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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







그는 몸을 낮추고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내리 눌렀다. 짙은 정염에 사로잡힌 새파란 눈동자에 담긴 것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여인의 상이었다.







가쁜 숨을 참지 못해 엘리제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는,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관능을 두르고 여인을 꾀는 신화 속 남신 같았다.







엘리제가 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그에게로 뻗어 블레이크를 품에 끌어들이려던 순간이었다.







조심스럽지만 다소 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송구합니다만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목소리는 클로드의 것이었다. 일순 블레이크의 눈동자에 스친 난폭한 감정에, 엘리제는 움찔하고 말았다.







잠시간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녀를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잠시만.”



“네. 급한 일인 것 같으니 어서 얘길 들어 보세요.”







그녀로서도 짜증이 날 만한 상황이었지만, 블레이크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제가 더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블레이크는 문밖의 클로드를 당장이라도 쳐죽일 기세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벌컥,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그는 엘리제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무언가를 설명했다. 문고리를 움켜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러다 문고리 고장 내는 건 아니겠지.’







엘리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그를 바라보는 동안, 짤막한 대화를 마친 그가 도로 문을 닫고 돌아섰다.







“엘리제.”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가 보셔야 하는군요.”







목소리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져 말해 놓고, 엘리제는 제풀에 놀랐다.







“어서 다녀오세요.”







보는 엘리제가 다 아파 보이도록 입술을 짓씹던 그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지 말아요.”







엘리제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살며시 그를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안 자고 기다릴게요. 금방 돌아올 거잖아요. 그렇죠?”



“…물론입니다.”







거의 울먹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엘리제는 드레스룸으로 향하는 블레이크를 따라가 직접 셔츠를 골라 주고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금방 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비록 배역에 불과할지라도 누군가에게 다녀오라며 배웅하는 기분은 묘했다. 마치 진짜 가족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몇 번의 입맞춤 후 그는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마지막까지 그녀에게서 떼어 놓지를 못하며 클로드와 함께 떠났다.







‘무슨 일이기에 이 밤중에 사람을 불러낸담.’







괜스레 저도 속상해져 블레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제는 한참 만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 깜짝이야!”







엘리제는 그야말로 심장이 뚝 떨어질 뻔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바로 뒤에 와 있던 루카스 때문이었다.







“문제가 생겼다.”







엘리제는 놀라서 펄떡대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렸다.







“놀랐잖아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고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길래요?”



“비둘기 조사관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었다.”



“네에?”







그의 말에 엘리제는 다시 한번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루카스가 초조한 표정으로 검은색 옷을 건넸다.







“일단 갈아입으며 들어. 바로 나가야 하니까.”







엘리제는 루카스가 입은 것과 디자인이 거의 흡사해 보이는 검은색 상하의를 펼쳐 보았다.







“작아 보이는데. 사이즈 맞는 거예요?”



“윗세계 아이템이다. 입으면 늘어나.”







엘리제는 군말 없이 가운을 벗어 던졌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루카스가 상황을 설명했다.







“설치한 덫에 걸린 비둘기들이 육류 상인에게 팔려갔다. 잡힌 건 스무 마리 정도였다는군.”



“아니 그걸 왜 당신 허락도 없이….”



“하필 오늘 클랜튼 후작 내외가 제도에 오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그들이 치워 버리라고 한 모양이야.”







엘리제는 이마를 짚었다. 클랜튼 타운하우스의 주인은 루카스가 아닌 후작 내외였다. 당연히 사용인들로서도 후작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육류를 취급하는 상인에게 팔았다면,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 잡아먹겠다는 거잖아.”



“그럴 가능성이 크지.”







비둘기로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을 무심코 떠올리던 엘리제의 머릿속에 저녁때 먹은 새구이가 스쳐 갔다. 닭보다 연하고 부드러워서 굉장히 맛있었다.







엘리제는 금세 환복을 마쳤다. 루카스의 말대로 옷은 그녀의 몸에 잘 맞았다.







“일단 가 봐요. 아직 무사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요.”







남의 배 속에 들어간 조직원도 노란 점으로 표시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상업지구에 가보는 게 급선무였다.







그를 따라 테라스로 나가려던 엘리제가 멈칫하여 말했다.







“블레이크는 당신이 불러낸 거예요?”



“그래. 대략 세 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을 거야.”



“어떻게 불러낸 건데요?”



“친목 시합에 네 보호자로 그가 점찍어 둔 마법사가 있다. 상급 마법사 중에선 유일하게 여자지. 그녀의 실종신고가 기사단을 통해 대공에게도 전해졌다. 만약 오늘 내로 그녀를 찾지 못하면 접수 마감인 내일, 블레이크는 네 보호자로 다른 마법사를 택해야 한다.”







다소 긴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 엘리제가 물었다.







“설마 당신이 그 마법사를 납치, 감금해 두었다는 소리는 아니죠?”







농담에 가까운 질문이었건만, 그는 우울한 낯으로 시선을 피했다.







“…어쩔 수 없었다. 비둘기 조사관을 구하려면 네가 필요하니까.”







본인이 한 짓이 맞는다는 소리였다.







“아니, 뭐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럴 수도 있죠. 잘했어요.”







엘리제는 볼을 긁적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자, 그래서 이제 어떻게 가요?”



“일단 하늘에서 살피도록 하지. 잠시 실례하겠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든 루카스가 테라스 난간 밖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







엘리제는 너무 놀라 억, 소리도 내지 못했다. 몸이 하늘로 솟구치며, 타운하우스들과 황궁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상업지구로 갈 테니 지도를 확인해.”



“아…. 네, 알겠어요.”







남자에게 안겨 밤하늘을 비행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제는 패널 디스플레이를 활성화해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나 지상과 너무 많이 멀어진 탓인지 그와 그녀를 나타내는 두 개의 점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았다.







“조금 내려가 줄 수 있어요? 목격당하려나?”



“아니, 이 옷은 은신 기능이 있다.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돼.”







뒷덜미가 오싹해지는 감각과 함께 그들의 몸이 뚝 떨어져 내렸다.







“아, 좀 천천히!”







엘리제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최선을 다해 짜증을 부렸다.







“시간이 없다. 끓는 물에 튀겨지기 직전일지도 몰라.”



“…잔인하게도 말하네. 아무튼, 전 번지점프 같은 거 질색이라고요. 무서워 죽겠네.”







몸서리치는 엘리제를 내려다보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의하지.”







상가 건물들 위를 낮게 날기 시작하자, 지도에 표시되는 점의 수가 확연히 늘어났다. 루카스 역시 디스플레이를 힐끔거리며 방향을 조정했다.







낮에 미처 돌아보지 못한 상업지구를 엘리제는 구석구석 구경했다. 블레이크와 들렀던 레스토랑이 저 멀리 보였다. 지도를 확인하던 엘리제가 다급히 루카스를 불렀다.







“루카스! 이 근방이에요!”







지도에 노란 점 하나가 새로이 표시되었다.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새롭게 나타난 노란 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두 개의 노란 점이 거의 겹쳐지다시피 한 시점에 그는 건물 사이 좁은 골목에 내려섰다.







“가보지.”







엘리제의 손을 잡고서 그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긴다 했더니, 골목 전체가 야시장이었다. 길거리 음식들은 물론 갖가지 노점들이 늘어서 있어, 일대가 대낮처럼 환했다.







엘리제와 루카스는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앗, 저기.”



“그래. 나도 봤다.”







그들과 매우 가까운 곳에 비둘기 몇 마리가 있었다.







“다행히 모두 살아있군.”







루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에 든 새들은 이미 벗어나길 포기했는지 대부분 얌전했지만, 게 중 한 마리만이 유독 버둥거렸다.







“저거 아닐까요.”







괜히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눈빛이 나름 총명해 보였다.







“으음. 확실히 다른 것들과 좀 달라 보이는데. 일단은 모두 사 오도록 하지.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알겠어요.”







엘리제를 남겨둔 채 루카스가 비둘기 망의 주인으로 보이는 상인에게 다가갔다. 처음엔 퉁명스러운 표정이던 주인은, 루카스가 내미는 돈주머니를 열어 보고서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얼마가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횡재했다는 표정이었다.







‘얘기가 잘 풀릴 것 같네.’







엘리제는 살짝 골목 안으로 들어가 지도를 활성화했다. 거래를 무사히 마쳤는지, 초록 점이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행히 노란색 점도 함께였다. 확실히 저 비둘기 망 안에 중간지대의 조사관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린 것 같아,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루카스 역시 안도했는지, 그를 봐온 이래 가장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뛰어왔다.







“비둘기 조사관을 구했다!”



“수고했어요, 루카스.”







엘리제 역시 환히 웃으며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자, 그럼 이 중에 어떤 비둘기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되겠군.”







쪼그려 앉아 망을 뒤적이는 그를 따라 앉으려던 엘리제는 디스플레이를 종료하려다 화들짝 놀랐다.







“루카스, 루카스!”



“음?”



“비둘기는 나중에 확인하고 일단 건물 위로 올라가요!”







의아해하면서도 루카스는 망을 한 손에 쥐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저 가볍게 발을 굴렀을 뿐인데, 그들은 3층 높이의 건물 지붕에 오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건물 위로 올라가자 엘리제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블레이크예요!”







말을 탄 서너 명의 사람들이 상업지구를 관통해 지나가고 있었다.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뒷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런. 설마 벌써 찾은 건가?”



“찾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택에 돌아가는 길 같아요.”



“어떡하지?”



“일단 저를 먼저 좀 데려다줘요. 블레이크보다 늦게 들어가면 끝장이에요.”







평소 그의 언행을 생각해볼 때, 최소 저택에 감금당할 것이다. 이를 알고 있는지 루카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다시 안아 들었다.







“꽉 잡아.”







그가 건물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망 안에 들어있는 비둘기들이 아우성치며 퍼덕거렸다.







“…이것들은 어떡하지?”



“미안한데 내일까지만 좀 데리고 있어 줄 수 있어요?”



“그래. 내 방에 잘 숨겨 두도록 하겠다. 사람을 보낼 테니 내일 집으로 와. 부모님을 뵈러 간다고 하면 대공도 별말 못하겠지.”



“알겠어요.”







날아가며 지도를 확인하니 역시나 블레이크는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충분할지 걱정이었다.







‘아무리 길에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뭐 저렇게 빠르담.’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리 서두르는 거겠지만, 지금만큼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회색 점이 프로이젠 저택에 당도함과 동시에 루카스와 엘리제 역시 테라스에 내려섰다.







“옷은 다음에 줘도 되죠? 고마워요, 루카스.”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엘리제는 옷을 벗느라 바빴다.







“그래. 내일 보지.”







구구구 울어대며 퍼드덕 날갯짓하는 비둘기들을 데리고 루카스는 저택을 떠났다. 서둘러 테라스 문을 닫고 벗은 옷을 침대 아래 쑤셔 넣었을 때였다.







그녀가 자고 있을 거로 생각했는지, 아주 조용히 문이 열렸다. 미처 일어날 겨를이 없어 엘리제는 꼼짝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그녀와 블레이크의 시선이 우뚝, 마주쳤다.







“…엘리제?”







속옷 차림으로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엘리제의 모습에 블레이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엘리제는 와르르 흔들리는 그의 동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이거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