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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는 그 뻔뻔스러운 낯짝을 손바닥으로 쭈욱 밀어냈다.







“떨어져.”







아쉽다는 듯 한 걸음 물러나면서도 그는 제 얼굴에 닿은 그녀의 손바닥을 날름 혀로 핥았다. 그러고선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잘 지냈어? 너는 여전히 예쁘네.”







주황빛이 감도는 금색 눈이 호선을 그리며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더 예뻐진 것 같기도 하고. 샘나게 말이야.”



“…대체 이게 다 뭐야? 당신, 아무리 악마라지만 이래도 돼?”







추궁에 가까운 그녀의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세계에 은근 허점이 많더라고. 딱히 내 힘을 사용한 것도 아니야.”







짐작은 했지만, 이곳 역시 프로이젠 영지의 환상호수와 비슷한 공간인 모양이다. 엘리제는 미심쩍은 표정을 가장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다시 또 엉겨 붙는 악마 놈을 밀어내며 엘리제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단 좀 앉아야 할 것 같았다. 황제를 알현한답시고 공들여 꾸몄더니 드레스와 장신구들이 너무 무거웠다.







마침 안쪽 공간에는 편안해 보이는 소파와 테이블이 여럿 있었다. 엘리제는 그중 비어 있는 곳으로 가 소파에 털썩 기대앉았다.







눈썹을 한번 쓱 올렸다 내릴 뿐, 렉스는 별말 없이 그녀 곁으로 와 앉았다.







“뭐 마실래?”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테이블 위에 위스키병이 주르륵 나타났다. 그가 그중 하나를 골라 코피타 글라스 두 개를 채울 때까지 엘리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에게 잔을 건넨 그가 남은 하나를 들고 맑은 호박빛 액체를 제 입에 털어 넣었다.







“마셔 봐.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그러나 엘리제는 다시 또 제 잔을 치우는 렉스를 힐끔 쳐다만 볼 뿐 술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설마 내가 독이라도 탔을까 봐?”



“취해서 돌아갈 순 없잖아.”



“여기서 암만 취해 봤자 밖에 나가면 말짱해지니까 걱정하지 마.”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란 건 엘리제도 알았다. 블레이크가 망가뜨린 드레스도 원래대로 돌아갔으니까. 악마는 금방 들통 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 위스키 말고 와인 가져와. 좋은 거 많을 거 아냐.”



“와인이 취향이었어?”







뜻밖이라는 듯 렉스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다시 또 손가락을 튕겼다. 위스키병 옆으로 와인병이 좌르륵 생겨났다.







“흐음. 어떤 게 좋으려나.”







그가 신중한 표정으로 와인을 고르는 사이 엘리제는 렉스와 제 잔을 슬쩍 바꿔 놓았다.







“이게 괜찮겠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글라스를 채웠다.







“당신.”







그가 건넨 잔을 받아 들며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왜 이래?”



“응? 뭐가?”



“굳이 이런 공간을 만들어서 나를 초대한 이유가 뭐야?”







위스키 잔을 들어 다시 톡 입에 털어 넣은 그가 편안히 몸을 젖혔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당신이 훔친 기억 속에 그런 정보도 있었나 보지?”







엘리제의 퉁명스러운 말에 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만큼 그의 눈이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엘리제, 우리 쪽으로 올래?”



“뭐?”







그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었다.







“나한테 와라. 정말 잘해 줄게.”







엘리제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설마 스카우트 제의야?”



“음. 그런 셈인가?”







아직 <타락한 연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엘리제는 그의 꿍꿍이를 캐묻는 대신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혹할 만한 말을 해야지. 지옥이 뭐 좋다고.”



“쟤들 봐. 즐거워 보이지 않아?”







엘리제는 황홀경에 빠진 얼굴로 뒤엉켜 있는 이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저렇게 흥청망청 노는 것도 다 관광 코스라며.”



“관광 코스에서도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지. 특히 너 같이 유명하고 예쁜 여자라면 홍보 효과가 더 클 테니까. 최고급 술, 담배, 약, 남자 모두 공짜! 어때, 혹하지 않아?”







엘리제는 코웃음을 쳤다.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올 거라고 크게 기대한 건 아니지만, 역시나였다. 렉스는 지하세계에 대한 정보를 그 이상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굳이 그와 한가하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정말 날 스카우트하겠다고 지금 이렇게 불러낸 건 아닐 거 아냐. 본론부터 말하지 그래.”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시는 렉스에게 엘리제가 자신의 와인 잔을 넘겨주었다. 저도 모르게 한 모금 마신 렉스가 눈을 도르륵 굴리며 그녀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혹시 네 가짜 남편에게 ‘보물찾기’에 대해 들었어?”



“그 친목 시합 말이야? 당신이 멋대로 룰을 바꿨다는.”



“맞아.”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엘리제는 빈 코피타 글라스에 위스키를 채워 렉스에게 건넸다. 본래 제 것이었던 바로 그 잔이었다.







“근데 그거 왜 바꾼 거야? 딱히 당신한테 좋을 것도 없어 보이던데.”



“이상하잖아. 여자들은 구경만 하라니. 이 세계는 너무 고리타분해.”



“흐음. 그건 좀 그렇긴 하지.”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이 반짝 뜨였다.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걸 누가 좋아하겠어? 얻는 것도 없이.”



“그렇지! 나는 여성들의 자유와 행복을 최우선으로 하는 악마라고.”



“당신은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거겠지.”







엘리제의 비아냥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재미있는 게 좋아. 따분한 건 질색이야. 그래서 모두에게 동기부여를 해준 것뿐이야. 덕분에 모두가 신났다고.”



“블레이크는 싫어하던데.”



“맞아! 그 꽉 막힌 놈!”







그가 내뱉은 별것도 아닌 남편 욕에 괜히 기분이 나빴지만, 엘리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랑 그 시합이 무슨 상관인데?”



“블레이크가 중도 포기해도 된다고 말했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시시하잖아. 그래서 네게 제안을 하나 하려고.”







입술을 혀로 적시다가 그는 제 손에 들린 술잔을 뒤늦게 발견하고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뭐, 내기라도 하자는 거야?”



“그래.”



“걸 만한 건 있고?”



“네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합이 끝날 때까지 내게 붙잡히지 않으면 중간지대 조사관을 내어줄게. 한 놈, 어딨는지 알거든.”







엘리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악마잖아. 작정하면 나 하나 잡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악마의 권능은 쓰지 않을 거야. 못 믿겠으면 계약서를 써도 좋아.”



“내가 잡히면?”



“그럼 내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하는 거지.”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녀에게 굉장히 좋은 조건의 내기였다. 어차피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하룻밤 렉스의 파트너가 되는 것뿐이다. 블레이크나 펄쩍 뛸 일이지 그녀로선 대수롭지 않았다.







그러나 악마와의 내기란 신중해야 하는 법임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엘리제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글쎄. 별론데.”



“별로라니? 네 임무와 관련된 거잖아. 엄청난 메리트 아니야?”



“조사관이야 대충 한둘만 구하고 생색내면 돼. 내가 굳이 걔들 구하느라 무리할 필요 뭐 있어?”







렉스는 얼빠진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게다가 실패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하나도 없잖아.”



“내기에 지면 아무것도 못 얻는 게 당연하지.”



“이 악마가 날 속여 먹으려고. 시합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대한 보상이 따로 있어야지.”







엘리제의 말에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렉스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넌 역시 내 동료가 되기에 충분해.”



“칭찬으로 들을게.”



“그래서 넌 뭘 원하는데?”



“별로 큰 건 아냐. 정보 하나만 넘겨.”



“뭐에 대한?”



“그건 그때 가서 말할게. 네가 모르는 거나 발설할 수 없는 정보라면 다른 정보로 대체해서 받아도 돼.”







미리 정보를 정해둘 필요는 없었다. 시합이 끝날 때까지 자력으로든 우연히든 정보는 계속해서 들어올 테니까. 그때 가서 가장 필요한 걸 말하는 게 최선이다.







그녀의 눈빛과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







그가 허공에 손을 뻗자 빳빳한 종이 한 장과 펜이 허공에 나타났다. 평범한 물건들처럼 보여도 합의된 계약에 대해 구속력을 가진 악마의 계약서일 터였다.







엘리제는 그가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테이블 위의 술병들을 쭉 살폈다. 힐끔 그녀를 쳐다보고선 그가 말했다.







“마셔도 돼. 취해 봤자 나가면 말짱해진다니까?”



“그건 그렇다 쳐도 좀 찜찜해서.”



“뭐가?”



“당신, 거기가 섰어.”







엘리제의 말에 렉스가 엉거주춤 다리를 오므렸다.







“난 원래 잘 그래.”



“얼굴도 시뻘건데? 헉헉거리기까지 하고.”







꿋꿋하게 계약서 작성을 마친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네가 잔 바꿨지!”



“응.”



“어떻게 그런 치졸한 짓을 할 수 있어?”







엘리제는 뭐가 대수냐는 듯 웃었다.







“독 안 탔다며?”



“독은 아니야. 그냥 기분 좋게 해주는 약이지.”



“그럼 됐네. 기분 좋아지는 약 먹어서 참 행복하겠어.”







심드렁하게 대꾸하고서 엘리제는 그에게 건네받은 계약서를 꼼꼼히 훑었다.







“여기, 파트너의 정의에 대해서도 적어.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정확히 명시해야지. 그리고 악마의 권능만 제하지 말고, 황태자의 권력도 제한해야 해. 기사단을 당신 멋대로 부리면 공정하지 못하니까.”



“…….”



“자, 어서 고쳐.”







렉스는 불퉁한 얼굴로 그녀가 말한 내용을 계약서에 추가했다.







“넌 정말 우리 쪽으로 와야 해.”







투덜거리고는 있어도 그는 그리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정도는 그로서도 예상한 것이다. 멍청하게 걸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지극히 평범한 사기꾼의 수법이었다.







부지런히 펜을 움직이는 그를 바라보던 엘리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있잖아. 만약에 내가 정말 이적한다고 치면.”



“응? 정말? 생각 있는 거야?”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카인 리베르토, 나한테 줄 수 있어?”







이어지는 엘리제의 말에 그는 멈칫했다.







“그놈, 싫다고 하지 않았어?”



“죽일 놈이지. 그러니까 내 밑에 데려와서 두고두고 괴롭히게.”



“…너, 좀 무섭다.”



“가능한지나 말해 봐.”







턱을 괴고 한참이나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그건 아직 확실하게 말해줄 수 없어.”



“아직 네 것이 아니구나? 걔랑도 내기 중이야?”



“…….”







엘리제는 그의 말과 행동,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뭐, 좋아. 결과는 언제 알 수 있는데? 그놈한테 복수하는 게 내겐 가장 중요한 관심사란 말이야.”







물론 엘리제의 최대 관심사는 안락하고 행복한 사후생활이지만, 일단은 악마를 속일 필요가 있었다. ‘복수’같이 부정적인 감정을 그들이 기꺼워할 건 당연했다.







“<타락한 연인>이 끝나기 전까진 알려줄게.”







렉스의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천천히 생각해 볼게. 안 그래도 중간지대 애들이 좀 쩨쩨한 거 아닌가 생각 중이었거든. 보상이 겨우 휴가 좀 보내 주는 거라니.”







그 ‘특별한 휴가’의 가치를 모르는 악마로서는 쉽게 믿을 만한 말이었다.







“맞아. 걔들 부려먹긴 엄청 부려먹고 열정 페이 운운한다니까.”



“세계가 어찌 되든 나랑 뭔 상관이라고.”



“역시 네 이기심은 정말 훌륭해.”



“칭찬 고마워. 당신도 훌륭한 색, 어…. 악마 같아.”







엘리제는 생긋 웃어 보였다.







“계약서 샘플 같은 거 있으면 나중에 보여줘.”



“알았어. 준비해 둘게.”







나름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끝낸 엘리제가 소파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렉스가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어? 설마 그냥 가려고?”



“왜? 더 할 말 있어?”



“네가 가 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그는 울상을 지으며 제 아래를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