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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렇게 하는 게 도움이 되는 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는 루카스에게 엘리제가 손을 저었다.
“그럼요. 인원수를 줄일수록 운신이 편해지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손을 탈탈 털고 있는 메리의 발밑에는 기사와 마법사 페어가 엎어져 있었다. 메리에게 목덜미를 가격당해 기절한 것이다. 엘리제는 그들에게로 태연히 다가가 손목의 팔찌를 강탈했다.
손에 넣은 팔찌의 수는 벌써 스무 개가 넘었다. 지금처럼 엘리제를 미끼 삼아 방 안에 끌어들인 후 문 뒤에 숨어 있던 메리가 단번에 기절시키는 방법으로 빼앗은 전리품이다.
팔찌를 빼앗긴 기사와 마법사 페어의 몸이 희미한 빛에 둘러싸이더니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규칙을 어기는 것도 아닌데요, 뭐.”
보물팀에 속한 기사와 마법사는 귀부인 보호를 위한 방어만 가능할 뿐 수색팀 공격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메리는 기사나 마법사가 아닌 시녀이니 그러한 규칙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마찬가지로 엘리제 역시 기사나 마법사를 공격하는 게 가능했다. 채찍을 휘둘러 봤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일 뿐.
“흠. 그런가.”
“그럼요. 변수가 될 만한 건 미리 처리해 두는 게 좋죠.”
지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수색팀을 피해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참가인원 대부분이 검은색 점이라서 분간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회색 점을 피하는 걸 일차적인 목표로 삼아 내기와 상관없는 수색팀 인원을 줄여 가기로 한 것이다.
‘덤으로 팔찌도 모으고.’
혹시 아는가. 운이 좋아 우승이라도 할지. 그리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지 않기에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주머니가 불룩하도록 모은 팔찌를 보면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엘리제는 다시 지도를 켰다. 친목 시합의 장소로 선정된 고성은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도면이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 탐색 마법이 통하지 않는 장소인 데다 환영 마법을 비롯하여 갖가지 마법들이 성 전체에 걸려 있어 영향을 받는 듯했다.
실제로 2층 계단을 내려갔더니 4층으로 연결된다든지, 침실 벽장으로 들어갔더니 주방 창고가 나온다든지 하는 일들이 빈번했다.
뿌연 화면에 점들만 여기저기서 움직이는 모습은 다소 기괴해 보였다.
“회색 점은 아직인가?”
“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오려나 봐요.”
가장 신분이 높은 엘리제가 마지막에 들어왔듯 블레이크와 렉스 역시 아직 대기 중인 모양이었다. 둘 중 누가 렉스인지 분간하기 위해 성 입구 쪽에 쿤을 보내 놨으니 헷갈릴 위험은 적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요.”
“뭐가 말이지?”
“여기, 이 검은 점들. 아까부터 꼼짝하지 않네요.”
엘리제의 말에 루카스와 메리가 그녀의 손끝을 유심히 바라봤다.
“꽁꽁 숨어 있느라고 그런 거 아닐까요?”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몰려 있는 것 같지 않아?”
같은 방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유독 그 근처에 검은 점들이 많았다. 수색팀 간에 겨루는 중이라면 어쨌든 둘 중 한 팀은 팔찌를 빼앗겨 사라져야 정상이건만 숫자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가 볼까.”
“괜찮을까요?”
“왠지 찜찜해. 악마가 정정당당히 시합에 임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거든. 뭔가는 수를 써놨을 텐데….”
“내 생각도 같다. 정정당당은 그들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
이제껏 얼마나 당해 왔는지, 그는 이를 부득 갈았다.
“아직 회색 점이 없는 지금이 기회인지도 몰라.”
엘리제의 말에 루카스와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 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문제는 여길 어떻게 찾아가냐는 건데…. 일단은 움직이죠.”
예상한 대로 검은 점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워지는가 싶으면 도로 멀어지는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구두 신고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편안한 차림으로 왔음에도 다리가 아팠다.
“엘리제 님, 제가 업어드릴까요?”
다리를 톡톡 두드리는 엘리제에게 메리가 대뜸 등을 들이밀었다.
“마음만 고맙게 받으마.”
“…….”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루카스가 머뭇머뭇 다가왔다. 엘리제는 이제 그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도 됐어요. 아직 업힐 만큼 힘들진 않아요.”
“다행이군.”
작게 헛기침한 루카스가 몸을 돌렸다.
이미 한번 지나쳐 간 적 있는 3층의 응접실을 뒤적거릴 때였다. 메리가 소파 옆 커다란 궤짝을 여는 순간 뭔가 묘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게 무슨 냄새지?”
잠깐 열고 있었을 뿐인데 냄새가 넓은 응접실 끝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그 궤짝도 통로인 모양인데. 저쪽에서 넘어온 모양이군.”
“제가 먼저 들어가 볼까요?”
“아니, 메리 넌 여기 입구를 지키렴. 누가 이 방에 들어오면 바로 기절시켜 버려.”
“네, 엘리제 님!”
메리를 남겨 두고 엘리제와 루카스는 차례로 궤짝 안에 들어갔다. 역시나 궤짝 안은 다른 장소와 연결돼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어느 방의 벽장 안인 듯한 그곳에서 둘은 나오지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흐윽, 응, 아아… 좋아, 으응…!”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교성을 내질렀다. 벗느니만 못하게 허리쯤에 뭉쳐진 드레스가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까지 내린 남자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 벌린 채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고 있었다. 검붉은 기둥이 여인의 밀부를 쑤셔대는 게 멀리서도 생생히 보였다.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수음하던 다른 한 명의 남자가 거친 숨을 내쉬며 뿌연 탁액을 쏟았다. 그러고도 욕망이 해소되지 않았는지 여전한 크기의 제 것을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
비릿한 정액이 묻어 있는 페니스가 역겨울 법도 한데,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혀를 내어 핥아 먹었다.
뒤엉켜 있는 이들이 누구이며, 뭘 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왜 여기서 저러고들 있는 거지?”
“둘 중 하나겠죠. 원래 저럴 생각이었거나 저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거나.”
“저럴 수밖에 없는 상황?”
궤짝을 연 순간 코끝을 스치던 미묘한 냄새에 생각이 미쳤다. 그때부터 조금씩 아랫배에 열기가 돌고,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워낙 흔하게 쓰이는 수인만큼 생전의 엘리제 역시 한두 번 실수로 복용해 본 경험이 있어 상황을 빠르게 인지할 수 있었다.
“당신, 최음제 같은 것도 해독할 수 있어요?”
“몸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뭐든 제거할 수 있다.”
“좋아요. 그럼 문제 생길 일은 없겠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통로를 통해 성 전체에 이 향이 빠르게 퍼지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었다.
“변태 같은 놈.”
“…나보고 하는 소린가?”
“뭐라는 거예요. 렉스 그놈 얘기잖아요.”
악마는 아직 루카스가 윗세계 요원임을 모른다. 해독할 방법이 없어 그녀 역시 당할 거라 예상할 것이다.
‘어쩐지 기분 나쁘게 웃더라니.’
엘리제가 클로드 대신 루카스를 데려가는 걸 보고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녀를 곤경에 빠뜨릴 뿐 아니라 <타락한 연인>의 남자 주인공 루카스 클랜튼까지 함께 뒤흔들 수 있으니 횡재라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그와 뒹구는 모습을 블레이크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원작이고 뭐고 끝장 아닌가.
계약 조항에도 걸리지 않는 야비함이 딱 악마다웠다.
엘리제가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도 세 남녀의 음란한 행각은 계속되었다.
피임이고 뭐고 여자 안에 파정한 남자가 몸을 물리자, 그녀의 입에 성기를 쑤셔대던 남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다른 남자의 정액이 가득 들어차 있는 곳에 자신의 것을 밀어 넣고는 황홀한 얼굴로 허리를 움직였다.
한 차례 파정한 남자 역시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는지 그녀의 손을 가져다 제 것을 쥐게 하며 젖어서 번들거리는 입술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루카스.”
“말해라.”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답하는 그를 엘리제가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벽에 머리를 꿍꿍 찧어대고 있었다. 달싹이는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는 얼핏 듣기로 기도문 같았다.
“…뭐해요?”
“악한 것을 몰아내는 중이다.”
“그런 거로 해결 안 될 거예요. 해독해야 하는 거라.”
“네가 말한, 그, 최음제, 때문인가.”
헐떡거리는 루카스가 딱하면서도 재밌었다.
“네, 그런 거예요.”
엘리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흰 빛이 번뜩였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루카스가 힘을 발휘한 것이다. 다행히 서로 뒤엉켜 있는 이들은 벽장 안에서 일어난 일을 눈치채지 못했다.
“독에 당한 거라면, 저들도 회복시켜야겠군.”
“왜요?”
“괴로울 게 아닌가.”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싶으면 그러시던가. 대신 메리 먼저 데려오고 나서요.”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저쪽 방으로 건너가 메리를 데려왔다.
“헉, 저게 뭐람.”
엘리제는 일단 메리의 눈을 가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루카스가 벽장문을 열어젖히자 서로 뒤엉켜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메리, 쟤들 기절시켜.”
“앗! 네, 엘리제 님!”
벽장에서 튀어 나간 메리가 뒤엉켜 있는 남녀 세 사람을 순식간에 기절시키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엘리제의 눈으로는 잔상조차 좇기 힘들 정도였다.
엘리제는 일일이 손을 얹어 그들을 해독하는 루카스의 모습을 팔짱을 낀 채 쳐다보았다.
“이 사람들 이제 어떻게 해요?”
“그러게 말이다.”
메리의 질문에 엘리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건들기 싫었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문제였다. 기껏 해독해 놨는데 내버려 두면 또다시 최음제에 취할 것이다.
“메리, 넌 복도 좀 살피렴. 당신은 어딜 가려고.”
메리를 따라가려는 루카스를 엘리제가 덥석 붙잡았다.
“…복도… 감시….”
“됐으니까 이리 와서 좀 도와요.”
엉겨 붙어 있는 남녀를 분리하는 과정에서 루카스의 동공은 요란하게 흔들렸다.
“뭘 그래요. 당신도 해야 하는 일인데. 이 사람들만큼 열심히 해야 시에나를 꼬실 수 있어요.”
쿵!
루카스가 잡고 있던 남자를 놓쳤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엘리제는 혀를 찼다.
그들은 기절한 이들의 옷을 추슬러 주고는 목걸이와 팔찌를 빼앗아 황궁으로 돌려보냈다.
대충 짐작은 했었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몇 번이나 비슷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때마다 악마의 희생양을 만들 수 없다는 윗세계 요원의 논리 탓에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여 돌려보내 줬다.
“어디서 시작된 건지를 알아야 할 텐데. 이러다간 끝이 없겠군.”
“그러게 말이에요.”
루카스가 틈틈이 해독해 준 덕분에 그들에겐 별로 영향이 없었으나 지금쯤이면 꽤 넓은 구역에 냄새가 퍼졌을 것이다.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지도의 검은색 점이 절반 정도로 줄었을 때였다. 드디어 회색 점이 지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 있던 노란색 점, 즉 쿤이 붙어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첫 번째 회색 점이 블레이크였다. 그리고 다시 또 몇 분이 흘러 회색 점 하나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비열하게 웃고 있을 악마 놈을 떠올리며 엘리제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