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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내게 서신을?”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겉봉부터 화려한 봉투에서 서신을 꺼내 펼치는 동안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내용을 모두 확인할 때까지 엘리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서신을 도로 접어 봉투에 넣고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슈레트 경, 폐하의 뜻은 잘 알겠으니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주게.”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는 엘리제를 이채 띤 눈으로 바라보던 그렉은 그녀에게 묵례하곤 응접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유지되던 침묵을 깨뜨린 건 메리였다.







“무슨 일이래요?”



“메리. 그렇게 가볍게 여쭐 일이 아닙니다.”







눈을 반짝거리며 빛내는 메리를 케이트가 엄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시녀장님도 궁금하면서.”







메리의 말대로 시녀장 케이트는 물론 시종들 대신 직접 다과를 내온 멜릭 역시 엘리제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들을 위해 친절히 서신의 내용을 말해주었다.







“폐하께서 나를 궁에 부르셨네.”







모두가 깜짝 놀랐다.







“황제 폐하께서 말입니까?”







멜릭이 황급히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래. 결혼식 때 못 봤으니 사적인 자리에서 먼저 한 번 보길 원하신다는군. 마차를 보냈으니 타고 오라 하시네.”



“하필 주군께서 부재중이신데….”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케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절할 명분이 없으니 가실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서 처음부터 용건을 말해주지 않은 거군요.”







거동을 못 할 정도로 병세가 심하지 않고서야 황제의 소환을 거절할 수 없다. 이미 건재한 모습을 그렉에게 보였으니 핑계 대며 안 갈 수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들 말게. 폐하를 뵙는 건 영광스러운 일 아닌가.”







물론 엘리제 역시 황제의 갑작스러운 소환이 수상했다. 블레이크가 정무 회의에 참석하느라 부재중이라는 걸 황제가 모를 리 없다. 엘리제 홀로 있을 때를 노려 궁에 부른 것이다.







‘왜? 무슨 목적으로?’







그래도 제도 인물들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하는 엘리제로서 황제와 대면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이왕 가야 하는 거, 엘리제는 기분 좋게 가리라 마음먹었다.







“주군께 일단 사람을 보내놓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거 없네. 정무 회의가 이제 막 시작되었을 텐데, 심려를 끼칠 필요 없어.”







만약 블레이크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황제가 이런 수를 썼다면, 알리면 안 된다. 평소의 언행을 생각해볼 때 그녀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블레이크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잘만 하면 황궁을 돌아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소식이 끊긴 환상 컨트롤타워의 조사관 중 ‘황궁의 지나가는 시종13’으로 빙의했던 인물이 있다. 그에 대해 단서를 찾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블레이크가 곁에 있으면 반지를 활성화할 수 없으니 혼자 있는 편이 나았다.







“어쨌든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 같아.”



“네, 제가 도울게요.”







케이트가 서둘러 시녀들을 불러 모았다. 방으로 돌아온 엘리제는 케이트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입궁할 채비를 했다. 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블레이크가 남긴 흔적들이 있어 선택할 수 있는 드레스가 한정되었다.







“엘리제 님! 모기 물리셨나 봐요. 세상에 몇 방을, 읍…!”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리제의 목덜미를 가리키는 메리를 시녀 하나가 드레스룸에서 끌고 나갔다.







“송구합니다, 비전하.”



“시녀장이 송구할 게 뭐 있나.”



“시녀들의 교육은 마땅히 저의 일입니다.”



“쟤가 교육한다고 될 애가 아님은 내가 더 잘 아네. 내버려 두게. 자네마저 화병 나면 큰일이니까.”







엘리제의 말에 케이트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거울을 통해 보니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웃는 거야, 우는 거야.’







늘 담담한 모습만 보이는 케이트인지라 통 모를 노릇이었다.







유능한 케이트와 시녀들 덕에 엘리제는 수월히 치장을 마쳤다.







저택 앞에는 황실에서 보내온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미리 허가받지 않은 이들이 입궁하려면 절차가 복잡해지기에 엘리제는 아무도 대동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시녀 한 명 데려가는 것도 안 된다니 야박하군.”



“송구합니다. 불편함 없도록 제가 신경 써 모시겠습니다.”



“경의 뭘 믿고.”







투덜거리면서도 엘리제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그렉이 그녀를 따라 마차에 오를 것처럼 보이자 엘리제는 선수 쳐 문을 닫아 버렸다. 심기 불편한 기색을 풀풀 풍기는 그녀 탓에 그렉은 어쩔 수 없이 마부석에 올랐다.







‘기껏 황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속내를 숨기려 불퉁한 표정을 유지하며 엘리제는 창밖을 힐끔 쳐다보았다. 케이트와 멜릭, 메리는 물론 기사들까지 염려 가득한 얼굴로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들 저래.’







초대받아 가는데 뭐 그리 위험한 일이 있겠나 싶었던 엘리제는 울상을 짓고 있는 그들 때문에 괜히 불안해졌다.







‘설마 마음에 안 든다고 아무나 잡아 죽이는 폭군 황제인 건 아니겠지?’







<타락한 연인>에 황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노환으로 자주 몸져눕는 황제 대신 황태자가 정무 회의를 주관한다는 정보만 몇 번 언급될 뿐이다.







‘아니면 폐병 환자라든지.’







쿨럭대며 바이러스를 살포하면 피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엘리제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마차는 서서히 움직여 프로이젠 저택을 벗어났다.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여 있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서 주군께 소식을 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주군께 알리지 말라고 비전하께서 당부하셨잖소.”



“홀로 입궁하신 걸 알리지 않았다간 저희 다 죽습니다.”



“비전하께 항명해도 죽는 건 마찬가지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멜릭과 케이트 또한 기사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속만 타들어 갈 따름이었다.







“처음부터 아프시다고 둘러댈 걸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차라리 황명을 거역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결혼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들 모두 그들의 주군이 대공비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냉정을 잃지 않던 블레이크가 엘리제의 일거수일투족에 미친놈처럼 웃고 우는 걸 바로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내가 입궁하겠소.”







멜릭이 결연히 말했다. 프로이젠 대공의 보좌관으로서 평소 블레이크 대신 정무 회의에 참석했던 그이기에 황궁 출입이 까다롭지 않았다.







“가서 뭐라고 하시게요?”



“먼저 고하지만 않으면 항명이라 할 수 없지 않겠소? 분명 주군께선 비전하의 안부부터 물으실 테니 그때 말씀드리면 되오.”



“아…!”







모두의 존경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멜릭은 저택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후, 정복을 갖춰 입고 황궁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은 몹시도 비장했다.











***











커튼을 조금만 걷어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며, 엘리제는 틈틈이 지도를 확인했다. 희뿌옇게 처리되었던 곳에 건물의 윤곽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차가 지나온 길을 따라 검은 점들이 몇 개 표시되었다.







마부석에 앉은 그렉 슈레트는 파란 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황궁 기사로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이름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어느덧 마차는 황궁의 심처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녀 외의 노란색 점이 지도에 표시되는 일은 없었다.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야 없지.’







그리 생각하며 슬슬 디스플레이를 종료하려 할 때였다, 갑작스레 알림창 하나가 지도 위에 떠올랐다.







『새로운 지역을 발견했습니다. 지도에 업데이트하시겠습니까?』







‘응? 설마 여기도?’







마차는 속도를 현저히 줄인 채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마도 앞에 보이는 백색 대리석 건물이 황제가 기거하는 궁일 것이다. <타락한 연인>의 장면 중 황제궁을 배경으로 한 곳은 없으니, 기존의 지도에 없을 법도 했다.







『새로운 지역, ‘황궁 속 미궁’을(를) 지도에 업데이트했습니다.』







‘황궁 속 미궁? 뭔가 굉장히 수상한 이름인데.’







엘리제가 확인 버튼을 누르고 업데이트된 지도를 확인하려 할 때였다. 지도 위로 다시금 알림창이 떠올랐다.







『중지된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재개하시겠습니까?』







깜짝 놀란 엘리제는 재빨리 수락 버튼을 눌렀다. 80퍼센트가량 차 있는 게이지 바가 화면에 뜨더니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환상호수에서보다 훨씬 느린 속도였다.







엘리제는 초조한 심정으로 창밖과 화면을 번갈아 쳐다봤다. 마차는 이미 궁 바로 앞까지 다다라 서서히 멈춰 서고 있었다.







결국 5퍼센트가량도 못 채우고 엘리제는 패널 디스플레이를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직후, 노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대공비님,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지요.”







그렉이 내민 팔을 붙잡고 엘리제는 마차에서 내렸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백색 궁이 그녀 앞에 있었다. 두리번거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엘리제는 그렉을 따라 궁의 회랑으로 접어들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궁임에도 시종이나 시녀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공간 전체가 적막했다. 바람 소리, 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홀로 동떨어진 세상인 양.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한참이나 걸어, 그렉은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역시나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들어가시지요.”



“폐하께 따로 고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렉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듣지 못하십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들어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입을 닫아버린 탓에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워 보이는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가 닫혔다. 아니, 엘리제는 열고 들어가기만 했을 뿐 닫히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넋이 빠진 탓이었다.







‘뭐야 이게.’







크롭티에 핫팬츠를 입고 그녀 앞을 지나가는 여자. 춤을 추는 건지 섹스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몸을 흔들어대는 이들. 쿵쿵거리는 음악과 어둑한 조명.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녀에게 익숙한, 현실 세계 클럽의 전경이었다.







판타지가 많이 가미되긴 했어도 중세유럽 비슷한 배경의 황궁 한복판에서 갑자기 이런 광경을 맞닥뜨리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와, 엘리제.”







엘리제는 제 허리에 팔을 두르며 몸을 붙여오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예감했지만, 그녀를 부른 건 황제가 아니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락도 없이 그녀의 머리에 쪽, 입을 맞추고선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왜 여기 있긴. 내가 부른 거야, 엘리제.”







황태자의 몸을 차지한 악마, 렉스 러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