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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 발을 들여놓으려던 블레이크는 밑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까맣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신발에 달라붙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네요.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담.”
그의 파트너가 된 마법사 모리스가 신기하단 표정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블레이크가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목에 두른 레이스 케이프가 눈에 익었다. 루카스가 엘리제에게 선물한 거라며 시녀 메리가 데리고 다니던 바로 그 고양이 같았다.
“주인은 어쩌고 왜 여기 있지?”
저를 향한 블레이크의 질문에 까만 고양이가 ‘미야옹’ 소리를 내며 앞발을 파닥였다. 블레이크의 미간에 옅은 금이 갔다.
“…….”
루카스가 선물한 고양이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발견했음에도 모른 척한 걸 엘리제가 알면 섭섭해할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미움 살 거리는 조금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재킷 주머니에 고양이를 넣는 걸 보고 모리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데려가시게요?”
“내 아내의 것이라서.”
그의 목소리에 깃든 온화함에 모리스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아…. 비전하의 고양이군요. 그렇다면 잘 챙겨야죠.”
그가 출발하기 전에 기권하거나 탈락한 이들 중 엘리제는 없었다. 어쩌면 지금 그가 데리고 있는 고양이를 잃어버린 탓에 기권하지 못하고 찾아 헤매는 중인지도 모른다.
‘많이 지쳤을 텐데.’
빌어먹을 황태자 놈이 이동 마법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늦어졌다.
몸도 좋지 못한 그녀가 힘겨워할 걸 생각하면 속이 타들어 갔다. 그녀에게 종종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루카스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제대로 배려하며 지켜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시녀가 함께 가긴 했지만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엘리제를 완벽히 보호할 수 있는 건 오직 저 자신뿐이리라. 그녀의 바람 또한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대한 빨리 엘리제를 찾기 위해 블레이크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모리스는 그럭저럭 괜찮은 마법사지만 황태자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했고, 황태자의 파트너 그렉 슈레트는 네프러스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였다.
맞붙었을 때 어느 쪽에 승산이 있을지 확실치 않은 이상, 황태자보다 먼저 엘리제를 찾아 귀환하는 편이 나았다.
허겁지겁 그를 따르며 모리스는 기본적인 방어 주문을 블레이크와 자신에게 걸었다.
“대공 전하, 조금 천천히 가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이미 당도해 있는 수색팀한테 기습이라도 당하면 어찌합니까.”
“너무 늦었어. 지체할 시간이 없다.”
블레이크의 초조함은 성을 헤집고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막힌 광경을 맞닥뜨리고 극에 달했다.
두 사람이 방에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뒤엉켜 난교 중인 이들. 붉게 충혈된 눈이 하나같이 흐릿했다. 욕망에 사로잡혀 서로를 탐하는 데에만 열중하는 모습에선 이지가 느껴지질 않았다.
“뭐,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모리스가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 보니 방 안 가득한 음란한 냄새에 뭔가 이질적인 향이 뒤섞여 있었다.
“…독?”
블레이크는 모리스를 끌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복도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확산력이 얼마나 높은지 그새 복도까지 특유의 냄새가 퍼져 가고 있었다.
“최음 효과를 일으키는 독 아닐까요? 대체 누가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른 건지.”
일단 밖으로 나가서 대책을 논의해 보자고 말을 꺼내려던 모리스는 흠칫 굳어 버렸다. 블레이크의 새파란 눈동자에 깃든 분노가 어찌나 격렬한지 뒷골이 서늘했다. 점점 짙어지는 살기에 숨이 턱 막혔다.
대공비가 누구와 동행하였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그럴 만도 했다.
루카스 클랜튼. 피가 통하지 않는 그들 남매는 전부터 더러운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연구실에서 잘 나오지 않는 모리스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면 근거 없는 소문일 리 없다.
물론 오늘 그들 남매가 보인 서로에 대한 태도는 꽤 냉랭했지만, 소문을 의식하여 그런 척만 하는 건 줄 누가 알겠는가. 독에 당해 욕망이 일면, 뒷일 따위 생각지 않고 선을 넘지 않을까.
이를 알고 있기에 모리스는 블레이크를 말릴 수도, 말리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대로 시합을 진행하는 건 미친 짓이다. 아무 대책 없이 성을 헤매다가는 방금 그들이 목격한 상황과 똑같은 꼴이 될지도 모른다.
“엘리제….”
입술을 달싹여 대공비의 이름을 부르는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몹시도 절박했다. 두려움을 모를 것 같던 대공이건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복도를 가로지르고 방문을 열어젖히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만약 자신의 아내가 루카스 클랜튼, 혹은 다른 남자와 뒤엉켜 있는 모습을 대공이 목격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여, 모리스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
엘리제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회색 점들 때문이었다.
바트 루오스가 시합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회색 점은 두 개뿐이어야 맞았다. 그러나 지도에 표시되는 회색 점은 세 개였다. 그것도 블레이크보다 신분이 높은 두 사람, 2황자 에릭 러셀과 황태자 팀에 각각 하나씩 존재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닥친 그들은 일단 몸을 숨겼다. 세 개의 통로가 있는 방이기에 여차하면 빠르게 도망갈 수 있어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다.
“루카스, 에릭 러셀의 파트너로 누가 뽑혔는지 기억해요?”
“2황자는 신경 써 지켜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긴 저도 렉스만 신경 쓰느라.”
회색 점 세 개가 성에 진입한 후부터 검은색 점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성에 남은 인원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독이 풀려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시합은 정상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한마디로 ‘보물찾기’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엘리제에겐 그렇지 않았다. 렉스가 고성에 진입함과 동시에 그들 사이의 내기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계약서에 위배되는 사항이 아닌 만큼 중지할 수 없다.
“엘리제 님, 일단 제가 나가서 대공님을 모시고 올게요.”
“가능하겠니?”
“네. 저는 매우 빠르잖아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쪽으로 오는 길도 대충 파악했고요.”
오늘처럼 메리가 믿음직스러워 보인 적이 없었다. 엘리제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너만 믿을게, 메리.”
“네! 맡겨 주세요!”
결연히 대답한 메리가 방을 뛰쳐나갔다. 지도를 통해 확인해 보니 메리를 나타내는 노란 점은 정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여기 나타났다 저기 나타났다 하는 게 마치 이동 마법이라도 쓰는 모양새였다.
“루카스.”
엘리제의 부름에 그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악마와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당신이 진짜 ‘루카스 클랜튼’이 아니라는 걸 들켜서는 안 돼요. 윗세계 요원으로서 당신의 정체는 끝까지 숨겨야 한다는 소리예요. 무슨 뜻인지 알죠?”
“그래. 안다.”
루카스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악마는 신이 나서 모든 계획을 새로 세울 것이다. 그리되면 이번 내기에 이겨서 얻게 되는 이득보다 잃을 것이 더 많았다.
“최대한 입도 열지 말고요. 맞닥뜨리면 이미 최음제에 당한 것처럼 행동해요.”
엘리제는 부러 그의 옷차림을 흐트러뜨렸다. 셔츠 단추도 가슴이 훤히 드러날 정도로 풀어 놓고, 바지의 버클도 풀어 놨다.
“이건 딱히 가장할 필요가 없겠네.”
틈틈이 해독하긴 했어도 한번 발기한 성기가 쉽게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불룩한 아래를 힐끔 쳐다본 루카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불편하고 괴롭다.”
“원래 다 그런 거예요.”
남자도 아닌 그녀가 그 기분을 어찌 알겠냐마는, 엘리제의 성의 없는 대꾸에 루카스는 그러려니 수긍했다.
“너는 모르는 게 없군.”
“모르는 거 빼고 다 알죠.”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엘리제는 제 옷차림도 흐트러뜨렸다.
“흠…. 이 정도면 되나?”
재킷을 벗고 젖가슴이 살짝 드러날 만큼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어때요? 그럴듯해요?”
“모르겠군.”
그녀를 쳐다본 루카스가 미간을 찡그린 채 고개를 돌리는 거로 봐서는 나름 그럴듯한 모양이다. 대강의 준비를 마치고 다시 지도를 켠 엘리제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루카스.”
회색 점 하나가 매우 가까이에 있었다. 노란 점이 곁에 없는 거로 봐서는 렉스나 2황자 일행 중 하나였다.
“일단 숨어.”
루카스의 속삭임에 엘리제는 재빨리 벽장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곳으로 통하는 통로이기도 했기에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었다.
직후, 방문이 열렸다.
“엘리제…가 아니네? 뭐야, 왜 경 혼자 있나?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어쩌고?”
렉스의 목소리였다.
“…….”
루카스는 아까 엘리제가 당부한 대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흐트러진 차림새로 멍하니 서 있는 루카스의 모습에 렉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덮치려다 놓치기라도 했나? 하긴 내가 선물한 팔찌도 있으니, 엘리제가 순순히 당할 리 없지.”
어쩐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하고는 방 안을 스윽 훑어보는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음흉했다.
“지금쯤 단단히 발정났을 텐데. 어디 숨어서 예쁘게 헐떡대고 있을까.”
방 안 이곳저곳을 기웃대던 그가 벽난로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여기도 통로가 있고.”
그러나 렉스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끝내 엘리제가 숨어 들어간 벽장도 열어젖혔다.
“여기에도 통로가 있네.”
물론 이미 그 자리에 엘리제는 없었다. 렉스가 방에 들어선 직후 지체 없이 도망쳤던 것이다.
***
악마를 따돌리기 위해 방을 몇 개 거치자 3층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되도록 블레이크와 마주치길 바라며 엘리제는 빠르게 복도를 내달렸다. 3층 복도 끝 방은 두 번째로 찜해 놨던 대피 장소였다. 아까 머물렀던 방과 마찬가지로 그곳 역시 통로가 세 개였다.
방문 하나를 그대로 지나치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윽…!”
몸이 순식간에 끌려갈 정도의 강한 힘에 엘리제는 균형을 잃었다. 엘리제를 잡아챈 이가 그녀를 당겨 안으며 방문을 닫았다.
‘블레이크가 아니야.’
안긴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엘리제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2황자 전하?”
2황자 에릭 러셀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트너는 어쨌는지 방 안엔 그 혼자였다.
“드디어 너와 단둘이 있게 됐구나, 엘리제.”
음울하기만 하던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기쁨이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