가시는 건가요?”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얘기할 수 있는 곳.”







이 성에 과연 그런 곳이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그가 테라스로 통하는 문을 열고 그녀를 밀어 넣었다.







‘응?’







테라스 한가운데까지 떠밀려 들어온 엘리제는 복잡한 도형이 겹쳐 그려진 바닥을 내려다봤다. 몇 번 보았던 이동 마법진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시합이 치러지는 성안에선 당연히 이동 마법이 불가했다.







‘그럼 이건 뭐지?’







엘리제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샌가 검을 뽑아 든 에릭이 바닥을 향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황자님, 지금 뭐 하는…?”







서걱!







은백색 검광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바닥이 기울었다.







“……!”







엘리제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추락하고 있었다. 그녀와 에릭 그리고 그들이 서 있던 테라스가 통째로. 발밑이 꺼지는 아득함 속에서 에릭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아래에서부터 터져 나온 흰빛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











엘리제의 곁을 떠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메리는 블레이크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창백한 표정의 마법사를 매단 체 방문의 잔해로 보이는 나무 파편을 밟고 서 있었다.







“너….”







눈이 마주친 순간 번뜩인 안광에 메리는 하마터면 그대로 도망갈 뻔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뒷덜미가 썰릴 것 같은 섬뜩한 예감이 들어,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비전하를 모시는 메리예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서 고개를 드니 그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히끅, 딸꾹질이 나와 입을 틀어막고 눈을 내리깔자 그의 재킷 주머니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미친 대공이 내뿜는 살기 탓인지 고개를 처박고 달달 떨고 있었다.







“엘리제는 어쩌고 혼자 돌아다니고 있지?”



“비전하께선 안전한 곳에 숨어 계세요. 대공님을 안내하러 저 혼자 나왔어요.”







블레이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놈과 단둘이 있다는 소리군.”







낮게 중얼대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메리는 그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하며 양손으로 공손히 복도 방향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시죠.”







메리는 최대한 서둘러 그를 안내했다. 블레이크 역시 마음이 급했는지 당돌한 시녀를 군말 없이 따랐다. 가까이만 가도 섬뜩한 사람과 함께 걷는 건 고역이었다. 재미없고 고지식한 윗세계 요원이 차라리 낫다 싶을 지경이었다.







몇 번 길을 잘못 들긴 했지만, 메리는 블레이크가 폭발하기 전에 그를 약속장소까지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몹시 애석하게도 그곳에 이미 엘리제는 없었다. 방 한가운데 루카스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내 아내에게 안내해 준다지 않았나.”







루카스를 노려보며 하는 말에 메리가 아하하 웃었다.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꽉 쥐고 있는 그의 커다란 주먹에 쥐어 박히면 몹시 아플 것 같았다.







“그러게요. 어디 가셨담.”







메리와 블레이크, 모리스를 힐끔 쳐다본 루카스가 답했다.







“황태자를 피해 도망갔다.”



“그럼 지금 엘리제 혼자 있다는 소린가?”







블레이크는 분노한 얼굴로 주머니 속의 고양이를 꺼냈다. 다 이것 때문이다. 루카스가 선물한 이 민폐 고양이 때문에 엘리제가 기권도 못하고 홀로 남지 않았나.







루카스와 메리의 시선이 고양이 쿤을 향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동그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두 사람이 보기에도 쿤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것처럼 보였다.







“어디로 갔는지 압니다.”



“정해 둔 장소가 있어요!”







가여운 조사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둘은 동시에 외쳤다.







“정해 둔 장소?”



“네. 따라오십시오.”







루카스가 벽장문을 열고 블레이크를 돌아보았다.







잘된 일이었다. 어차피 루카스와 메리에겐 블레이크가 필요했다. 그가 엘리제를 쫓지 않고 여기서 메리를 기다린 이유이기도 했다. 황태자에게 정체를 숨긴 채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블레이크를 앞세우는 게 최선이었다. 이제 정해 둔 장소에서 엘리제를 만나기만 하면 목적은 순조롭게 달성될 것이다.







블레이크는 바들바들 떠는 고양이를 메리에게 떠넘기고 루카스의 뒤를 따랐다. 메리도 고양이 쿤을 조심히 품에 안고 그의 뒤를 따랐다.







몇 개의 방을 통과해 3층 복도에 다다를 때까지 루카스는 실수하지 않았다. 엘리제가 거쳐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최음제 성분의 독이 깔려 탁한 공기 속에서도 그는 엘리제의 체취를 분간해 낼 수 있었다. 그건 사실 그에게도 매우 이상한 일이었지만 상황이 급하다 보니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저 끝 방이에요!”







메리가 신나서 외쳤다. 약속장소를 향해 그들이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쿠광쾅!







성 정체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 지척에서 들려왔다.







“무슨….”







성큼성큼 걸어 가장 가까운 방문 앞에 선 블레이크가 다짜고짜 문짝을 걷어찼다. 쾅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날아간 방문의 잔해를 밟고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허공을 바라봤다.







루카스와 메리도 블레이크를 따라 들어와선 테라스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휑하게 잘려나간 단면이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황태자 전하?”







테라스 문이 있던 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 모리스가 놀라 외쳤다. 그의 말대로 떨어져 부서진 테라스 파편 곁에 황태자 렉스 러셀이 서 있었다.







“응?”







허리를 굽히고 바닥을 살피던 그가 모리스의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







블레이크는 황태자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검집째로 풀며 3층에서 뛰어내릴 뿐이었다.







그는 추락하는 기세 그대로 황태자에게 검집을 휘둘렀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몹시도 흉흉했다.







“자, 잠깐!”







다급히 외치며 몸을 빼낸 직후, 렉스 러셀이 서 있던 자리에 검집이 내리꽂혔다.







쿵!







블레이크가 내려선 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쩌적, 금이 갔다. 그의 광기 어린 눈빛이 황태자를 향했다.







블레이크가 일으키는 살의와 분노에 황홀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렉스는 제게 휘둘러지는 그의 검격을 피하려 몸을 굴려야 했다.







“아니, 대공? 지금 뭔가 잘못…!”







다급히 외친 말의 뒷부분이 댕강 잘려 나갔다. 입을 뻐끔거리는 그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못했다. 모리스의 침묵 마법이 적중한 탓이었다.







마법사를 상대할 때의 최우선 순위는 주문을 외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모리스는 블레이크가 뛰어내리는 순간부터 주문을 준비했다. 황태자의 실력이 한 수 위인 탓에 확률이 반도 되지 않았으나 운이 좋았다.







악마의 능력을 제한하는 계약서 탓에 렉스는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제가 벌인 짓이 아니란 걸 알리려 손짓 발짓 해 봤자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시합의 규정대로 블레이크는 검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검집째로 휘두를 뿐이었다. 모리스 역시 상급 공격 주문들은 사용하지 않고 바닥을 미끄럽게 만드는 주문, 느려지는 주문 등만 사용하여 블레이크를 보조했다.







홀로 블레이크와 모리스를 상대하느라 렉스는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한번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나마도 블레이크가 전력을 다하지 않아서 붙잡히지 않은 거였다.







본래 팔찌만 잘라 내면 그만이나 블레이크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렉스가 이미 엘리제의 목걸이를 빼앗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다리를 부러뜨리면 그만이다.’







애초에 연회의 목적이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그는 팔찌를 노리는 척하며 렉스의 다리를 끊임없이 노렸다.







“악마로 살기도 쉽지 않구나.”







위에서 내려다보던 메리가 중얼거렸다.







“좀 불쌍해 보이네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루카스 역시 질린 표정으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악마보다 더 위험한 존재 같다.”







그의 말에 동의하듯 메리의 품에 안겨 있던 고양이 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다니며 블레이크의 난폭하고 광기 어린 행동을 두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누구도 블레이크를 말리지 않았다. 불쌍하다는 건 말뿐이었다. 늘 그들을 괴롭히는 야비한 악마가 흠씬 두드려 맞는 꼴을 보니 그렇게 고소할 수 없었다.







“전하!”







렉스의 파트너이자 네프러스의 기사 그렉 슈레트가 뒤늦게 성에서 뛰어 나왔다. 그러나 호기롭게 달려든 것이 무색하게도 그 역시 블레이크와 모리스의 합공에 가차 없이 바닥을 굴러야 했다. 이번에도 대공은 다리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자, 잠시만…. 대공, 윽!”







기권할 틈도 없도록 막무가내로 두들겨 패는 손길이 무자비했다.











***











약한 체력에 무리한 탓인지 엘리제는 마법진이 내뿜는 빛에 휩싸여 깜빡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녀는 낯선 장소에 누워 있었다.







침대나 테이블, 의자 등을 제외하면 마냥 하얗기만 한 방이었다. 커튼이나 이불, 심지어 그녀가 입고 있는 슈미즈 드레스까지 모두 하얬다.







몹시 놀란 것과 별개로 다친 곳은 없었다. 다만 붉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는 물론 렉스에게 받은 팔찌까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허리춤에 매달아 놨던 구교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목은 두툼한 가죽끈에 감싸져 있었는데 얼핏 손목보호대처럼 보였다.







실눈을 뜬 채 제 모습을 먼저 살핀 엘리제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 머리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머리카락 색과 동일한 속눈썹 아래 눈동자는 봄날의 새순 같은 연녹색이었다.







그는 팔을 괸 채 누워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