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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을 만날 때면 찾곤 하는 카페에 그녀는 느긋이 앉아 있었다. 창을 통해 스며드는 햇볕이 다사로운 가을이었다. 감색 슈트에 트렌치코트를 걸친 남자가 낙엽 향기를 옷자락에 묻힌 채 그녀에게 다가왔다.







말끔히 넘긴 금발 아래 서늘한 눈매가 그녀를 담고서 부드럽게 휘어졌다.







[일찍 왔네, 엘리제.]







울림이 좋은 저음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달콤했다.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를 향해 엘리제가 물었다.







[웬일로 이렇게 빼입고 왔어?]







그는 어깨를 살짝 으쓱여 보이곤 그녀를 창가 쪽 자리로 밀어냈다.







[밖에 파파라치가 깔렸어.]



[하루 이틀 일인가.]







비어 있는 맞은편 자리 대신 굳이 엘리제 곁에 앉아, 그녀가 반쯤 마신 음료를 쪽 빨아 마신다.







[유독 많아. 너와 내가 함께 주연을 맡는 건 처음이잖아.]



[아. 그거….]







그에게서 잔을 도로 빼앗아 입을 축이곤 그녀가 말했다.







[나 못 하게 됐는데.]







그가 홱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뭐? 왜 갑자기?]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만나자고 했어.]







드디어 처음으로 같은 작품에서 남녀 주연을 꿰찼다며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나, 엘리제는 입맛이 썼다.







[나 죽는대.]







툭 내뱉은 말이 한참이나 그를 침묵하게 했다. 굳어져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가 기가 차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도로 몸을 돌렸다.







[뭐라는 거야. 질 나쁜 농담은 그만둬.]







그녀를 쳐다보지 않는 그의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농담 아니야. 그래서 그 영화 못 한다고 감독한테 벌써 연락했어.]







결국, 그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적당히 하지? 재미없다고 하잖아.]



[카인 리베르토. 나 죽어. 정말로.]







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그녀라도 이런 종류의 농담은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카인은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아야겠어. 어느 돌팔이가….]



[의외네, 카인. 막살더니 꼴좋다고 놀릴 줄 알았는데. 심각한 거 봐.]







하얗게 질리도록 움켜쥔 주먹을 톡톡 건드리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가 이를 악문다.







[네가, 언제, 막살았어.]



[저번 주까지만 해도 인제 그만 정착 좀 하라고 잔소리했잖아.]







그녀는 그의 팔을 끌어 자리에 앉혔다. 그러곤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도 아쉬워. 이번 작품은 기대 많이 했는데. 네 말대로 처음이잖아. 우리가 남녀 주연으로 나란히 서는 거.]



[…….]



[아무튼, 이제 난 돈 많은 백수야. 실컷 놀고먹을 예정이니까 마음껏 부러워해.]







아무 말 없이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히 한숨이 났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건 둘 다 비슷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그에게나 그녀에게나 서로가 유일했다.







[너는 늦기 전에 결혼이라도 해. 이게 뭔가 싶다.]







그래서 답지 않게 속내를 드러냈다. 아무도 없이 홀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건 참 별로인 일이었다. 하나뿐인 친구가 같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랐다.







그와 더는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아,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반대 상황이었다면 그녀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허구한 날 티격태격하던 사이에 위로는 무슨 놈의 위로인가.







[갈게. 잘 지내, 카인.]







끝내 대답하지 않는 그를 뒤로하고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그는 표정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설마 울기야 하겠어, 어깨를 으쓱이곤 그녀는 카페를 나섰다.











***











“엘리제 님! 정신이 드세요? 엘리제 님!”







바로 옆에서 시끄럽게 외치는 소리에 엘리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생전의 꿈을 꾸면 늘 그렇듯 머릿속이 헝클어져 쉽게 현실로 돌아오질 못했다.







죽었고, 지옥은 가지 않았으며 사후세계에서 괴상한 임무를 맡았다는 것까지 떠올리자 비로소 누가 저를 이토록 애타게 부르는지 깨닫게 되었다.







“귀 안 먹었어, 메리. 그만 좀 불러.”



“아아, 드디어 깨어나셨네요.”







맥이 풀린 메리가 침대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는 좀 어떠세요? 이제 괜찮으신 거죠?”



“아무렇지도 않아.”







답한 대로 엘리제는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기절하기 직전의 고통도 말끔히 사라졌고 어디 하나 쑤시거나 불편한 데도 없었다.







“다행이에요, 정말. 혼자 중간지대로 돌아가시는 줄 알고 눈앞이 캄캄해서….”







메리가 벌게진 눈가를 손등으로 마구 비볐다. 혹시라도 이 세계에서 죽으면 어찌 되는 건가 궁금했는데, 중간지대로 돌아가게 되는 모양이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엘리제가 오, 하고 눈을 반짝이는 사이 메리가 대뜸 외쳤다.







“저는 어서 가서 대공님께 엘리제 님이 깨어나셨다고 말씀드리고 올게요!”



“아니, 잠깐만.”







엘리제는 몸을 돌리려는 메리를 다급히 붙잡았다.







“나한테 보고 먼저 해야지, 메리. 내가 쓰러지고 나서 일이 어떻게 됐니?”







머뭇거리던 메리가 도로 주저앉았다.







“말도 마세요, 정말. 요 사흘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사흘? 내가 사흘이나 깨어나질 못했어?”



“네! 방문하는 의원마다 다들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저어서….”







그녀의 말에 엘리제는 입을 턱 벌렸다. 아니 무슨 배탈 좀 난 거 가지고 가망이 없단 소리를 한단 말인가. 물론 죽을 것처럼 아프고 피도 좀 토했지만.







‘설마 그 고지식한 요원이?’







정말 피를 토할 만큼의 병세를 만들어 냈다는 말인가?







“요원님이 방금 왔다 가셨어요. 이틀 전부터 엘리제 님과의 독대를 청했는데 대공님이 내내 거절하셨거든요. 더 늦었으면 위험했을 거예요.”







엘리제는 어찌 된 상황인지 깨달았다. 오늘에서야 단둘이 남을 기회를 얻은 루카스가 그녀를 치유했고, 덕분에 멀쩡히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몰래 좀 들어오지. 뭘 굳이 허락을 받겠다고.”



“그럴 수가 없었어요. 대공님이 사흘 내내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엘리제 님 곁에 붙어계셨거든요. 그분 평소에도 좀 미친 사람 같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완전히 돌아버린 줄 알았다니까요.”



“…그랬니?”







엘리제는 마음고생이 심했을 블레이크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가벼운 식중독 정도의 증세를 생각했건만 위암 말기 수준의 병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후작가는 어떻게 됐어?”



“거기도 발칵 뒤집혔죠, 뭐. 요원님까지 피를 토하며 쓰러졌으니까요.”



“그럴듯했어?”



“네?”







저도 모르게 묻고서 엘리제는 작게 헛기침했다. 많이 고생한 듯 보이는 메리에게 모든 게 연기였다고 이제 와 밝히려니 좀 그랬다.







“아니, 루카스도 매우 아파 보였냐고.”







엘리제의 질문에 메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프니까 쓰러지셨겠죠? 뭔가 나무토막 하나가 쿵, 하니 넘어가는 모습이었달까요.”







그의 연기 솜씨를 생각할 때 몹시 어색하리라고 예상했는데,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날 만찬실과 주방에 있던 후작가 사용인들 모두 투옥됐어요. 대공님이 모두 죽이겠다고 난리 치는 걸 네프러스 기사단장님이 간신히 뜯어말려서….”







네프러스의 기사단장 슈만 크롬벨도 블레이크와 함께 후작가에 왔던 모양이다.







“후작 부부는?”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엘리제 님이 잘못되는 줄 알고 저도 경황이 없어서 확인하질 못했어요.”



“루카스가 있는데 별걸 다 걱정한다.”







엘리제의 심드렁한 대꾸에 메리는 다시 또 분개하며 울먹였다.







“나쁜 클랜튼! 어떻게 그런 몹쓸 음식을 우리 엘리제 님께!”



“맞아. 음식으로 장난치는 것들은 감옥 가도 싸. 아주 혼쭐이 나야 해.”







얼굴이 퉁퉁 부은 메리가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엘리제는 그녀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애써줘서 고마워, 메리. 아주 잘 대처했어.”



“엘리제 님….”







안도감과 감동이 뒤범벅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던 메리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대공님께 알려야 해요. 요원님을 쫓아 나갔는데, 잘못하면 죽이려 들지도 몰라요.”







루카스가 블레이크의 손에 순순히 죽어줄 리 없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서 가봐.”



“네! 쉬고 계세요!”







씩씩하게 대답한 메리가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방문을 쳐다보던 엘리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보다 일이 커진 것 같은데. 어떻게 수습한담.’







의원들이 몇이나 와서 진맥했다면 갑자기 멀쩡해진 걸 설명하기 어렵다. 다들 그녀가 위독하다고 말했다지 않나.







그렇다고 루카스의 방문 이후 기적처럼 나은 것이 되어선 안 된다. 사흘 밤낮 곁을 지킨 블레이크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차라리 조금 더 아픈 척을 해야 하나.’







엘리제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과연 방문의 내구성이 얼마나 좋을지 걱정하며 엘리제는 열린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허겁지겁 뛰어온 기색이 역력한 그는 깨어 있는 그녀를 본 순간 숨쉬기를 멈췄다.







민망함을 누르며 엘리제는 사르르, 힘없는 미소를 가장하여 지어냈다.







“블레이크.”







가까스로 숨을 토해낸 블레이크가 한달음에 침대 앞으로 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엘리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이름은 신음과도 같았다.







“많이 걱정했어요?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해요?”







엘리제는 그의 핼쑥한 얼굴을 살며시 매만졌다. 이 커다랗고 강인한 남자가 안쓰러워 보이다니 신기할 노릇이었다. 흐트러짐 없던 이가 지금은 엉망이었다.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움켜쥔 블레이크가 그 안에 얼굴을 묻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숨소리와 떨리는 어깨가 어쩐지 수상했다.







“설마, 울어요?”



“…….”







손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아, 진짜 우나 봐.’







엘리제는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어떡하지.’







눈물은 그녀의 손을 적시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의 턱 끝에 맺혀 툭툭 떨어졌다.







‘안 되겠는데.’







조금 더 아픈 척을 하려 했었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양심이 쿡쿡 찔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저 괜찮아요, 블레이크. 아무렇지 않아요.”



“어떻게….”







그러나 블레이크는 그녀의 괜찮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울음이 배어 나왔다.







“어떻게 괜찮다는 말이 나옵니까.”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품은 채 그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여태 그런 것을 먹고, 그런 대우를 받으며 살았던 겁니까. 이토록 몸이 망가져서는 어떻게 아직도 괜찮다고….”







엘리제는 도르르 눈을 굴렸다. 정말로 괜찮은데, 괜찮은 걸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도통 믿질 않으니 아무래도 의원을 한 번 더 불러 달라고 해야 할 듯싶었다.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네?”



“그들을, 클랜튼을….”







그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안광이 형형했다.







“흔적도 없이 부숴 버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