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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는 끝도 없이 엘리제를 몰아붙였다. 한 번 사정하고도 멈출 줄을 몰랐다. 오죽했으면 승부욕 강한 그녀의 입에서 제발 그만하자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더 했다간 내일 꼼짝도 못 할 것 같아.’
아무 일정이 없다면 모를까, 내일은 클랜튼 후작가에 방문해야 했다. 엘리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처롭게 그를 올려다봤다. 멈칫한 그가 새파란 눈동자로 탐색하듯 그녀를 살폈다.
너무 좋아서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말인지, 정말 그만두길 바라서 하는 말는지 헤아리는 표정이었다.
그는 그녀가 진심임을 깨닫고 그제야 멈춰 주었다. 아직도 뻣뻣한 제 것을 뽑아내고, 그녀의 붉어진 눈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아래뿐 아니라 온몸이 엉망이었지만, 엘리제는 도저히 씻으러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녀는 응석 부리듯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시트까지 엉망이었기에 어째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블레이크는, 곧 포기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열기가 식지 않은 그의 몸은 난로처럼 뜨끈했다.
눈을 감고 그의 품에 기댄 채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블레이크, 저 내일 어디 좀 다녀와도 돼요?”
“내일? 어딜 말입니까?”
“아버지 뵈러요.”
웅얼거림에 가까운 그녀의 대답에 블레이크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엘리제는 부러 살짝 하품까지 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엘리제가 재차 물었다.
“안 될까요?”
“아니, 안 될 리가요. 그저….”
그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내일은 내가 같이 가 줄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괜찮아요. 얼굴만 보고 금방 올게요.”
엘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역시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와의 섹스에 몸도 만족스러울 뿐 아니라 일까지 잘 풀려 엘리제는 기분이 좋았다.
비둘기 조사관을 되돌리면 반지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회색 점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블레이크에 대한 의혹도 풀리겠지.’
그의 단단하고 늘씬한 허리에 팔을 두르며 엘리제는 사르르 미소 지었다.
***
아침 일찍부터 엘리제는 클랜튼에 갈 채비를 했다. 블레이크는 내내 그녀를 염려 가득한 얼굴로 바라봤다.
“다른 날 나와 함께 가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제도에 오셨다는데 찾아뵙지 않을 수가 없어서요.”
오늘은 친목 시합의 참가자를 확정하고 조를 편성하는 날이었기에 입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부당한 대우를 참아서는 안 됩니다. 날 위해서라도요.”
그녀의 양손을 꽉 잡고서 그가 거듭 당부했다.
“약조해 주십시오, 엘리제.”
엘리제는 생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염려 마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힘이 없는 시절엔 얼마든지 숙이고 들어갈 수 있다. 까짓 자존심보다야 안전하고 편안한 생활이 우선이기에.
그러나 충분한 힘이 생겼을 땐 마땅히 그것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과거 그녀를 학대했던 양부모를 거리낌 없이 감옥에 처넣었던 것처럼.
<타락한 연인> 세계 속 엘리제 클랜튼이 과거 후작 부부를 어찌 대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운 조우에 미처 생각지 못했지만, 대공비가 된 이후 그들을 정식으로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태도가 달라졌다 하여 이상할 게 없다. 뒤에서 욕은 좀 먹을지언정.
오늘 그녀의 호위기사는 예상했던 대로 바트 루오스였다. 블레이크는 바트뿐 아니라 몇 명의 기사들을 더 붙여 주었다. 마차도 대공 자신이 타고 다니는 가장 크고 화려한 것으로 내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후작 부부에게 줄 선물까지 급히 준비해 바트 편에 맡겼다. 굳이 그들에게 선물까지 싸 가지고 갈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잠자코 있었다.
“다녀올게요, 블레이크. 당신도 잘 다녀와요.”
그는 뺨에 입을 맞추는 그녀를 덥석 잡아서는 안고 한참을 놔주지 않았다.
“일이 빨리 끝나면 데리러 가겠습니다.”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인 후에야 그는 그녀를 놔주었다.
프로이젠과 클랜튼의 타운하우스는 마차로 십여 분 거리에 있었다. 엘리제는 저를 보필할 시녀로 메리만 데리고 갔다. 케이트가 몹시 불안해하긴 했지만, 목적이 비둘기 조사관이니 어쩔 수 없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엘리제는 메리에게 미리 신신당부했다. 되도록 입을 열지 말고 조용히 그녀 뒤만 따르라고 강조하자 메리는 염려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기별했기 때문인지 루카스가 저택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루카스가 내민 손을 잡고 엘리제는 마차에서 내렸다.
“잘 지내셨나요?”
“덕분에.”
비둘기들이 밤새 푸드덕대며 괴롭힌 모양인지,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피곤해 보였다.
“들어가지요.”
블레이크에게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프로이젠의 기사들은 루카스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거리를 벌린 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루카스도 그들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엘리제는 루카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클랜튼의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널찍한 홀에 들어선 그녀의 시선이 중앙 계단을 향했다.
어제 잠시 마주쳤던 찬란한 금발의 중년 부부가 그곳에 서 있었다. 클랜튼 후작 부부였다.
그들은 외출하려다가 프로이젠의 마차를 보고 멈춘 모양새였다. 클랜튼 후작 부인, 즉 원작상 루카스의 어머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왜 여길.”
엘리제는 그들을 보면서도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 옅게 미소 띤 채 쳐다만 볼 뿐이었다. 이에 먼저 움직인 건 클랜튼 후작이었다.
“대공비 전하.”
그의 미간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클랜튼 후, 오랜만이에요.”
그제야 엘리제 역시 답인사를 했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남편을 보며 후작 부인은 못마땅한 듯 눈매를 좁혔다. 후작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클랜튼에 방문하셨는지요.”
묻는 말이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제가 초대했습니다.”
대꾸한 것은 루카스였다.
“두 분께서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
어느 정도 표정 관리를 하는 후작과 달리 후작 부인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루카스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 이어 말했다.
“깜짝 놀라게 해 드리려고 미리 말씀 안 드렸는데, 외출 계획이 있으셨군요. 저의 실책입니다.”
후작 부부에게 어찌 대응할지 미리 생각을 해두었던 엘리제는 뜻하지 않은 루카스의 도움에 잠자코 그들을 쳐다보았다. 매우 흥미로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클랜튼의 피가 흐르는 친딸을 배척하면서까지 소중히 아껴 온 아들이 부모 속도 모르고 누이를 초대하다니.
‘은근 속 긁는 재주가 있네.’
물론 루카스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후작 부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한 노릇이었다.
“아쉬우시겠지만, 다음에 다시 날을 잡을 테니 이만 나가 보시지요. 비전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엘리제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루카스!”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 후작 부인이 아차 하여 입을 다물었다. 후작이 부인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대공가의 기사들이 뒤에 버티고 서서 지켜보는데, 더 뭐라 말을 하겠는가.
“그래요. 저 때문에 외출을 미루실 필요는 없어요. 클랜튼 경이 있으니까요. 루오스 경은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을 후작께 드리세요.”
엘리제의 지시에 바트가 걸어 나와 큼지막한 상자를 후작에게 건넸다. 잘은 모르겠지만 만만한 값어치의 선물은 아닐 것이다.
이를 짐작하는지 후작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값진 선물을 들려 보낸 대공의 의도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부디 대공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 주십시오. 조만간 정식으로 두 분을 초청해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엘리제에게 묵례한 후작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지나쳐 갔다. 후작 부인이 루카스를 향해 ‘나중에 보자’라는 뜻이 담긴 눈빛을 쏘아 보냈으나, 진짜 아들도 아닌 그가 이를 알아챌 리 없었다.
후작 부부가 등 떠밀리듯 저택을 나가자, 루카스는 응접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엘리제는 따라 들어오려는 바트를 제지했다.
“그럴 것 없어.”
“하지만, 비전하.”
“여긴 나의 집이었던 곳이야. 나를 불편하게 만들 셈인가.”
바트는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럼 문 앞에 있겠습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메리만 데리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루카스는 시종이 다과를 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기다려.”
그러곤 테라스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예의 그 비둘기 망이 들려 있었다. 루카스가 메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엘리제가 말한 조사관이군.”
“네, 환상 컨트롤타워 초급 조사관, 메리예요.”
메리가 쾌활하게 답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윗세계 요원, 루카스다.”
그가 손을 맞잡자 메리는 위아래로 신나게 손을 흔들어댔다. 빠르게 그녀의 손을 팽개치듯 놓고서, 루카스가 물었다.
“들었겠지만 이 비둘기 중에 중간지대의 조사관이 있는 것 같다. 동료를 알아볼 수 있겠나?”
루카스의 말에 메리는 비둘기 망을 들여다봤다. 열심히 그것들을 들여다보던 메리가 그중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쿤! 너 맞지?”
엘리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메리와 비둘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걔가 쿤인 줄 어떻게 알았어?”
“쿤은 얘처럼 눈 밑에 점이 있어요.”
“…그거, 그냥 검댕이 묻은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수건에 찻물을 적셔 툭툭 문지르자 비둘기 눈 밑의 검은 얼룩은 금방 사라졌다. 메리가 헤헤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얘가 아닌가 보네.”
엘리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망 안의 비둘기를 모두 꺼냈다. 그러곤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자, 여기서 조사관 비둘기는 망 안으로 들어가렴.”
그녀의 말에 나머지 비둘기들은 퍼덕대느라 바빴지만 유독 한 마리만 총총 뛰어 망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새침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털빛이 유독 하얗더라니. 너였구나!”
메리가 망 안의 비둘기를 꺼내며 반갑게 외쳤다. 물론 비둘기 조사관은 이미 메리에게 잔뜩 삐져선 고개를 팩 돌렸다.
루카스는 어수선하게 응접실을 날아다니는 나머지 비둘기들을 쫓아내다시피 날려 보냈다. 속이 다 시원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