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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조사관과 대화를 마친 엘리제는 간단하게 식사하고 목욕까지 마친 연후에야 침실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블레이크는 깨지 않았다.







엘리제는 도로 침대에 기어들어가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잘 자네.’







붉은 기가 사라지지 않은 눈가를 살며시 매만지다가 날카로운 콧날에 쪽, 입을 맞췄다.







‘귀여워라.’







품에 파고들자 잠결에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늘씬하고 단단한 허리에 팔을 두르고서 엘리제는 그의 심장 뛰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려준 건 생을 통틀어 그가 두 번째였다.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도 과연 지금처럼 소중히 대할지는 의문이지만, 어차피 일시적인 관계일 뿐이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휴가를 여기에 쓸까.’







조만간 밝혀질 블레이크의 정체가 그리 나쁜 쪽이 아니라면 나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지위, 호화로운 생활, 매끼 맛있는 음식에 체중 관리가 필요 없는 삶이라니.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블레이크였다.







외관이 번드르르한 남자는 많이 만나 봤지만, 저만을 사랑해 주며 밤일까지 잘하는 남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남자가 이미 잡은 물고기나 마찬가지인 제 아내에게 이토록 정성을 쏟을까.







아주 가끔 미친놈이나 할 법한 말을 내뱉기는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으니 괜찮다. 다정함이 지나쳐서 조금 돈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엘리제가 뜨끈하고 단단한 그의 옆구리에 뺨을 비비며 흐뭇해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군, 클로드입니다. 곧 출발할 시간이라 알리러 왔습니다.”







시간이 되어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 블레이크를 기다리다 문을 두드린 모양이다.







기다리던 신호에 반색하며 엘리제는 블레이크를 살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기사단장의 목소리는 깊이 잠든 그를 깨우지 못했다.







‘많이 피곤한가 본데.’







더 자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지만 그가 빨리 일어나 출발해야 그녀 역시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 블레이크의 가슴팍에 엎드리다시피 상체를 기댄 엘리제가 그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블레이크.”







그녀의 부름에 그의 속눈썹이 움찔 떨렸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에요.”







속삭이고서 그의 귓불을 아플 정도로 자근댔다.







‘건강에는 좋다지만 이게 또 피곤할 때 씹으면 엄청 아프지.’







결국, 그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렸다. 잠에 취해 멍한 눈으로 그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엘리제….”







사르르 번져 가는 미소가 꿀처럼 달콤했다.







“날 깨워준 겁니까.”



“네. 밖에 클로드 경이 와 있어요. 곧 출발할 시간이라는데요?”



“아.”







드디어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멍하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싶더니, 슬며시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엘리제가 선수를 쳐서 물었다.







“어디 가셔야 해요?”







고개를 끄덕인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에서야 겨우 깨어났는데….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역시나 엘리제를 데려가지 않을 모양인지 어디에 간다는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전 괜찮으니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엘리제는 그를 토닥여 침대에서 일어나게 했다. 생긋 미소 짓는 그녀를 머뭇거리며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들려온 클로드의 노크 소리에 서둘러 준비를 마치곤 침실을 나섰다.







블레이크와 클로드를 비롯한 프로이젠의 기사들이 저택을 떠나자, 그 모습을 창밖으로 지켜보던 엘리제가 설렁줄을 당겼다.







“비전하, 부르셨나요?”







그녀의 부름에 달려온 건 시녀장 케이트였다.







“나갈 채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해 질 무렵이 다 되어 가는 시각에 어딜 가겠다는 건지 의아할 텐데도 그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어떤 용도의 드레스를 가지고 올까요?”



“혹시 며칠 전 내가 부탁했던 운동용 의복이 준비되었나?”



“네. 마침 몇 시간 전 받아놓았습니다.”



“잘 되었군.”







엘리제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중에 택할 테니 가져오게.”



“네, 비전하.”







준비를 도울 시녀들을 부르기 위해 나갔다 온 케이트의 손엔 몇 벌의 옷이 들려 있었다. 뒤를 따르는 시녀들의 손에도 몇 벌씩 더 들려 있는 걸 보니 맞추는 김에 잔뜩 주문한 모양이었다.







간소한 옷인 만큼 입고 단장하는 데 십여 분이면 충분했다. 엘리제는 호신용으로 구교묘도 챙겼다. 휘둘러 봤자 별로 위협적이지 않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채찍을 허리춤에 달랑 매달고 방을 나선 엘리제는 가벼운 걸음으로 중앙 계단을 내려갔다. 오랜만에 편한 신발을 신으니 살 것 같았다.







블레이크와 기사들을 배웅한 후 저택에 막 들어서던 멜릭이 그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비전하….”







멍하니 쳐다보다 황급히 묵례하는 멜릭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답례한 엘리제가 1층 홀을 가로질렀다. 지하 연무장에서 운동하려나 생각하고 조용히 뒤따르던 케이트가 황급히 물었다.







“비전하, 출타하실 거면 마차를 준비시킬까요?”



“이미 준비시켰네. 아, 그리고 호위기사는 대동할 필요 없을 것 같군.”







멜릭과 케이트, 앨런은 모두 당황했다. 곧 해가 질 텐데 혼자 출타하려는 그녀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엘리제가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저었다.







“염려들 말게. 나는 전하께 가려는 거니까.”



“네? 주군께 말입니까?”



“그래. 친목 시합에 함께 참여하기로 했는데, 전하께서 날 염려하시어 혼자 가시지 않았나. 곤란을 겪으실 수도 있으니 뒤따르려 하네.”



“아….”







엘리제가 무슨 뜻으로 그에게 가려는지 깨달은 멜릭이 탄식을 흘렸다. 황실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갑작스레 불참하게 되면 곤란해지는 게 당연했다.







엘리제의 시합 참여를 두고 황태자와 모종의 거래를 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멜릭이기에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제 몸도 성치 않으면서 블레이크를 위하는 그녀가 몹시도 고마웠다.







저택을 나서자 엘리제의 말대로 마차가 서 있었다. 그 곁에 서 있는 것은 메리였다.







“엘리제 님, 말씀하신 황궁 출입 허가증이에요.”



“수고했어, 메리.”







따로 움직일 가능성을 생각한 엘리제는 미리 메리를 루카스에게 보냈었다. 황실 기사단, 네프러스 소속인 루카스에게 부탁해 허가증을 발급받은 것이다.







“메리와 함께 가시게요?”



“그럴 생각이네. 입궁하여 전하가 계신 곳으로 바로 갈 테니 염려치 말고.”



“네, 비전하.”



“다녀오십시오.”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제와 메리는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 미리 들어가 있던 까만 고양이가 앞발을 들며 그들을 맞이했다.











***











일명 ‘보물찾기’라 불리는 마법사와 기사들 간 친목 시합은 마나를 품은 달이 떠오르면 시작된다. 매년 장소는 변경되며 시합을 준비하는 몇 명만이 알고 있었다.







임시 이동 마법진이 설치된 홀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뽑기를 통해 기사 한 명, 마법사 한 명이 임의로 페어가 되어 숨겨진 보물을 찾는 단순한 친목 시합이지만 올해는 평소와 달랐다.







마법사와 기사들은 수색 팀과 보물 팀 중 하나를 선택하여 시합에 임한다. 새로이 시합에 참여하게 된 귀부인들은 보물 팀을 지원한 마법사와 기사 중 최대 두 명을 자신의 보호자로 지목할 수 있었다.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맞아요. 두근두근해요.”







시합에 참여하도록 부모에게 허락받은 영애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재잘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귀부인들 역시 마법사와 기사들을 힐끔거리며 눈을 빛냈다.







보물 팀을 지원한 기사 중 무려 루카스 클랜튼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클랜튼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제도가 발칵 뒤집혔다. 후작가의 사용인들이 오랫동안 남매를 멸시하고 괴롭혀 온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안 좋은 소문만 무성하던 엘리제에게까지 동정하는 여론이 생겨날 정도이니 본래도 인기 많던 루카스는 말할 것도 없다.







슬픔과 절망을 표정 없는 얼굴로 감춘 것이라 멋대로들 짐작하고서는 자신만이 그의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저마다 망상했다.







물론 뭇 여인들의 시선이 쏠리든 말든 루카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타락한 연인>의 여자주인공 시에나가 제도에 입성할 때까지 그가 신경 써야 할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루카스.”







입구 쪽을 노려보다시피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슈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단장님.”



“동생을 기다리는 건가?”



“…….”







루카스의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슈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오지 않을까 싶은데. 피까지 토하며 의식을 잃은 지 고작 사흘밖에 안 됐네.”



“압니다.”



“아내를 끔찍이도 위하는 대공이라면 뒷일이고 뭐고 데려오지 않을 걸세.”







슈만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제 막 입구로 들어서는 블레이크의 곁엔 프로이젠의 기사들뿐이었다.







그들뿐 아니라 이제 모두가 입구를 주목했다. 대공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홀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저분이 설마…?”



“문장을 보니 맞는 것 같은데.”







블레이크를 처음 보는 영애들의 속닥거리는 소리만이 홀 한구석에서 이따금 들려올 따름이었다.







루카스는 다른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홀을 가로지르는 그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뻔뻔스럽게 잘난 얼굴에 수상한 것투성이인 프로이젠 대공. 곱게 바라볼 수 있을 리 없다.







블레이크 역시 루카스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는 굳이 이쪽으로 와 루카스 앞에 멈춰 섰다.







“오늘만 두 번째군.”







먼저 입을 여는 블레이크에게 루카스가 묵례했다. 이윽고 고개를 든 루카스와 블레이크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내는 깨어났네.”



“…그렇습니까. 다행인 일이군요.”



“경이 떠난 직후였지.”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 몰라 루카스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감사 인사는 됐습니다?”



“뭐?”



“우연일 테니 말입니다.”







블레이크의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는 루카스와의 대화를 더 이어 나갈 수 없었다. 홀의 입구로 이제 막 들어서는 이를 발견한 탓이었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와 부츠, 프로이젠의 문장이 새겨진 재킷을 걸친 그녀의 모습에 모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아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등 뒤로 올려 묶은 연보랏빛 머리칼이 찰랑대며 흔들렸다.







프로이젠 기사들의 제복과 흡사한 차림이 저토록 관능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오로지 블레이크만을 향해 걸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눈동자는 밝게 빛났다.







블레이크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몇 걸음을 내디뎠다.







“제가 늦었나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엘리제가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