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기
-39-





블레이크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녀를 조용히 바라만 볼 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불안하던 엘리제의 마음도 금세 안정되었다. 그가 곁에 있는 한 곤란한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레스토랑답게 음식들은 모두 훌륭했다. 어째 주문을 안 받는다 했더니, 메뉴판을 통째로 옮겨 온 듯 없는 게 없었다.







식사하는 동안 엘리제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팔찌를 이따금 바라보던 그가 제 몫의 푸딩을 접시째 그녀에게 밀어주며 말했다.







“제도에는 마법 도구를 파는 곳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상점에 없지요.”



“그럼요?”



“경매를 통해 구할 수 있습니다. 조만간 그 팔찌보다 더 좋은 것으로 구해 줄게요.”







아무래도 황태자가 선물한 것을 손목에 끼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호신의 기능이 있다는 걸 알아서인지 빼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블레이크.”







엘리제는 생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뭐니뭐니 해도 안전이 최고다. 검술이나 마법 재능, 혹은 특수능력을 발견하기 전까지 아이템의 도움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











본래 제도의 상업지구를 돌아보는 게 목표였지만, 괜히 돌아다니다가 클랜튼 후작부부를 만날 것이 걱정되어 엘리제는 일찌감치 귀가하는 편을 택했다.







저택에 블레이크와 함께 돌아오자 멜릭과 케이트를 비롯한 모두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블레이크와 함께 3층까지 올라왔을 때,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엘리제. 나는 업무를 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클로드의 손에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두툼한 것으로 보아 처리할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미안합니다. 계속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엘리제는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지어 주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혹시 저택에 제가 출입해선 안 되는 곳이 있나요?”







조심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블레이크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곳이 있을 리가요. 프로이젠의 본성은 물론이거니와 이 저택 역시 부인의 집이지 않습니까. 무엇을 하든 그대의 자유입니다.”



“그리 말해 주셔서 기뻐요.”







엘리제는 환히 웃으며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겨우 입맞춤 한 번에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를 당장이라도 껴안고 싶은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시동이 걸리기 전에 엘리제는 재빨리 그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볼일 먼저 보세요. 그래야 저녁에 함께 시간을 보내죠. 충분히, 길게.”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강한 의지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약조한 블레이크는 멜릭, 클로드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자꾸만 들썩이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엘리제는 제 방으로 향했다.







케이트와 메리가 그녀를 따라 들어와 드레스 벗는 것을 도왔다. 간소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자 몸과 마음이 덩달아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세계의 옷은 쓸데없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다.







“케이트.”



“네, 비전하.”



“혹시 프로이젠의 기사 중 여자가 있나?”







엘리제의 질문에 케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명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면 그들을 위한 단복도 있겠군. 남자 기사들 것과 비슷한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거의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단복이 궁금하십니까?”



“운동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러려면 드레스 말고 활동성 있는 옷이 필요할 것 같은데.”







사실은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검술까지 배워 볼 생각이었지만, 엘리제는 일단 그 정도로만 말해 두었다.







“운동… 말씀입니까?”







특유의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으로 보아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케이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필요하시다면 비전하께 맞춰 적당한 의복을 주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던 답을 들은 엘리제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래 주겠나? 이제 나도 좀 건강해지겠는걸.”







저택의 어디든 출입해도 된다고 블레이크에게 허락받았으니, 편한 옷이 생기면 저택 지하 연무장을 이용해도 될 것이다. 새벽에 보인 태도로 미루어 생각할 때 앨런이나 바트에게 기본적인 검술 정도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주문을 넣어 주면 좋겠군.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고 싶어서.”



“네, 비전하.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메리에게 엘리제를 잘 모시라 당부한 케이트가 방을 나갔다.







메리와 둘만 남자, 엘리제는 침대에 편하게 드러누웠다. 쪼르르 다가온 메리가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제 님, 진짜 운동하시게요?”



“응. 검술 배울 거야.”







건성으로 대꾸하며 엘리제는 반지를 톡톡 두드렸다. 황궁에서 잠시나마 업그레이드를 재개했으니 무언가 변화가 생겼을까 해서였다.







“검술이요? 요가 말고?”



“그래. 그런 쪽으로 내 특수능력이 발휘될지도 모르잖아.”



“어…. 왠지 그쪽은 아닐 것 같은데….”







종알대는 메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엘리제는 패널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알림창을 살폈다.







『시스템 버전 업그레이드가 비정상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구성요소가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예상했던 바였다. 시작 시에 대충 80퍼센트가량 차 있는 가로 바가 나타났으니 이제 85퍼센트가량 진행되지 않았을까. 엘리제는 혹시라도 바뀐 것이 있나 확인하기 위해 메뉴들을 일일이 눌러 보았다.







‘응?’







대본 바로 밑에 있는 ‘작품소개’를 눌렀을 때였다. 엘리제는 알림창의 문구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발견했다.







『구성요소가 불완전합니다. 제한된 정보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료해 주세요.』







확인을 누르자 <타락한 연인>의 줄거리와 홍보 문구가 페이지에 표시됐다. 엘리제는 대강 내용을 읽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스크롤을 페이지 끝까지 내렸을 때였다. 뭔가 불길함이 느껴지는 붉은색 문장이 나타났다.







『시나리오 완성률: 5퍼센트 / 세계의 균열: 0퍼센트』







시나리오 완성률은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는지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뒤의 문장은 뭘 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계의 균열이라니?’







엘리제는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있는 메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얘가 알려나?’







“메리?”



“네, 엘리제 님!”



“혹시 ‘세계의 균열’이라는 게 뭔지 아니?”



“앗! 필립에게 못 들으셨어요?”







다행히 메리가 아는 내용이었다. 메리는 엘리제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시나리오가 원래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세계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해요. 애초에 존재치 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리니까요.”



“균열이 심해지면 어떻게 되는 건데?”



“세계가 붕괴하죠! 외부에서 보자면 그렇게 되고, 내부에서 보자면 멸망한다고 볼 수 있어요.”







엘리제는 입을 턱 벌렸다.







“되게 위험한 거잖아, 그거.”



“그렇죠. 수습하려면 정말 힘들어요.”







수습을 어떻게 한다는 건지 엘리제는 도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우리까지 위험해지는 건 아니지?”



“저희는 중간지대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요. 그래도 시말서니 벌점이니 여러 가지로 곤란해지는 게 사실이라, 최선을 다해 틀어막아야 해요.”



“그렇구나.”







새삼 한숨이 나왔다. 루카스를 도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악마가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쳐도 루카스의 연기실력은 시나리오를 엉망으로 만들 만큼 최악이었다.







‘등장인물 열람’과 ‘지도’ 탭에서는 딱히 달라진 부분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3층 집무실에는 회색 점이 하나뿐이었다. 클로드가 아닌 바트 루오스가 회색 점에 해당한다는 소리였다.







수상하게 쳐다보다 몇 차례 눈이 마주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불러서 얘기 좀 해봐야겠네.’







오늘은 앨런이 곁에 있으니 내일은 바트가 그녀의 호위를 맡을 것이다. 회색 점의 단서를 얻는 게 그리 쉽진 않겠지만, 블레이크까지 함께 얽혀 있는 일이니만큼 그녀에겐 몹시 중요했다.







약간의 불안감을 억누른 채 엘리제는 대본을 열었다. 여주 시에나와 남주 루카스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반복하여 꼼꼼히 읽었다.







‘루카스가 여주를 잘 꼬셔야 할 텐데.’







외모와 다정함이 주 무기인 <타락한 연인>의 남주에게 다정함이 빠져 버렸으니, 매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시에나의 등장은 황태자 생신 연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때까지 루카스의 매력 포인트를 어떻게든 개발해야 한다.







“아, 메리.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이요? 뭔데요?”



“그 왜 클랜튼 후작가의 마부로 빙의한 조사관 말이야. 찾은 것 같아.”







엘리제의 말에 메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응. 변신했다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했나 봐.”



“그런데 어떻게 발견하셨어요?”



“루카스가 찾았어. 얼마 전부터 알짱대던 비둘기가 있었대.”



“비둘기요?”







메리는 킥킥대며 웃었다.







“그 녀석, 새처럼 날아보는 게 꿈이라더니 결국 소원을 이뤘네.”



“그랬어? 하긴 나도 한번 날아보고 싶긴 하네.”



“엘리제 님은 검술보다 차라리 그런 쪽 특수능력이 더 가망성 있어 보여요! 그러니까….”



“그래도 창문에서 뛰어내릴 생각은 없단다.”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메리가 헤헤 웃었다.







“여차하면 제가 밑에서 받아드리면 되는데.”







메리의 태평한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엘리제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힘세서 넌 정말 좋겠다.”







중얼대며 엘리제는 다시 대본 연구에 집중했다. 메리처럼만 살아도 세상 사는 게 참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











얼마나 작정하고 서둘렀는지, 블레이크는 저녁 식사시간에 싱글대며 나타났다. 그와는 반대로 클로드와 멜릭은 영혼까지 하얗게 불태운 얼굴들이었다. 아주 잠깐 그들을 안타까워해 준 후, 엘리제는 블레이크와 즐겁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드디어 블레이크가 고대해 마지않았을 시간이 왔다. 저녁 식사 전 미리 목욕을 마쳤다는 엘리제의 말에 그는 상기된 얼굴로 욕실에 들어갔다.







“금방 나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들어 버리면 안 됩니다.”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면서.







엘리제는 일부러 하품하는 척하며 그의 애를 잔뜩 태우고선 케이트가 준비해 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유능한 시녀장답게 우아하면서도 아주 야했다.







제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던 엘리제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소설 속이 좋긴 좋네. 먹어도 배도 안 나오고, 얼굴에 잡티도 안 생기고.’







피부관리, 몸매관리가 따로 필요 없었다. 시나리오상 설정 한 줄이면, 그녀의 미모는 내내 보장되는 셈이었다. 이대로만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사후세계니까. 앞으로도 비슷하지 않을까.’







영혼만 남은 셈이 아닌가. 영혼이 살찐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정말로 배가 나오고 토실토실해진다는 말은 아니리라.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마음껏 감상한 엘리제는 침대에 걸터앉아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가슴이 간질거렸다.







첫 만남만 조금 당혹스러웠지, 블레이크와 보낸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기대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블레이크는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고선 나왔다. 서둘러 여민 것이 티가 나는 가운의 벌어진 틈으로 그의 근사한 몸이 보였다. 시선을 맞춘 채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엘리제는 흥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닿기만 해도, 품에 안기기만 해도, 온몸이 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그녀 앞까지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