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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거 아니야.’







블레이크가 저리 과격하게 나오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용서할 수 없다며 중얼대는 모습이 평소의 그와 너무 달랐다.







“블레이, 크흡…!”







너무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입을 열려다 사레들리고 말았다. 콜록대며 기침하는 그녀에게 그가 황급히 물을 따라 건넸다.







“엘리제….”







그는 목을 부여잡고 물을 마시는 엘리제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가다듬으면서도 엘리제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후작가가 무너지면 남주 루카스 클랜튼의 위치가 형편없어진다. 안 그래도 다정함이 사라져 원작보다 한참이나 모자란 마당에 치명적 결점을 늘려선 안 된다.







‘내가 멀쩡하다는 걸 증명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야. 당장에 사고 치는 것만 막자.’







기침하느라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그녀는 가련함 그 자체였다. 이를 매우 잘 알고 있는 엘리제가 그의 팔을 붙잡고 애처롭게 매달렸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엘리제의 애원에 그의 표정이 한층 더 굳어졌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엘리제.”



“당신이 저 때문에 분을 품길 원치 않아요.”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기댔다.







“부인은 그들이 밉지도 않습니까.”



“물론 저를 괴롭힌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미워요.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겠죠. 그렇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법의 심판 따위보다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다는 생각에 그가 이를 악물며 답했다.







“그들은 빛 한 점 못 보는 곳에서 평생 고통받을 겁니다.”



“그럼 됐어요.”







엘리제는 가냘픈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제게 중요한 건 블레이크, 당신뿐이에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와 보낼 즐거운 시간만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짓씹어 피가 맺힌 그의 입술을 매만졌다. 손끝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 줄 거죠?”



“내게 중요한 건 지금도, 앞으로도 부인뿐입니다.”







엘리제는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만나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내 때문에 울고, 저 자신에게 상처까지 내다니.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엘리제는 양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고개 숙인 그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기뻐요. 이렇게 행복하니 저도 금방 건강해질 거예요. 당신 품에 안겨 있으니 아픈 곳이 하나도 없는걸요.”







그녀는 상체를 들어 그의 피맺힌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놀란 듯 움찔 굳어지는 그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엘리제….”







그의 동공이 바르르 흔들렸다. 울어서 붉어진 그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그녀는 다시금 그의 입술을 핥았다. 자신을 향한 그의 눈빛이 견딜 수 없이 짙어질 때까지 그리했다.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가슴에 상체를 밀착했다.







제게 안겨 오는 그녀를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부서질까 두려워하면서도 안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굴었고, 그녀는 그런 그를 달래듯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걱정하지 말아요, 블레이크. 난 괜찮아요.”







그의 표정과 몸짓에 불안감이 드러날 때마다 엘리제는 그에게 속삭여 주었다.







“당신이 날 낫게 할 거잖아요.”







건장한 몸에 갇혀 있으면서도 도리어 그를 가둔 것은 그녀였다. 가냘픈 팔과 다리로 그를 휘어감아 끌어들이며 나긋하게 웃었다.







“그럴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뜨거운 숨이 맞닿는다 싶은 순간, 틈 없이 얽혀 들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아야 할 타액이 달콤했다. 별것도 아닌 키스가 한숨이 날 만큼 기분 좋았다. 엘리제는 고개를 젖히고 그가 흘려보내는 타액을 받아마셨다.







한참의 입맞춤 끝에 그녀가 부푼 입술을 달싹였다.







“블레이크, 저 벌써 다 나은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그가 믿을 리 없음에도 엘리제는 모른 척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엘리제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그는 다정히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래요. 일단은 완쾌가 우선입니다. 다른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으니.”







원하는 답을 들은 엘리제의 얼굴이 더없이 환해졌다.







‘잘 생각했어! 나 멀쩡하다니까?’







바랄 게 없다는 듯 웃는 그녀를 그는 놓칠세라 더욱 당겨 안았다.











***











엘리제는 깊이 잠든 블레이크를 두고 살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사흘 밤낮 곁을 지켰다더니, 그는 거의 기절하다시피 잠든 것 같았다.







일단은 씻어야겠다는 생각에 엘리제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드레스룸에 들어갔다. 입구 맞은편에 자리한 커다란 거울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들여다보던 엘리제는 문득 킁킁거리며 제 몸 냄새를 맡아 보았다. 손바닥을 입에 가져다 대고서 하, 하고 입 냄새도 맡아 보았다.







‘거 참 신기하네.’







사흘쯤 누워 있으면 머리카락은 떡지고 얼굴은 퉁퉁 부어야 정상이었다. 퀴퀴한 냄새도 나야 했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요염하며 아름다웠다. 심지어 살에서는 막 목욕하고 나왔을 때와 다르지 않게 향내가 났다.







‘누가 씻겨 줘서 그런 건지, 현실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모르겠네.’







신기한 마음에 요리조리 살펴볼 때였다.







“멀쩡해 보이는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엘리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루카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네 방 테라스로.”



“저쪽 방에 블레이크가 자고 있다고요. 들키면 어쩌려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선 침실 쪽으로 난 문틈으로 침대를 확인했다. 다행히 블레이크는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서 걸어 잠근 엘리제는 선반에서 가운을 꺼내 걸쳤다. 루카스는 한편에 우두커니 선 채 그녀가 하는 양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대충 몸을 가린 엘리제가 그를 끌어 제 방으로 데려갔다. 여차하면 테라스 쪽으로 바로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후작가 사용인들은 모두 바뀌었죠?”



“그래.”



“어때요? 밥은 맛있어졌어요?”







그녀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루카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뺨에 윤기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었군요? 다행이네.”







계획이 성공한 것 같아 뿌듯해진 엘리제가 그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그는 제게 닿은 엘리제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방법이 너무 위험했다.”



“그렇게 위험해질 줄은 몰랐죠. 누가 그렇게 위독하게 만들래요? 배탈이나 좀 나게 해주지.”



“배탈로 피를 토하는 사람은 없어.”



“그건 그렇지만….”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고지식함을 알면서도 너무 어설프게 요청한 제 잘못이 컸다.







“뭐, 됐어요. 이런 일이 또 있진 않을 테니까.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그의 눈썹이 슬쩍 들렸다.







“뭐가 말이지?”



“위험을 무릅쓰고 날 만나러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







그는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침묵했다.







‘뭐지? 까먹은 건가?’







블레이크가 언제 깰지 모르기에 마냥 넋 놓고 시간을 흘려보낼 순 없었다. 그래서 엘리제는 이것저것 아무 말이나 던져 보았다.







“혹시 그사이에 악마로 의심되는 놈을 또 찾았어요? 아니면 중간지대 조사관에 대한 단서? 아, 연기 연습하다 막혔구나?”



“그건 항상 그렇지.”







팔짱을 풀고서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단은 네가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왔다.”







뭐 하나 했더니 그녀의 등을 퍽퍽 두드린다.







“죽지 않아 다행이야. 정말 곤란할 뻔했다.”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엘리제는 그가 안도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챘다. 기쁜 듯 입꼬리도 씰룩였다.







‘하긴, 내가 죽으면 루카스의 이번 임무는 백 프로 실패지.’







서로를 위해서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쩔 거지?”



“응? 뭐가요?”



“오늘 밤이 ‘보물찾기’의 날이다.”







그의 말에 엘리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라고요? 그게 벌써 오늘이라고요?”







계산하여 따져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의식을 잃었던 날로부터 사흘을 보태면 바로 친목 시합 개최일이었다.







“그래. 참여할 수 있는 건가?”







엘리제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이미 렉스와 계약서까지 작성한 마당에 불참할 수는 없었다.







‘어떡해야 하지?’







당장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고 건강함을 피력하면 과연 블레이크가 시합에 참여케 해 줄 것인가. 그는 그녀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괜히 무리하게 졸라 봤자 단호한 거절과 감시가 돌아올 것이다.







“해야죠. 어떻게든.”



“방법은 있는 건가?”



“블레이크가 같이 가자고 먼저 얘길 꺼내면 가장 좋겠지만, 왠지 못 가게 할 것 같네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네가 죽는 줄 알고 놈은 반쯤 미쳐 있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차하면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물론. 우리는 상호 협력하는 사이 아닌가.”



“좋아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쿤을 당신에게 보내도록 할게요.”



“그래. 그러도록 해.”







이야기를 끝낸 루카스는 복도 쪽 문을 힐끔 쳐다보더니 가겠다며 입을 벙긋거렸다.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테라스로 나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누가 왔나 보네.’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엘리제는 문을 빼꼼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곧장 메리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휘둥그레 뜬 메리가 좌우를 빠르게 살피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웬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엘리제 님, 대공님은요?”



“잠드셨어. 안 그래도 널 부르려 했는데 마침 잘 왔네. 쿤은 어디 있어?”



“여기요.”







메리가 바구니 뚜껑을 열어 주자 검은색 고양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같이 와서 다행이다.”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고 메리가 불안한 듯 물었다.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거예요? 아니면 대공님이 또 무슨 미친 짓을?”







미친 짓이라니. 블레이크는 말만 과격할 뿐 언제나 얌전했다.







“그게 아니라 다른 문제가 생겼어. 오늘 저녁에 있을 ‘보물찾기’ 때문이야. 자칫하면 참가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녀의 말에 메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딱히 원작과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제가 생각해도 엘리제 님은 더 쉬셔야 할 것 같은데.”



“이번 시합을 두고 악마랑 내기를 했거든.”



“네에?”







깜짝 놀란 메리가 펄쩍 뛰었다.







“악마와요?”



“응. 황태자 몸에 빙의해 있는 악마가 내게 제안하기를, 시합 중에 잡히지 않으면 중간지대 조사관 하나를 풀어준다는 거야.”



“아….”







메리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관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내기에 응하셨군요.”



“응. 아마도 황궁 시종장에 빙의한 조사관 같아. 이번 기회가 아니면 구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그렇겠네요. 악마가 작정하고 억류해 놨다면.”



“그래서 말인데, 너희가 날 좀 도와줄 수 있을까?”







예상했던 대로 메리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뭐든 말씀만 하세요.”







고양이 쿤 역시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마워, 둘 다.”







엘리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