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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는 두 번의 파양과 세 번째 입양 가정에서의 학대를 겪으며, 온 힘을 다해 부닥쳐도 가능치 않은 일이 세상엔 많다는 걸 진즉부터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검술 얘길 꺼낸 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루카스에게 받은 클랜튼 후작 부부에 대한 문서를 읽었기 때문이다.
클랜튼 가문은 비전 검술이 있을 정도로 명성 있는 무가였으며, 친부 클랜튼 후작은 천재적인 마법사였다. 그렇다면 <타락한 연인> 속 등장인물, 엘리제 클랜튼에게도 마법이나 검술 중 어느 쪽 하나에는 재능이 있지 않을까.
얼마나 신기한가. 하늘을 날고 시간을 멈추게 하는 마법이라니. 별들의 전쟁에 나오는 광선검처럼 빛을 뿜어내는 검술도 굉장히 멋졌다.
필립이 미처 말해 주지 못한 그녀의 특수능력이 마법이나 검술에서 발휘될지도 몰랐다. 마법은 엘리제의 임무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검술은 호신용으로 매우 좋을 것이다. 메리의 괴력을 생각하면 둘 중 어느 쪽이든 충분히 ‘천재’ 소리를 들을 만했다.
그래서 엘리제는 루카스나 블레이크가 협조적이지 않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천재는 어차피 조금만 노력하면 금방 두각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적당히 바트나 앨런 정도의 기사에게 호신용으로 가르쳐 달라 하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천재성을 발견한 모두가 깜짝 놀라겠지.’
잘게 조각낸 사과 파이를 한 숟갈 입에 넣고 오물대며, 엘리제는 웃는 걸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엘리제.”
블레이크의 부름에 엘리제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네?”
“괜찮습니까?”
“뭐가요?”
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졌다.
“…아니. 아닙니다.”
그녀의 마음이 상했을까 봐 초조해하면서도 그는 다시 검술 얘기를 꺼내진 않았다. 엘리제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보다는 위험한 일에서 떨어뜨려 놓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엘리제는 연신 제 눈치를 살피는 블레이크를 모른 척하며 다시 사과 파이에 집중했다.
어쨌든 그녀는 첫 번째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뜬금없는 검술 타령 덕분에 날카롭게 대립하던 두 남자의 기세가 한순간에 수그러들었지 않은가.
루카스가 블레이크에게 대련을 청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필요한 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 대련을 청한 건 나쁘지 않다. 다만, 방식이 문제였다. 왜 쓸데없이 날을 세운단 말인가.
어떤 필요에 의해서건 블레이크가 루카스를 경계하게 되는 건 좋지 않다.
‘알 만한 사람이 대체 왜 저런담.’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일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굳이 블레이크의 도발에 걸려든 척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오버였다. 물론 <타락한 연인>의 진짜 루카스 클랜튼이라면 충분히 보일 모습이었지만, 이런 데서까지 너무 철저하게 연기하려 할 필요는 없었다.
‘한 번 얘기해 둬야겠네.’
순조로운 임무 수행을 위해, 대본 외 장면에서는 적당히 타협하는 편이 나았다.
이상한 기구를 착용한 채 고생하고(?) 있는 건 그가 아니라 그녀 아닌가. 지금만 해도 배 속이 저릿저릿해서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런데도 태연함을 가장할 수 있는 건, 순전히 그녀 특유의 인내심 덕분이었다.
다행히 루카스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고,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그제야 엘리제도 안도할 수 있었다.
***
만찬은 그럭저럭 괜찮은 분위기에서 끝이 났다. 나중엔 사담을 몇 마디 나누기도 했고, 황태자가 룰을 바꾼 친목 경기에 관해 얘기하기도 했다.
“살펴 가세요, 오라버니.”
엘리제의 배웅에 그는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했다.
“그럼, 연락 주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블레이크에게 인사를 건넨 루카스는 성큼성큼 걸어 저택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다정히 엘리제의 어깨를 감쌌다.
“손님이 갔으니, 우리도 할 일을 해야겠군요.”
“할 일이요?”
“아까 씻지 못했잖습니까.”
“앗…!”
그가 훌쩍,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구슬도 빼야지요.”
그걸 빼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자, 엘리제의 몸은 자연히 움츠러들었다.
관계를 맺는 데에 적극적이고 당당했던 그녀인데, 유독 블레이크와의 관계에선 그게 쉽지 않았다. 그는 엘리제가 겪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자꾸만 그녀를 몰아붙였다. 물론 그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저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주인 부부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멜릭과 시종, 시녀들을 지나 블레이크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요란하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를 멍하니 듣다 보니 금세 침실에 당도했다. 문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전에, 함께 씻겠냐고 내게 말했지요.”
엘리제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루카스가 침대 밑에 숨어 있던 그날, 그의 주의를 돌리려 그런 말을 했던 게 기억났다.
“이곳 타운하우스의 욕실은 제법 괜찮습니다. 최신식 마법 설비가 되어 있어 따로 사람을 부를 필요가 없지요.”
그는 그대로 그녀를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흰색 대리석 욕실의 한가운데엔 너덧 명이 동시에 들어가도 충분한 규모의 원형 욕조가 자리해 있었다. 욕조 옆엔 마사지 베드가 따로 놓여 있었고 우아한 곡선의 금색 수전이 그 옆으로 뻗어 있었다. 최고급 호텔 못지않은 외관이었다.
그는 일단 마사지 베드에 그녀를 앉혀 놓고 수전을 조작했다. 콸콸 쏟아지며 욕조를 채우는 따뜻한 물을 바라보던 엘리제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 벽면의 반을 커다란 거울이 차지하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엘리제의 입이 턱 벌어졌다.
‘뭐야, 이게!’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드러난 살결 곳곳이 울긋불긋했다.
‘이래서 거울을 못 보게 했구나.’
루카스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저택의 사용인들 또한 이 모습을 봤다.
‘이 남자가 진짜.’
빤히 쳐다보는 엘리제의 눈빛에 블레이크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 좀 해주지 그랬어요. 숄이라도 덮었을 텐데.”
“굳이 감출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 않습니까.”
대답은 그리 하면서도 그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제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저 커다랗고 잘난 남자가 미움받을까 봐 조마조마해 하다니 너무 귀엽지 않은가.
블레이크는 제 옷을 먼저 훌훌 벗어 내렸다.
‘아….’
블레이크의 근사한 몸을 보는 순간, 엘리제는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얄미운 감정이 씻은 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의 남성은 벌써 잔뜩 힘이 들어가 꺼덕대고 있었다.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에게 있어 중간지대의 조직원 구하기가 일 순위라면 루카스를 돕는 게 이 순위 그리고 세 번째는 무조건 이거였다. 그와의 섹스는 한정판의 히든 트랙이나 다름없었다. 검술이고 마법이고 이것보단 중요하지 않았다.
“나를 위해 옷을 벗어 주겠습니까?”
그녀가 좋아하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드레스의 매듭을 풀었다. 드레스와 슈미즈가 차례로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남은 건 은밀한 곳을 휘감은 가죽끈뿐이었다.
“내가 빼주길 원합니까? 아니면 직접 빼도 괜찮습니다.”
“제가 뺄게요.”
엘리제는 그러는 편이 그나마 조금 덜 부끄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곤 제 몸에 감긴 가죽끈을 더듬었다. 골반 쪽에 있는 자그마한 금속 버클을 풀자 가죽끈은 쉬이 헐거워져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이제 남은 건 구슬을 꺼내는 것뿐이었다.
구슬을 꺼내기 위해 엘리제는 다리를 좀 더 활짝 벌려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애를 써도 구슬은 잘 빠지지 않았다. 구조상 아래쪽에서 힘을 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근육과 유연성 빵점인 뻣뻣한 몸으론 그게 도통 되질 않았다.
몇 번이나 끙끙거리며 가죽끈째 잡아당기다 보니 손에 땀이 찼다. 울상이 된 채 엘리제가 그를 올려다봤다.
“잘 안 돼요.”
블레이크의 시선은 진즉부터 그녀의 다리 사이에 못 박혀 있었다.
“도와줄 테니 발목을 잡아 보십시오.”
“이렇게요…?”
엘리제는 그가 시키는 대로 양쪽 발목을 잡았다. 자연히 허벅지가 배 쪽으로 당겨지며 은밀한 부분이 훤히 드러났다. 얼굴이 새빨개진 엘리제는 그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잘했습니다.”
다정히 말하고서 그가 은색 기둥에 연결된 가죽끈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쉽게 구슬을 뽑아냈다.
“윽…!”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단단한 것의 감각에 엘리제는 움찔 몸을 떨었다. 블레이크의 정액에 더해 그녀가 흘린 애액이 뻐끔거리는 입구에서 주르륵 쏟아졌다.
딸그락.
젖어서 번들거리는 가죽끈이 바닥에 떨어졌다. 가죽끈을 내려놓은 그가 갑작스레 그녀의 발목을 잡아 제게로 쭉 잡아당겼다. 베드 끝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가 걸쳐졌다.
잡고 있던 그녀의 발목을 제 어깨에 걸치고서 그가 바짝 몸을 붙여왔다. 제지할 틈도 없이, 그의 것이 난폭하게 파고들었다.
“앗, 블레이크…!”
흘러내리던 정액이 그의 것에 틀어막혀 다시금 그녀의 안을 채웠다. 그녀의 골반을 붙잡아 끌어당기며 그는 뿌리까지 자신을 박아 넣었다.
굵은 기둥이 뜨겁게 젖어 있는 속살을 가르는 순간, 엘리제는 그대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해일 같은 절정감에 휩쓸려 퍼덕대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블레이크의 눈빛은 광인의 그것과도 흡사했다.
쇠처럼 단단해진 그의 페니스가 내벽을 긁고 찔러댔다.
“잠깐, 잠깐만요.”
엘리제는 몸을 비틀며 그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가 퍽퍽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쳐올릴 때마다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요의와도 흡사해서 엘리제는 반사적으로 입구를 조였다.
어딘가가 잘못 눌리고 있었다. 점점 참기가 힘들어졌다.
“너무, 흐윽, 이상해서…. 안 돼….”
그는 점점 더 상체를 기울여 깊이까지 박아댔다. 거의 반으로 접힌 상태가 된 채 그녀는 그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럴수록 아래에서 느껴지는 충동은 더욱 심해졌다. 힘을 빼는 순간 뭔가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싫어, 블레이크…. 그만, 그만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