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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도 없이 열리는 문에 기겁한 엘리제가 루카스를 황급히 책상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책상이 없었다면 치마 속에 남자를 들인 걸 그대로 목격당했을 것이다. 너무 생각 없이 행동했음을 엘리제는 뒤늦게 자각했다. 기척을 예민하게 잘 읽는 루카스를 너무 과신한 탓이다.







“어? 클랜튼 영애?!”







안에 들어온 덩치 큰 기사가 순박해 보이는 눈을 끔뻑이며 외쳤다. 엘리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기사를 속으로 마구 욕했다.







루카스가 늘씬한 측에 속한다 한들 평범한 일반인에 비하면 체격이 컸기에, 엘리제는 그에게 공간을 확보해 주기 위해 최대한 다리를 벌려야 했다.







허벅지 안쪽에 닿는 루카스의 숨결에 움찔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엘리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랬었지만 이제는 프로이젠이지요.”







너무 불편했는지, 루카스가 살짝 자세를 고치며 그녀의 허벅지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아! 실례했습니다, 대공비님. 전 네프러스 기사단의 오웬 푸글리입니다.”







기사는 꾸벅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사죄했다.







“그래요, 푸글리 경. 단장님을 뵈러 온 건가요?”



“네. 그런데…. 자리를 비우셨군요.”







다리 사이에 끼어 있는 루카스의 머리 탓에 그녀는 티 나지 않게 입술을 깨물었다. 안 그랬다간 소리를 내버릴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여기엔 저 혼자랍니다.”







지그시 이를 문 채 그녀는 생긋 미소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기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 어서 나가보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대공비님.”



“그래요. 잘 가요.”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오웬이 허둥대며 방을 나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리제는 의자를 뒤로 물렸다.







드레스 밖으로 나온 루카스의 꼴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머리는 헝클어져 수습이 불가할 지경이었다. 씩씩 숨을 몰아쉬던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네 다리 사이에서 묘한 냄새가 난다.”







그의 머리를 정돈해 주며 엘리제가 물었다.







“무슨 묘한 냄새요?”



“분명 너의 체향과 일치하는데, 좀 더 강하게 느껴지고, 상대를, 흥분시키는….”







시뻘건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그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엘리제는 힐끔, 그의 바지춤을 내려다봤다.







“한마디로, 내 다리 사이 냄새를 맡고 당신이 흥분했다는 소리군요?”



“…….”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어요. 아무튼, 여기서 더 뭔가 알아내는 건 어려울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동의한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그는 책상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까지 했다. 제 몸에 일어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그럼, 이만.”



“네에, 조심히 가요.”







루카스는 홱 돌아서 방을 나갔다.







“흐음.”







여자에게 반응할 줄 알게 된 윗세계 요원이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특수능력에 대해선 결국 알아내지 못했지만, 루카스가 <타락한 연인>의 남주에 한 걸음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반지의 비밀을 알고 있을 조사관도 곧 구출할 예정이지 않은가.







‘좋네, 좋아.’







작게 하품을 하며 엘리제는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슈만도 없겠다, 그녀는 마음 편히 잠을 청했다.











***











“열일곱 번째 안건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회의의 진행을 맡은 어거스트 백작의 시선이 회의장 한 곳을 향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아무도 없으신 것 같으니 넘어가겠습니다.”







빨리 진행하고 빨리 끝내라는 뜻을 온몸으로 표하고 있는 프로이젠 대공 탓에 사소한 안건은 다수결로 가부만 결정한 채 넘어가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열여덟 번째 안건입니다. 황후 폐하께서 별궁 증축 건에 대한 예산 확보를 요청하신바….”



“프로이젠에서 지원토록 하지.”







대공이 어거스트 백작의 말허리를 뚝 자르고 선언했다.







“네?”



“500만 골드면 되나?”



“아닙니다. 150만 골드를 요청하셨습니다.”







대공이 이렇듯 말한 걸 황후가 듣는다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대공은 500만 골드라도 아무렇지 않게 내주었을 테니까.







“150만 골드 전부 프로이젠 앞으로 돌리게. 그럼 이제 끝인가?”



“아, 네.”







어거스트 백작이 황급히 서류를 확인하는 사이 이미 블레이크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늘의 안건은 이것으로 모두 끝….”







의장의 폐회선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공은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대공께 무슨 일이 있나 보오.”



“얼핏 들으니 대공비가 입궁했다던데, 그 때문이 아닐지.”



“설마 아내 때문에 저리 서두르겠소?”



“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대공이 어떤 성정을 가졌는지 모두가 잘 알지 않습니까.”







어쨌든 덕분에 지겨운 회의가 빨리 끝났다며 다들 기분 좋게 제 몫의 서류를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회의실을 나서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이참, 내려 달라니까요.”



“아닙니다. 마차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부끄럽단 말이에요. 블레이크, 제발….”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엘리제, 내게 기대요.”







어거스트 백작은 저도 모르게 다시 문을 닫았다.







“…….”



“방금….”







오랜 침묵이 흐른 후에야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신혼이 아니오. 허허.”



“그, 그렇지요.”







신혼이라 한들 어느 대귀족이 황궁에서 저러고 있을까 의문이었으나, 다들 그럴 수도 있다며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러지 않으면 대공이 정말 미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엘리제는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졸다 말고 몸이 번쩍 들려서 보니 블레이크가 그녀를 안아 들고 있었다. 내려 달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대공가의 마차가 있는 곳까지 그의 품에 안겨 와야 했다.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심지어 회의실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다 봤다.







특히 엘리제는 그들을 배웅하던 슈만 크롬벨과 마차 앞에서 기다리던 기사단장 클로드의 표정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기절한 척할걸.’







엘리제는 얼굴은 손으로 가렸다. 킬힐을 신고서도 꼿꼿하게 걸으며 수만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던 과거의 자신은 어디 간 것인가. 블레이크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쿨쿨 자다니.







‘이게 다 체력부족 탓이야.’







틈날 때마다 요가와 필라테스를 한 덕에 막 빙의했을 때보다는 아주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유산소 운동이 부족했다.







머릿속으로 운동 스케줄을 짜는 동안 어느새 마차는 황궁을 빠져나와 제도의 상업지구로 향해 가고 있었다.







“엘리제.”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폐하는 뵈었습니까?”







그의 말에 엘리제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답한담.’







렉스가 이상한 짓을 벌이는 바람에 그와 말을 맞추지 못한 건 명백히 그녀의 실수였다. 엘리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뵙지 못했어요. 막상 입궁했더니 건강이 좋지 못하신지….”



“그럼….”



“태자 전하께서 대신 나와 계시더라고요. 많이 미안하셨는지 이 팔찌를 제게 선물해 주셨어요.”







엘리제는 고요히 맞닿은 블레이크의 시선에서, 그가 이 팔찌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쨌든 그녀로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니, 이후는 렉스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렇군요. 다음에 같이 찾아뵙도록 하지요.”



“네. 그러는 편이 저도 좋을 것 같아요.”







제도의 상업지구를 가로지르던 마차는 3층짜리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지나오면서 본 다른 건물들보다 외관이 그럴듯했다.







“듣기로, 여기가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이라 하더군요.”







엘리제의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우며, 블레이크가 말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건물에 시선을 둘 수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 몸을 돌리는 순간, 그들을 지나쳐 걷던 남녀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루카스의 것과 꼭 닮은 화사한 금발이었다. 그가 준 자료사진과 정확히 일치하는 외양. 클랜튼 후작과 후작 부인이었다.







‘어.’







인사라도 건네야 하나 싶어, 그들을 보며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그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마차를 지나쳐갔다.







엘리제는 당혹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눈이 마주친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거리까지 가까웠다.







‘이 정도의 사이였던 건가?’







타지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인사조차 안 하는, 타인만도 못한 사이.







‘진짜 부모라 해 봤자 별거 없구나.’







어린 시절, 굶고 얻어맞으며 엘리제는 여러 번 생각했었다. 진짜 부모님이 나타나서 보란 듯이 구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를 잃은 것부터가 사고였다며, 여태껏 애타게 찾아 헤맸다고 말해 준다면. 실제 그녀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읽던 소설 중엔 그런 멋진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엘리제는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후작 부인은 몰라도, 후작은 엘리제 클랜튼의 친부였다. 한때, 친부모를 찾기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녀를 못 본 척 외면하는 후작을 보니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엘리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환상을 깨주어서. 또한, 곤란하지 않게 해줘서.







대비도 못한 상태에서 인사를 주고받고 대화를 나눠야 했다면 몹시 난감했을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엘리제.”







엘리제가 통 움직이질 않자, 블레이크는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후작 부부는 이미 그들을 지나쳐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뒷모습만 보고도 그들을 쉽게 알아보았다.







“클랜튼 후작…?”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엘리제는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괜히 가서 알은체라도 했다간 큰일이었다.







“어서 들어가요, 블레이크.”







엘리제는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엘리제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블레이크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클로드가 앞서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홀 매니저로 보이는 이가 황급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프로이젠 대공 전하, 비전하.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그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블레이크가 미리 사람을 보내 예약한 모양인지, 만석인 1층과 달리 2층의 모든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그들이 안내받은 곳은 창가 쪽 테이블이었다.







엘리제는 매니저가 빼준 의자에 앉아 창밖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되도록 마주치지 말아야 할 텐데. 제도엔 무슨 일로 온 거지?’







지나다니는 이들이 제법 잘 보였지만, 이미 거리를 벗어났는지 후작 부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제.”







손등에 덮이는 온기에 엘리제는 고개를 돌렸다. 블레이크의 고요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어, 그럼요.”







그의 푸른 눈에 담긴 염려 또한 손의 온기만큼이나 따사로웠다.







엘리제는 왠지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기가 불편해서 눈을 내리깔았다. 제 손을 감싸 쥔 그의 커다란 손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그녀의 양부가 불쑥 촬영장에 찾아와 고함을 질러댔을 때, 가차 없이 경찰에 신고한 뒤 조용히 그녀 곁을 지켜 준 사람. 그곳에서 그녀의 사정을 아는 이는 그 하나뿐이었다. 늘 티격태격하던 사이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녀의 손을 잡고서 제 등 뒤에 숨겨 주었다.







‘카인 리베르토. 넌 악마와 무슨 계약을, 무슨 내기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