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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 혹은 클로드. 둘 중 하나란 말이지.’







회색 점이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나 일단은 힌트를 얻은 셈이었다.







클로드와 바트의 협공을 받아내던 블레이크가 거세게 검을 휘둘러 둘을 제게서 떼어놓았다. 바트와 클로드 역시 문이 열린 걸 알아채고 공세를 멈췄다.







잠깐이지만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검에 선명하게 서린 푸른 빛을 봤다. 엘리제는 안도하며 방긋 웃었다.







‘역시 우리 남편! 마스터구나!’







블레이크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제는 두리번거리며 연무장을 구경했다.







바닥과 벽, 천장에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만큼 복잡한 마법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붉은 빛을 흘리는 주먹만 한 돌도 백여 개에 달했는데, 엘리제는 얼마간의 경험으로 그것이 마나석임을 알아보았다.







엘리제의 시선이 연무장 한쪽 벽면을 향했다. 그곳엔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이 전시돼 있었다.







‘오. 무기다.’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천재의 자질을 드러내려면 일단 무기부터 있어야 하는 게 자명했다.







엘리제는 빠르게 표정관리를 시작했다. 슬픔과 두려움, 섭섭한 감정을 동시에 담았다. 그러곤 제 앞에 당도한 블레이크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화가 난 표정으로 뭐라 입을 열려던 블레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도로 입을 닫았다. 어정쩡하게 굳어 있는 그를 올려다보며 엘리제가 울먹였다.







“홀로 두지 않겠다면서요. 어떻게 말도 없이….”







순 억지였지만, 블레이크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엘리제, 난 그게 아니라….”



“알아요, 이제 더는 제가 소중하지 않은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너무 크게, 연무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외친 탓에 엘리제는 물론 기사들까지 모두 깜짝 놀랐다. 겁먹은 눈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의 모습에 블레이크는 더욱 당황하여 횡설수설했다.







“난 그저 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습니다. 꼭 이겨야 할 것 같아서…. 놀랐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모두 다 내 잘못입니다.”







그녀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무서웠는지 그는 엘리제를 꽉 끌어안고 몇 번이고 사과했다.







“다시는 말없이 아무 데도 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오해하지 말아요. 내겐 그대가 가장 소중합니다.”



“…정말이요?”



“그렇습니다.”



“저기 저 번쩍거리는 값진 무기들보다도?”



“저런 건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모두 하찮을 뿐입니다.”







그녀는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웅얼거렸다.







“말로는 뭔들.”



“원한다면 저것들을 다 녹여 없애겠습니다.”







하찮다는 블레이크의 말과 달리 꽤 값지고 귀한 무기들인 모양이다. 블레이크 곁에 서 있던 클로드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물론 부부의 대화에 끼어들어 그러지 말라고 말릴 용기는 없었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그런 건 원치 않아요.”



“그럼….”



“약속에 대한 증표로, 저것 중 하나만 제게 선물해 주세요.”







이 정도면 아주 하찮은 부탁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저 많은 무기 중 하나 선물하는 것이 뭐 대수겠는가.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주저했다.







“저기 있는 건 장식용 무기가 아닙니다. 몹시 위험해요.”







어젯밤 검술 배우는 걸 반대했던 것과 비슷한 태도였다.







‘윽. 이러면 곤란한데. 어떡하지.’







엘리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조르거나 설득하는 건 통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과보호하는 부모가 어떠한지를 생각하면 쉬웠다.







그러나 그들과 블레이크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그건 엘리제가 틀어쥔 블레이크의 약점과도 같았다.







[부인이 나를 미워하게 될 것이 두려워, 나는 아마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겁니다.]







환상 호수에서 그는 분명 그리 말했다. 약점을 알았으면 이용해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엘리제는 그의 고집을 꺾으려 애쓰는 대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할 수 없죠.”







그러곤 저를 감싼 그의 팔을 힘없이 떼어냈다.







“제가 너무 들떴었나 봐요.”



“엘리제.”



“갈게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챈 클로드가 재빨리 블레이크에게 다가와 말했다.







“주군, 그리 위험하지 않은 종류의 무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앨런 역시 그의 말에 수긍했다.







“맞습니다. 호신용 단검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조바심을 내며 블레이크를 채근하는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문을 향해 걷던 엘리제는 쫑긋 귀를 세웠다.







‘뭐야? 왜들 저렇게 나서? 기특하긴 한데….’







급기야 클로드는 후다닥 그녀에게 뛰어와 앞을 가로막기까지 했다.







“비전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주군께선 그런 것이 아니라….”







엘리제는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얜가? 또 하나의 회색 점?’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별나게 행동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엘리제의 시선에 클로드가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게 나서서 송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비켜나지 않고 꿋꿋이 그녀 앞을 가로막은 채 서 있었다.







‘흐음.’







흑발에 벽안,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기사단장의 외모는 그럭저럭 준수했다.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어 성격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바트가 부러진 검날을 날렸을 때 자신을 벌해 달라 청한 걸 보면 책임감이 강한 것 같았다.







엘리제가 그를 관찰하는 사이 블레이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리제.”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서 살며시 잡아당겼다. 그제야 엘리제는 클로드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를 쳐다봤다.







“왜요?”



“정말로 나는, 내키지 않습니다. 그대의 안전이 내겐 가장 중요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대가 내 마음을 오해하고 등을 돌려버리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겁니다.”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그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기사들이 몇이나 지켜보고 있는데도 그는 자존심을 챙기지 않았다.







“안전한 걸 고르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냉큼 고개를 끄덕이면 너무 속이 드러나 보인다. 엘리제는 일부러 머뭇댔다.







“제가 너무 전하께 폐만 끼치는 것 같아요. 이미 넘치도록 받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요. 정말 난 여기 있는 모든 걸 그대에게 줘도 아깝지 않습니다.”







조바심이 났는지, 블레이크는 그녀를 무기 진열장 앞에 데려갔다. 엘리제는 힐끔 그곳에 전시된 무기들을 바라봤다.







각기 모양과 형태가 다른 수십 가지의 무기들은 모두가 멋져 보였다. 화려한 장식은 없었으나 품은 예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엘리제는 그중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검에 손을 뻗었다. 검술을 모르는 그녀가 휘둘러도 몹시 위협적일 것 같은 외관이었다.







“엘리제, 그건 아마 들지 못할 겁니다.”







걱정됐는지 블레이크는 진열장 앞에 바짝 붙어 서서 그녀를 지켜봤다. 그의 말을 듣고도 엘리제는 손잡이를 잡고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다. 안간힘을 써 봤지만, 그녀가 택한 검은 결국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야.”







급기야 그녀는 손목을 삐끗했다.







“괜찮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아요.”







태연히 답한 것과 달리 손목이 찌르르 아팠다.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녀의 손목을 살피던 블레이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있는 무기들은 대부분 몹시 무겁습니다. 고밀도의 검기를 견디는 건 평범한 철로는 불가하지요. 소재부터가 다릅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겨우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도도 그녀가 휘두르기엔 무거웠다. 식칼 정도의 무게를 예상했던 엘리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검술 훈련은 꿈도 못 꾸겠네.’







천재성을 뽐낼 가능성이 사라져 가자, 엘리제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그때, 여태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기만 하던 바트가 진열장 가장 구석에서 무언가를 꺼내 블레이크에게 보여 주었다.







“이런 건 어떨까요.”







뭉툭한 자루에 여러 갈래의 기다란 끈이 달린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채찍이었다.







“구교묘? 이런 게 왜 여기 있지?”







블레이크는 바트가 건넨 채찍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채찍에 마력을 주입하자 푸른 빛줄기가 가닥가닥 뿜어져 나왔다.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본래 그녀의 팔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던 길이가 이 미터 넘도록 연장되었다.







그가 손목을 흔들 때마다 기다란 아홉 줄의 검기가 춤추듯 넘실댔다. 마치 레이저 쇼를 보는 것 같았다.







“음.”







검기를 거둔 블레이크가 그녀에게 채찍을 건네주었다.







“어떻습니까?”







엘리제는 멀뚱멀뚱 제 손에 들린 채찍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주저앉아 채찍을 바닥에 휘둘러 보았다.







차악!







찰진 소리가 났다.







“평범한 말채찍처럼 보이지만, 마력을 견뎌내는 것으로 보아 용의 가죽 같군요.”



“용이요?”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당연한 얘기지만 <타락한 연인>에 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딱히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런 요소를 넣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기사 중 누구도 놀라지 않는 거로 보아 용이란 게 정말 있는 모양이었다.







엘리제는 몇 번 더 채찍으로 바닥을 후려쳤다.







차악! 차아악!







“별로 아파 보이지 않는데….”



“소재의 특성입니다. 마력을 주입하지 않으면 소가죽보다 훨씬 부드러워서 잘못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을 겁니다.”







결론은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었다.







“이 정도라면 위험하지 않고 괜찮겠군요.”



“네?”



“선물입니다, 엘리제.”



“아니, 전….”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술의 천재가 되어야 할 그녀의 첫 번째 무기가 채찍이라니, 암만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러나 어차피 여기 있는 무기들 중 채찍 외에 그녀가 들고 휘두를 수 있는 건 없었다.







엘리제는 손에 든 채찍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블레이크의 얼굴은 아까와 달리 환해져 있었다. 그가 기뻐하는 걸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약해졌다.







“혹시 내가 약속을 어기면 그걸로 날 때려도 좋습니다.”



“……!”







흠칫하는 기사들을 못 본 척하며 엘리제는 야무지게 자신의 무기를 챙겼다.











***











다소 이르게 아침 식사를 함께한 후, 블레이크는 정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궁했다. 그리고 엘리제는 새로 얻은 무기를 메리에게 보여 주었다.







“이것 봐, 메리. 용의 가죽으로 만든 채찍이래.”



“용이요? 이 세계에 용이 있대요?”



“응. 몰랐니?”







새벽까지만 해도 저 역시 몰랐지만, 엘리제는 어떻게 중간지대 조사관이 그것도 몰랐냐는 눈빛으로 메리를 쳐다봤다.







‘나는 임시고 넌 정식 조사관이잖아.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







그러나 메리는 그녀가 어떤 눈빛으로 쳐다보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용이 산다니!”







흥분해서 방방 뛰었을 뿐이다.







“일이 끝나면 꼭 보러 갈 거예요!”







별 관심 없는 척 새침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실은 엘리제도 용을 구경하고 싶었다. CG 아닌 진짜 용은 어떻게 생겼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들이 한참 용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트입니다.”







메리를 시켜 문을 열자, 시녀장 케이트가 안으로 들어와 엘리제에게 묵례했다. 늘 담담함을 유지하던 그녀가 어쩐지 조금 불안해 보였다.







“비전하,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궁에서? 무슨 일로?”



“용건을 묻자, 직접 뵙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해서 알아오지 못했어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섰다. 궁에서 온 손님은 1층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제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흰색 제복을 갖춰 입은 기사가 가슴에 손을 붙여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공비님. 저는 황가를 수호하는 네프러스의 기사, 그렉 슈레트입니다. 폐하의 명을 받아 비전하께 서신을 전하러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