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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네프러스의 기사든 시종이든 안내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엘리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혼자 마차로 가야 하나?’
행동 불능 상태가 된 렉스를 잠시 떠올린 엘리제는 일단 걸음을 옮겼다.
‘이쪽이었던가?’
왔던 길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아서 엘리제는 멈춰 섰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해야 했다. 대충 떠올려 보아도 그렉과 동행했던 길은 몹시 복잡했다.
여전히 길은 낯설고 다리까지 슬슬 아파져, 지도라도 볼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 엘리제의 눈앞엔 텅 빈 복도만이 펼쳐져 있었다.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리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깐 느꼈던 인기척이 신경 쓰여 엘리제는 반지를 사용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리 사용인이 적다고 한들 이 넓은 궁에 기사 한 사람, 시종 하나 보이지 않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무 조용히들 다녀서 그녀가 보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
‘길이야 곧 나오겠지.’
느긋하게 가기로 마음먹은 엘리제는 복도에 걸린 그림이나 조각들을 구경하며 내키는 대로 걸었다. 다시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재빨리 돌아보았으나 이번에도 보이는 게 없었다.
엘리제는 왠지 찜찜함을 느꼈다.
‘그렉이면 당연히 나를 불러 세웠을 텐데. 시종이라도 마찬가지고.’
사용인이었다면 하다못해 무엇이 필요한지라도 물어봤을 것이다.
게다가 인기척은 분명 아까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상대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거리를 좁혀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떳떳했다면 숨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엘리제는 좀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마차로 가면 적어도 마부는 있을 테니까.’
팔찌에 담긴 마법의 힘을 아까 괜히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 방 먹여준 건 속 시원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운이 좋았다. 낯설지 않은 회랑이 저 앞에 나타난 것이다. 회랑만 빠져나가면 마차가 있는 정원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
엘리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회랑으로 접어들려 할 때였다. 갑작스레 바로 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놀란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의도가 좋은 것이라면 이렇게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할 필요가 없다.
‘일단은 거리를 벌려야 해.’
엘리제는 입술을 꾹 물었다. 드레스 끝자락에 뭔가가 닿았다 싶은 순간, 엘리제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아!”
외마디 소리였지만, 엘리제는 그것이 남자의 목소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구지?’
일단 거리를 벌린 후 뒤를 돌아보려던 엘리제의 시야가 갑작스레 캄캄해졌다. 회랑 밖에서 뛰어든 누군가의 가슴팍이 바로 앞에 있었다. 부딪혔다고 생각하는 순간, 엘리제는 그의 팔에 붙들리며 포옥 안겨 버렸다.
익숙한 체취였다. 단단한 가슴팍과 강한 팔 힘 또한 낯설지 않았다. 한순간에 긴장이 풀렸다.
“블레이크…!”
엘리제는 반갑게 외치며 저를 안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했던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늘한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2황자 전하.”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뭐? 2황자?’
2황자라는 말에 돌아보려 하는 그녀를 블레이크는 놔주지 않고 더욱 꽉 끌어안았다.
“프로이젠 대공.”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결혼식 때도 뵈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요.”
블레이크의 차가운 대답에 2황자는 곤란한 듯 웃었다.
“내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잠깐의 침묵 후 그가 대답했다.
“길을 헤매시는 것 같기에 안내해 드리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는 엘리제도 알고 2황자 본인도 아는 어색한 변명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엘리제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답답할 텐데도 그녀는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렇군요. 친절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고개를 숙여 보인 블레이크가 그제야 그녀를 품에서 놔주었다.
“가지요, 부인.”
“아….”
걸음을 떼기 전, 엘리제는 2황자를 돌아보았다. <타락한 연인>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에릭 러셀을 이렇게 갑작스레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우울한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뭐야? 저건 또.’
엘리제는 고개만 살짝 숙여 묵례한 후 블레이크와 함께 회랑을 벗어났다. 뭔가 찜찜했지만, 지금은 2황자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황실의 마차가 서 있는 정원 입구로 향하지 않고 다른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제가 입궁한 건 어떻게 아셨어요?”
“…….”
“화났어요?”
“아니. 아닙니다.”
단호하게 대답하고선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많이 놀랐습니다.”
“왜요?”
“부인이 홀로 입궁하였다 해서요. 내 잘못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걸 예상해야 했는데.”
“별일도 아니었는걸요.”
블레이크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둘이 아니어서, 뭐부터 말해야 할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엘리제는 그가 곤란한 걸 물어보기 전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렉스를 기절시키고 나와 버린 지금, 황제의 소환에 관해 물으면 답할 말이 없었다.
“회의는요? 끝난 거예요? 이제 돌아가도 되는 건가요?”
다행히 그는 그녀의 질문에 열심히 답해 주었다.
“아직 처리할 일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일을 마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습니까? 괜찮다면, 같이 돌아갔으면 합니다.”
엘리제는 그에게 팔짱을 끼곤 살짝 몸을 기댔다.
“물론이죠. 당신이 일하는 모습도 궁금해요.”
“그렇습니까.”
내내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그제야 부드럽게 풀어졌다.
“황궁이 워낙 크고 화려해서 겁이 났는데, 당신과 이렇게 걷고 있으니 아무렇지 않네요.”
“겁낼 것 없습니다. 그 누구도 대공비인 그대를 함부로 대할 수 없으니까요.”
정말 그럴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곁에 있는 한 안전하리란 것만은 진실이었다.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요, 블레이크.”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연한 일입니다.”
옅게 드리운 미소와 다정한 눈빛이 기꺼워, 엘리제는 생글생글 웃었다. 회랑에서 그의 품에 안긴 순간 느꼈던 안도감과 반가움을 잊기 힘들 것 같았다.
***
블레이크가 엘리제를 데려간 건물은 꽤나 실용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황궁 안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관청과 비슷해 보였다.
건물에 들어서면서부터 엘리제는 많은 사람과 마주쳤다.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비님!”
그녀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인사하곤 다들 바쁘게 가 버렸다.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블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큰일이 있나 봐요.”
“행정관들은 원래 다 저렇습니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블레이크는 1층 중앙 회의실 곁에 위치한 방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블레이크가 문을 열자마자, 벽 쪽 책상을 차지하고 있던 잿빛 머리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블레이크! 회의 도중 그렇게 나가면 대체….”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블레이크를 따라 들어온 엘리제를 본 탓이었다.
“클랜튼….”
혼잣말에 가까운 그의 중얼거림은 엘리제의 귀에도 잘 들렸다.
“인사해, 슈만. 내 아내야.”
얼핏 친절하게 들리는, 그러나 경고에 가까운 블레이크의 말에 그는 책상을 돌아 나왔다. 엘리제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곤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슈만 크롬벨입니다.”
엘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크롬벨 공작가의 장남이자 그 스스로의 전공으로 백작위를 갖고 있는 슈만 크롬벨. 그는 제국의 검, 네프러스의 기사단장이었다. <타락한 연인> 원작에서도 나름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라, 엘리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역시 황궁에 오니까 중요한 사람을 많이 만나네.’
“엘리제 프로이젠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엘리제는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이 냉소적임을 금세 눈치챘다. 많이 들었다는 말들이 다 좋지 못한 내용인 모양이다.
그러나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다. 열성 팬이 있으면 열성 안티도 있는 법이다. 엘리제는 미움받는 걸 즐기진 않아도 많이 익숙해진 편이었다.
“저도 단장님에 대한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렇…습니까?”
“네.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시길, 네프러스 기사단의 명성은 모두 단장님 덕분이라고 하던데요.”
눈을 끔뻑이는 그를 보며 엘리제는 생긋 미소 지었다.
“훈련 때 그렇게 인정사정이 없으시다고.”
“클랜튼 경이 그런 얘길, 누이에게 했군요.”
아하하, 웃으면서도 루카스를 향해 이를 가는 게 느껴졌다. <타락한 연인>에서 네프러스 기사단원들이 투덜거리는 얘길 가져다 쓴 거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정말 푸른 피가 흐를 거라 믿은 적은 없답니다. 소문은 언제나 안 좋은 쪽으로 과장되기 마련이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건 어리석은 일이죠.”
슈만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풀리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블레이크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부인이 슈만에게 관심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갑자기 방 안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것 같았다. 기분 탓만은 아닌지, 슈만의 동공이 와르르 흔들렸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나.”
“‘그런 얘기’란 게 뭘 의미하는 거지?”
블레이크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어두웠다. 엘리제마저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블레이크, 일단 회의에 들어가. 논의는 마무리 지어야지.”
“엘리제를 혼자 둘 순 없다.”
“어차피 같이 들어갈 수 없는 거 알면서 왜 그래?”
“그렇다면 나도 안 들어가면 그만이다.”
퉁명스럽게 대꾸한 블레이크가 창가 쪽에 자리한 책상으로 엘리제를 데려갔다. 그는 본래 자신의 것인 듯한 크고 안락한 의자에 그녀를 앉히고, 직접 차를 준비해 내왔다.
“간식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이거라도 마셔요.”
엘리제는 얌전히 앉아 그가 가져다준 차를 마셨다. 일이고 뭐고 그녀만 쳐다보고 있는 블레이크의 모습에 슈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저, 블레이크.”
엘리제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회의가 안 끝나면 돌아가지 못하는 거 아닌가요?”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결론은 나게 되어 있으니.”
답하는 목소리에서 약간의 망설임을 느낀 엘리제가 그의 손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그러지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 가만히 앉아 당신을 기다릴게요. 회의가 빨리 끝나면 데이트하러 가요.”
“데이트….”
“네, 데이트요.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을 먹어요. 광장도 구경하고.”
제 손등을 토닥이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새파란 눈동자에 옅은 흥분이 자리했다.
“알겠습니다. 금방 다녀오지요.”
슈만이 보고 있든 말든 엘리제의 뺨에 입을 맞춘 그가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블레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리제는 방문이 닫히고서야 미소를 거두었다.
기다리는 건 따분한 일이다. 게다가 같은 방 안에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조연이 하나 있으니 아무렇게나 늘어질 수도 없었다.
엘리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블레이크가 타준 차를 조금씩 아껴 마셨다. 창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로워 어쩐지 나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