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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와 기사들 간의 친목 시합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네프러스 기사단의 단장인 슈만은 조 편성이니 뭐니 신경 쓸 일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서류에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프로이젠 대공비 때문이었다.







남편이 내어준 커다란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던 그녀는 따스한 햇볕이 기분 좋았는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연보랏빛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자그마한 얼굴은 귀부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인 여자다.







엘리제 클랜튼. 아니, 이제 엘리제 프로이젠이 된 그녀에 대한 소문을 슈만은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그녀가 다섯 살이 되던 해, 클랜튼 후작은 재혼했다. 상대는 아카데미 시절 후작의 첫사랑이었다. 그녀는 미망인이었고 일곱 살짜리 아들이 하나 있었다.







후작의 첫 번째 부인을 빼다 박았다는 엘리제의 어릴 적 모습을 본 이는 거의 없었다. 후작은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를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았다. 후처의 아들 루카스만을 아카데미에 보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엘리제가 유명해진 건, 그녀의 패악질 때문이었다.







루카스는 인기가 많았다. 학기 중, 그의 자리에는 선물과 편지들이 쌓였다. 방학 중에는 그것들이 본가, 클랜튼 후작가로 갔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카데미까지 찾아온 연보랏빛 머리칼의 소녀는 루카스에게 편지를 보낸 영애들을 일일이 찾아가 구린내가 몸에 배는 마법 시약을 끼얹었다.







피해자가 스무 명이 넘어선 후에야 그녀는 후작에게 붙잡혀 귀가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 후로도 그녀는 루카스를 짝사랑하는 영애들에게 말로 형용하기 힘든 짓을 벌였다고 한다. 동물의 사체를 선물로 보냈다는 둥, 밤중에 들어와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둥 믿기 어려운 얘기들도 섞여 있었다.







어쨌든 그녀에 대한 소문은 안 좋은 게 대부분이었고, 루카스의 인기와 더불어 사그라지지 않았다. 보통 열여섯 살쯤 치러지는 사교계 데뷔도 하지 않은 탓에 악명만 남았다.







슈만의 경우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로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엘리제에게서 편지만 오면 루카스가 앞뒤 가리지 않고 본가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근무지 이탈로 징계를 받은 것만 여러 번이었다.







아무리 혼내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지, 엘리제는 잘도 이용해 먹었다. 루카스에게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과시하려는 목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행동 탓에 루카스에게까지 오물이 튄 건 당연했다. 피 한 방울 통하지 않을지언정 후작가에 입적한 이상 둘은 남매였다. 절대 맺어져선 안 되는 관계였다.







루카스가 뭇 영애들의 구애를 모두 거부하면서, 소문의 질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재능이 뛰어나고 성품까지 훌륭한 루카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며 공공연히 말해 온 후작은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서둘러 엘리제의 혼처를 구했다.







그녀의 얼굴도 모르면서 지참금만 보고 달려든 귀족들이 많았으나 뜻밖에도 프로이젠 대공이 경쟁자로 나서며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대공은 지참금의 몇 배나 되는 이익을 후작가에 과시하듯 안겨 줬다.







그렇게 해서 엘리제 클랜튼은 엘리제 프로이젠이 되었다. 황후를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 된 것이다.







‘운이 좋은 여자.’







더러운 소문에도 불구하고 대공비가 되었으니 뭇 영애들의 질투와 험담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 부인을 아끼는 듯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감정이라곤 있을 것 같지도 않던 철혈 대공이 여자 하나에 절절매다니.







그가 보기에 대공비 역시 제 남편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바라보는 눈빛이나 표정, 몸짓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블레이크가 대접한 차를 다 마신 건 정말 대단했다. 전에 한 번 마셔본 바에 의하면 블레이크는 최고급 찻잎으로 쓰레기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쓰고 떫어서 한 모금 마시고 뱉어 버린 기억이 있었다.







‘저걸 다 마시다니. 미각이 없는 건지 남편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건지, 모를 일이군.’







어쨌든 그녀의 말마따나 안 좋은 소문은 덩치를 부풀리기 마련이고, 대공과 결혼하여 이제 루카스에게 영향을 미치지도 않을 테니 슈만으로선 엘리제를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 덕에 블레이크가 조금이나마 사람다워지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네프러스 기사단장인 자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예로 들며 제 소문 또한 그러한 것이라 당당히 말한 엘리제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위협적으로 생겨 먹질 못했다.







도도한 표정이나 자신감 넘치는 눈빛 때문에 깨어 있을 때는 깨닫지 못했는데,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툭 치면 쓰러질 만큼 비리비리해 보였다. 하긴, 그러니 봄날의 병아리처럼 저렇게 세상모르고 졸고 있는 것이리라.







슈만이 다시 서류에 집중하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슈만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에서 놀라, 벌떡 일어났다.







“루카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루카스 클랜튼이었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그가 슈만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엘리제를 봤는지 못 봤는지 루카스는 요즘 그가 늘 짓고 다니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결재해 주십시오. 내일 휴가 좀 내겠습니다.”



“아….”







슈만은 다시 의자에 앉아 그가 건넨 서류철 안의 휴가계를 살폈다.







“휴가 사유가 적혀 있지 않군.”



“적을 수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감정 없는 대꾸가 낯설었다.







“그래, 뭐. 상관없네. 필수 사항은 아니니까.”







확인란에 서명하며 슈만은 루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리 달라질 수 있는지. 괜히 마음이 안 좋았다.







“루카스.”







그래서일까. 슈만은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 싫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저기 자네 여동생이 와 있는데.”







말을 뱉어놓고, 그는 유심히 루카스의 표정을 살폈다.







“봤습니다.”







루카스는 고개를 기울인 채 슈만을 쳐다봤다. 여동생 얘기는 왜 한 건지 묻는 표정이었다. 슈만은 크흠, 헛기침했다.







“인사라도 하려나 하고 말해 봤네.”







루카스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그렇군요.”







슈만에게 결재판을 다시 받아든 루카스가 엘리제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곤 서슴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 조심성 없는 행동에 슈만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몸이 통째로 흔들리나 싶더니 엘리제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들려 올라갔다. 루카스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부스스 미소가 떠올랐다.







“어. 루카스.”







잠이 덜 깬 얼굴로 웅얼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루카스가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여기서 뵙는군요.”



“그러게요.”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떨어져 나간 저들만의 시간을 곁에서 훔쳐보는 미묘한 기분에, 슈만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시 나갔다 올 테니 편히 얘기하게.”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루카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연신 그들을 힐끔거리던 슈만이 나가고 나자 엘리제는 도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알고 온 거예요, 그냥 온 거예요?”



“반반. 네가 여기 있는 건 알았고, 슈만이 자리를 피해줄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작게 접힌 쪽지가 그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서 달랑거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쪽지를 빼서 펼쳐 본 엘리제는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이에요? 조사관으로 짐작되는 인물을 찾았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물을 찾았다.”



“동물이면 어떤….”



“비둘기.”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웬 비둘기가 자꾸 얼쩡대며 창문을 두드려댄다 했더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더군. 미미하게나마 중간지대의 기운이 느껴졌던 것 같다.”



“역시. 그래서 당신, 나한테 비둘기라고 써 보낸 거였어.”







엘리제의 중얼거림에 그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예리하군. 추리력이 대단해.”



“당신이 단순한 거죠. 어쨌든 그래서, 그 비둘기는 지금 어디 있나요?”



“덫을 설치해 두었으니 며칠 내로 잡히겠지.”







루카스의 말에 엘리제의 동공이 와르르 떨렸다.







“덫을 놨다고요? 그거, 괜찮은 거예요?”



“비둘기를 잡으려면 그 수밖에 없잖나.”



“아니, 버둥거리다 다리라도 부러지면.”



“죽지만 않으면 살릴 수 있다. 그 정도 치유술은 요원들에게 기본이지.”







엘리제는 지금쯤 덫에 걸려 떨고 있을, 혹은 조만간 걸려들 가엾은 중간지대 조사관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알겠어요. 그럼 발견하는 대로 연락 주세요.”



“그러지.”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루카스.”







몸을 돌리려는 그를 엘리제가 다급히 붙들었다.







“저 물어볼 게 좀 있는데.”



“그래. 말해.”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제 상관에게 듣기로 악마는 합의된 행위만 한다고 들었거든요. 혹시 예외가 있을 수도 있나요?”







그가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예외?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이지?”



“계약과 상관없이 사람이나 조사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냐는 소리예요.”







생각에 잠긴 채 고민하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드문 일이긴 하지만, 사례는 존재한다.”



“어떤 사례요?”



“잘못된 계약의 여파로 폭주하거나 더 높은 등급의 악마에게 조종당한 예가 과거에 있었다. 혹은 정신계 마법에 당해서 룰을 어기는 사례도 있었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리제는 다시 한번 그에게 질문했다.







“잘못된 계약의 여파라는 건 뭘 의미해요?”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살인의 광기에 시달리던 영혼과 계약을 맺어 그 광기를 흡수하였을 때,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질러 버리는 거지. 그런 경우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악마들도 아무와 계약하진 않는다.”







엘리제는 곰곰이 생각했다. 시기상 렉스의 마지막 계약자는 카인 리베르토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그놈이 미친놈이라 악마도 미친 걸까.







‘걔가 마지막에 미치긴 했어도 성욕이 강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무관심한 편이었지. 연애도 안 하지 않았나?’







물론 그녀가 모르는 카인의 일면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아직도 엘리제는 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죽이고 저도 죽는 선택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엘리제는 루카스가 말한 사례 중 다른 것을 떠올렸다.







“그럼 제가 가진 특수한 힘 때문에 악마가 이성을 잃고 덤빌 수도 있는 건가요?”



“네가 무슨 힘을 가졌기에?”



“그건 저도 몰라요. 제 상관이 말해주는 걸 깜빡했거든요. 하지만 뭔가는 있을 테니까요.”







루카스는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중간지대 조사관의 특수능력을 말하는 모양이군.”



“첫 만남 때도 그렇고, 제게 무슨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자꾸 덤비더라고요.”



“달콤한 냄새? 악마가 그런 얘길 했다고?”



“네.”



“그래서, 놈이 널 잡아먹으려 했나?”







엘리제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봤다.







“식욕이 아니라 성욕에 대해 말하는 거잖아요.”







그는 작게 헛기침했다.







“나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다.”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놈이 네게서 나는 ‘특수한 냄새’ 때문에 규칙을 깨기까지 했다는 말이군.”



“맞아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책상을 돌아 그녀 앞으로 왔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몸을 기울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몇 가지 꽃향기가 체취에 섞여 나는군.”







그러고서도 계속 몸 이곳저곳 냄새를 맡는 꼴이 마치 개 같았다.







“…저기, 루카스. 좀 불편한데.”



“불편하더라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악마가 규칙을 깨는 건 보통 일이 아니야. 놈이 폭주하면 네 신변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기에 엘리제는 얌전히 냄새를 맡도록 내버려 두었다. 살짝 기대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자신에게도 메리의 괴력 못지않은 특수한 능력이 있음이 이제 곧 밝혀질지도 모른다.







“살짝 달짝지근한 냄새가 어디선가 나는 것 같기도 한데.”



“응? 그래요?”







엘리제의 의자 앞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그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선 그녀의 무릎 안쪽을 킁킁거릴 때였다. 우다다다,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싶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단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