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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어쩌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잠깐이지만 엘리제의 동공이 흔들렸음을.
“지금으로선 그의 정체를 파악하는 게 최우선이다. 네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니까.”
“그야 뭐, 그렇죠.”
엘리제는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블레이크가 뭐 대수라고.’
루카스에게 괜한 의심을 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래서 대련 신청도 한 것 아닌가요? 블레이크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맞아. 내가 파악하기로 그는 악마가 아니야. 하지만 위험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위험인물이요? 블레이크가요?”
엘리제는 자신의 귀엽고 순둥한 가짜 남편을 떠올렸다. 넘치는 체력과 성욕 탓에 그녀를 자주 기절시키긴 하지만 그 외엔 딱히 문제가 없어 보였다.
‘굳이 하나 꼽자면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루카스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쳐다봤다.
“독점욕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맞아요. 그분 좀 이상해요.”
가만히 있는 엘리제 대신 메리가 대뜸 나서서 쫑알댔다.
“엘리제 님은 눈치 못 채셨어요? 종종 미친 사람처럼 군다니까요.”
“내가 그렇게 좋은가 보지.”
엘리제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 내 치명적인 매력에 빠지면 다들 그래.”
“…….”
메리와 쿤은 눈만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연하다는 듯한 그녀의 반응에 뭐라 반박하고 싶은데, 엘리제는 그들이 봐도 워낙 예뻤다.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후 스토커나 사생팬에게 유독 많이 시달렸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라 할 말이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대련을 치르고 나면 그가 남자주인공인지 아니면 제3의 빙의자인지 확인할 수 있겠지.”
“대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신 블레이크에게 날 좀 그만 세워요. 자꾸 당신을 경계하잖아요. 우리의 계획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고요.”
“내가 뭘 어쨌다고.”
“몰라서 물어요?”
루카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에 그는 턱을 치켜들기까지 했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태도였다.
“대련도 그의 정체가 파악되면 적당히 져 줘요.”
“그건 기만이다.”
“애초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기만이에요.”
표정은 여전했으나 엘리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 고집스러운 입매가 말해주고 있었다.
“루카스, 당신. 성공적인 임무 완수가 가장 중요한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렇지.”
“그러면 목적에만 집중해요. 일이 틀어진 마당에 어떻게 모든 원칙을 지켜요? 어젯밤에 당신이 뭘 했는지 설마 잊은 건 아니죠?”
그녀의 입 모양은 ‘납치, 감금’을 말하고 있었다. 움찔한 루카스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그래. 알았다. 네 말대로 하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메리와 쿤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방금 요원님 설득에 성공한 거야?”
“와, 그러게.”
“역시 엘리제 님이네.”
“맞아, 엘리제 님은 확실히 다르다니까.”
엘리제는 소곤대는 그들에게 손을 저어 주의를 환기했다.
“대충 얘기를 마무리 짓자. 시간이 별로 없어.”
“네, 엘리제 님. 이제 저는 어떡하면 될까요?”
쿤이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이제 넌 마부 배역을 맡을 수 없어. 클랜튼에서 이미 실종된 사람이니까.”
확인을 위한 엘리제의 시선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클랜튼 후작가의 마부2’는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졌다.
“혹시 네가 맡은 배역에 대사가 있니?”
“아니요, 없어요.”
“그럼 큰 문제는 없겠구나. 넌 작은 동물로 변신해서 우리와 함께 가자. 이왕이면 애완동물이 좋겠네. 내가 루카스에게 선물 받은 거로 하면 되니까.”
“네, 알겠어요.”
짧은 논의 끝에 쿤은 검은색 고양이로 변신했다. 눈에도 잘 띄지 않고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운 동물을 고르려니 그 정도가 적당했다.
“좋네.”
엘리제와 메리는 흡족한 눈으로 쿤을 쳐다보았다.
얘기가 대충 마무리됐을 때, 시종이 응접실 문을 노크하여 오찬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엘리제의 눈짓에 메리는 냉큼 검은색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
클랜튼 후작가 만찬실의 식탁은 프로이젠 것의 절반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평소 손님을 잘 초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엘리제는 제 앞의 스튜 접시를 휘저으며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음식이 대체 왜 이래?’
건더기 하나 없이 묽은 스튜는 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엘리제는 한 입 맛본 후 스튜 그릇을 밀어 놓았다. 어떻게 하면 맹물보다도 맛이 없는지 희한할 노릇이었다.
그뿐 아니라 빵은 딱딱해서 잘 떼어지지도 않았다. 엘리제는 보기에도 맛없어 보이는 빵을 포크로 톡톡 두드렸다.
‘포크가 들어가지도 않잖아. 이런 걸 먹으라고 준 거야? 들고 사람 때리면 흉기가 따로 없겠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끼적거리는 그녀와 달리 맞은편의 루카스는 제 몫의 음식을 묵묵히 먹고 있었다.
‘저것도 비슷해 보이는데.’
빵을 찢는 모양을 보아하니 그녀의 것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엘리제의 입가가 씰룩였다. 이 세계에 들어와 매일 같이 맛있는 음식만 대접받은 그녀였다. 그녀는 이런 음식을 군말 없이 먹을 정도로 착하지 않았다.
‘이런 걸 먹느니 차라리 굶고 말지.’
새침한 얼굴로 빵을 집어 든 엘리제는 뜯어 먹는 척 잡아당기다가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머. 손이 미끄러졌네.”
엘리제는 식탁 위의 종을 집어 들고 우아하게 흔들었다. 주방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이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빵이 바닥에 떨어졌어.”
시종은 바닥에 떨어진 빵을 힐끔 쳐다봤다.
“새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시종이 새로 가져다준 빵은 똑같이 딱딱하며 질겼다. 이로 살짝 깨물자 턱이 아팠다.
엘리제는 시종이 등을 돌리자마자 이번 빵도 바닥에 내팽개쳤다. 빵이 떨어졌을 뿐인데 퍽, 소리가 났다.
“어머, 또 떨어졌네. 빵이 왜 이렇게 바닥을 좋아한담.”
생글거리며 웃는 엘리제를 돌아보는 시종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퉁명스럽게 말한 시종이 주방에 들어가 빵 바구니 하나를 통째로 가지고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시종은 빵 바구니를 한 손으로 턱 하니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와. 내 참 별꼴을 다 보겠네.’
보아하니 음식만 예의 없는 게 아니었다. 어느 귀족 가문의 사용인이 손님에게 저런단 말인가.
저 자신도 바닥부터 올라왔기에 엘리제는 이유 없이 갑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을 때는 그녀도 참지 않았다. 잘하면 잘하는 만큼, 못하면 못하는 만큼 그대로 돌려줬다.
바구니에 담겨 있는 빵들은 역시나 다 그게 그거였다. 질기고 딱딱했다. 주방장의 솜씨가 이 정도로 형편없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어제 먹고 남은 빵일 것이다.
“맛있어요?”
엘리제의 질문에 루카스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쳐다봤다.
“글쎄요. 음식이 맛으로 먹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라는 거야, 이 남자가?’
엘리제는 어이가 없어졌다.
“설마 매번 이렇게 식사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메뉴나 맛이 늘 지금과 비슷하냐고요.”
숟가락을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답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은 평소와 달랐습니다. 종류가 매우 다양했던 것 같군요.”
“…후작 부부와 같이 식사를 할 때만 달랐다는 소리군요.”
“그런 셈입니다.”
엘리제는 속이 터질 것 같아 하마터면 가슴을 퍽퍽 두드릴 뻔했다.
‘이 호구 같은 요원이!’
사용인들이 그녀를 무시하는 건 어쩌면 습관과도 같을 것이다. 후작 부부에게 받는 대접이 남보다 못하니 당연했다. 그러나 후계자나 다름없는 루카스까지 줄곧 이런 대접을 받아 왔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루카스.”
엘리제는 그에게로 바짝 몸을 기울여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혹시 병이 나게도 할 수 있나요?”
“…가능은 하다만. 왜 그러지?”
그 정도 눈치는 있는지, 루카스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내가 당신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만 먹게 해줄게요.”
루카스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멀뚱거리며 쳐다보기만 했다. 엘리제는 루카스의 발을 구두코로 툭 쳤다.
“내가 이렇게 툭 치면 급성 배탈 좀 나게 해줘요. 입에서 피도 좀 토하게 해줄 수 있어요?”
안 그래도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꼭 해야 하는 건가?”
“네.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이기도 해요.”
여주 시에나를 집에 초대해서까지 이런 음식을 대접하면 관계가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원작 상에 후작가 초대 장면은 없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쓰러지고 나면 당신도 똑같이 해야 해요. 쓰러지든, 피를 토하든.”
“나는 맹독을 먹어도 괜찮은 몸인데.”
“잔소리 말고 잘 따라 해요. 다 당신의 임무를 위해서니까.”
“…알겠다. 그렇게 하지.”
그는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바구니 속의 빵을 두 덩어리 집어 들어 하나는 루카스에게 건네고 하나는 제 접시에 놓았다. 그러곤 한 조각 힘들게 찢어 스튜에 적신 후 입에 넣었다.
‘으으, 맛없어.’
뻣뻣한 천 쪼가리를 씹는 느낌이었다. 엘리제는 몇 번 더 그렇게 빵을 찢어 입에 넣었다.
턱이 얼얼할 지경이 되자 그녀는 만찬실 입구에 서 있는 메리를 손짓해 불렀다. 안고 있던 고양이를 옆의 기사에게 넘긴 메리가 쪼르르 그녀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어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큰일이야, 메리. 이 빵을 먹은 직후부터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네? 괘,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
엘리제는 들고 있던 단단한 빵조각을 접시에 도로 내려놓고 메리의 손을 붙잡았다.
“내가 쓰러지면 넌 어떻게 할 거니?”
“어어, 일단…. 의원을 모셔와야죠?”
“그리고?”
“대공님께도 연락하고.”
메리에게로 몸을 기울인 엘리제가 목소리를 낮춰 빠르게 말했다.
“그 전에 대공가 기사들에게 말해서 여기 사용인들이 이곳의 무엇도 손대지 못하게 하렴. 주방도 포함해서.”
“네, 알겠어요.”
“그래. 그럼 믿을게, 메리.”
그녀에게 기댄 채, 엘리제는 루카스의 발을 툭 건드렸다. 망설임이 깃든 그의 녹안을 응시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루카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흰빛이 식탁 아래에서 반짝인 직후, 어마어마한 복통이 시작됐다.
“흐윽!”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아파서 엘리제는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꺄악! 엘리제 님!”
메리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엘리제는 왈칵 피까지 토했다.
‘뭐야, 설마 이러다 죽진 않겠지?’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놀라서 다급히 달려오는 대공가 기사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엘리제는 기절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