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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랜튼에서 네 뜻에 따라줄 듯싶은가?”



“그럴걸. 친딸을 무시하고 클랜튼의 피가 흐르지 않는 놈을 가주로 세우려면 황실의 도움이 조금은 필요해서 말이야.”







무섭게 노려보는 블레이크를 무시한 채 렉스는 카밀라의 목덜미를 입술로 지분댔다.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일이 복잡해지는 건 원치 않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안 그래?”



“협박할 대상을 잘못 골랐군. 네 놈 뜻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협박하자는 게 아니야. 나도 양보를 할 테니 자네도 좀 양보를 하라는 거지.”







블레이크와 달리 그는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지 모르겠군. 혹시 누군가 자네보다 먼저 자네 부인을 찾을까 봐 두렵기라도 한 건가? 지레 겁먹고 도망치다니, 철혈의 칭호가 우습군.”



“같잖은 도발에 넘어갈 듯싶나.”



“아! 아니면 부인을 못 믿는 건가? 고작 연회가 열리는 몇 시간, 다른 놈과 눈이라도 맞을까 봐?”



“더는 말할 가치가 없군. 경고했으니 내 용무는 끝이다.”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렉스가 다급한 말로 불러 세웠다.







“혼인신고서! 바로 처리해 주지.”







블레이크의 시선이 저를 향하자 렉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귀부인들의 경우엔 중도에 기권할 수 있도록 조건을 걸어 두겠다. 참가하는 시늉만 내.”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내 입장을 좀 생각해 달라고. 솔직히 룰 개정에 대한 소문이 돌자마자 온 제도가 난리야. 자네 빼고 다 좋아한다고. 다. 심지어 귀부인들까지 말이야.”



“…….”



“찬물 끼얹지 말고 좀.”







팔짱을 낀 채 렉스를 바라보던 블레이크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한참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렉스는 카밀라에게 쪽쪽 입을 맞추고 다리 사이를 더듬어댔다. 블레이크의 얼굴에서 일순간 표정이 사라졌다.







“지금 당장 혼인신고서 가지고 와.”







그가 제안을 받아들이자, 렉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바로 가서 폐하께 받아오겠네. 잘 생각했어, 블레이크.”







무릎에 앉아 있던 카밀라를 일으켜 세우고 저 역시 일어난 렉스가 그녀에게 걸려 있던 마법을 거두어 들였다.







“카밀라, 나는 폐하께 좀 다녀올 테니 적적하지 않게 대공을 잘 모시고 있어.”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렉스가 후다닥 방을 나가자, 블레이크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몹시도 화가 난 모습이었다.







카밀라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녀는 제도에서 미남으로 소문난 이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취향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단연 첫 번째가 루카스 클랜튼임을 누구도 부정치 않았다.







신이 빚은 듯 미려한 이목구비와 하얀 제복에 감싸인 날렵한 몸매, 빈틈을 찾기 어려운 언행은 그를 어디에서나 돋보이게 했다.







여동생의 결혼식을 다녀온 이후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변했다는 말이 나돌았지만, 사라진 미소 대신 우수에 젖은 녹안과 굳게 다문 입술이 오히려 더욱 뭇 제도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소문대로라면 바로 눈앞의 남자, 블레이크 프로이젠 대공이 루카스의 미소를 앗아간 장본인이었다.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오늘 만나 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레이크 프로이젠은 지나치게 잘난 남자였다.







대공은 영지에 주로 머무는 데다가 한 번씩 제도에 방문하더라도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없어 소문만 무성했다.







그에게 붙은 철혈이란 별명은 그가 전쟁을 통해 쌓아 올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나 개인의 무력뿐 아니라 정치적 성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는 걸어온 싸움을 피하는 법이 없었고 손해를 입으면 몇 배로 갚아 주는 남자였다.







이처럼 소문을 이루는 것이 대부분 대공의 행보에 대한 것들이니 정작 그의 외모에 대해선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정도의 미남일 줄이야.’







물론 본인의 미모는 둘째 치고 ‘그’ 루카스와 함께 자란 엘리제 클랜튼이 변변찮은 남자와 결혼할 거라곤 누구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가 설마 제도 제일의 칭호를 위협할 정도의 미남일 줄은 몰랐다.







카밀라는 슬그머니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녀는 블레이크가 가졌을 명예와 권력, 재력 같은 것보다 그의 몸이 탐났다. 의자에 기대앉아 있는 젊은 대공은 몹시도 근사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인지 사나운 위압감이 느껴졌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저런 남자에게 탐해지는 기분은 어떨까.’







아마도 찌푸린 저 얼굴 그대로 우악스럽게 가슴을 주무르며 그녀의 구멍을 탐할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카밀라의 아래는 흥건히 젖어 들었다.







렉스로 인해 남자를 알게 되고, 예의와 법도 대신 욕망에 충실해지는 법을 배운 그녀였다. 그가 시키는 대로 유혹해서 넘어오지 않은 남자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상대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자신에게 쾌락을 선사할 수 있다면 누구든 상관없었다.







“저, 대공님?”







그를 부르며 카밀라는 살짝 그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속옷조차 입지 않은 상태로 가운만 걸친 상태였다. 그마저도 렉스가 손을 넣고 주물러댄 탓에 여밈이 헐거워져 있었다. 지금처럼 몸을 기울이면 블레이크가 눈을 떠 그녀를 내려다봤을 때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일 게 분명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카밀라의 부름에도 그녀를 쳐다보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참. 적적하지 않게 해드리겠노라 약속했는데 협조 좀 해주세요.”







투정하듯 말하며, 카밀라는 그의 허벅지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다행히 그는 그녀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세상에, 상상 이상인데.’







카밀라는 손 아래에서 느껴지는 허벅지의 단단함에 내심 놀랐다.







터져 나갈 듯한 근육을 가진 기사들에 비하면 블레이크의 체격은 적당히 건장한 수준이었다. 정복을 갖춰 입었을 때 옷맵시가 가장 잘 살 만한 이상적인 몸매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실까지 좋으면 얘기는 끝이지.’







만져지는 근육의 강도와 탄력이 이 정도라면 벗은 몸이 얼마나 대단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야릇한 상상에 저절로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손이 그의 허벅지를 쓸며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아직은 미동 없는 그의 중심까지 한 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







“저에 대해 궁금한 건 없으신가요?”







그에게선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꿋꿋이 말을 이어 갔다.







“저는 궁금한 게 많은데.”







그녀의 손이 조금 더 그의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혹시 대공비께서도 이번에 함께 제도에 오셨나요?”







그제야 그의 눈꺼풀이 들렸다. 드러난 그의 새파란 눈은 오싹할 정도로 싸늘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 아내와 친분이 있소?”







낮게 깔린 목소리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아니요. 연이 닿지 않아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엘리제 클랜튼과 친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귀족 영애가 과연 있기나 할까. 카밀라는 내심 조소했다. 대공은 그녀에 대해 잘 알아보지도 않고 결혼한 모양이었다. 혹은 부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그래도 얘기는 많이 전해 들었어요.”



“어떤 얘기 말이오?”



“대공비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에 대해서요.”







지독히도 차갑던 그의 눈빛이 아주 살짝 누그러졌다.







“그렇소. 그녀는 몹시 아름답지.”



“그렇군요! 드디어 뵐 수 있다니, 너무 기대되네요.”







카밀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로 좀 더 몸을 기울였다. 대충 여며둔 가운의 앞섶이 벌어지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허벅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내라면 이쯤에서 본능을 드러내는 게 정상이었다.







“대공비께 저를 소개해 주시면 안 될까요? 분명 그분의 즐거운 제도 생활에 도움이 될 거예요. 전 친구가 아주 많거든요.”







그의 중심부를 살피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탓에 카밀라는 아무 말이나 대충 내뱉었다.







‘이상하네. 왜 반응이 없지?’







대답 없는 블레이크를 뒤늦게 올려다본 카밀라는 당혹감에 하얗게 굳어 버렸다. 그가 너무도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







장갑을 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불결한 것을 대하듯, 그는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하여 카밀라의 손을 제 허벅지에서 떼어냈다. 그러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을 툭툭 털었다.







“내 아내에게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진 않군.”



“네?”



“내가 있는데 무엇하러.”







카밀라는 자신의 무릎 위로 내던져진 손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남편이 있으니 친구가 필요 없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린가.







블레이크가 자신을 노려보든 말든, 카밀라는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없었다.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없으면 외롭잖아요.”



“나는 그녀의 남편이며, 가족이자 보호자요. 거기에 더해 친구까지 되어 주면 그만이지.”







카밀라는 기가 찼다.







“대공비께서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여자에겐 남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분명 있다고요.”



“그런 게 있다 한들.”







우지끈.







매우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듣지 못한 그녀의 속내를 누가 들을 수 있다는 거지?”







그야말로 끔찍한 독점욕이었다. 카밀라는 그를 꾀어 욕망을 채우려던 처음의 목적도 잊고 목소리를 높였다.







“친구의 필요성을 모르다니. 대공께선 좋은 남편이 되긴 틀렸네요. 부인과의 사이도 언젠간 나빠질 게 분명해요.”



“…지금 뭐라 했소?”



“그렇잖아요. 두 분이 다투기라도 하면 누가 중재해 주겠어요? 혹은 성생활에서의 불만은 누구에게 털어놓고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혹 그녀에게 친구가 필요하다 해도, 그게 귀하는 아니오.”



“제가 어때서요?”







불퉁한 얼굴로 카밀라는 턱을 치켜들었다. 이래 봬도 그녀는 엘리제보다 족히 열 배는 친구가 많았다. 물론 엘리제에게 단 한 명이라도 친구가 있다는 전제하에.







“내 아내는 착하고 순수하오.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 영애에게 끌려다닐 게 분명하지.”







카밀라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블레이크 프로이젠의 아내가 누군지 착각했나 의심했다.







‘누가 착하고 순수하다고? 거절을 못 해서 끌려다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엘리제 클랜튼이었다. 소문이 전부 진실은 아닐지라도 엘리제의 성격은 정말 유명했다.







“무슨 얘길 그렇게 재미나게 하고 있나?”







때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온 렉스만 아니었어도 카밀라는 엘리제에 대한 블레이크의 잘못된 견해를 조목조목 반박해 주었을 것이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블레이크가 서류를 받기 위해 의자 팔걸이에서 손을 뗐을 때 그녀는 조금 전 함부로 떠들지 않은 것을 신께 감사했다. 블레이크가 쥐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 끄트머리가 산산이 부서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들린 우지끈 소리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서류의 서명 란을 확인한 블레이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좀 더 놀다 가지 그러나.”







렉스는 카밀라 쪽을 슬쩍 눈짓하며 입꼬리를 늘여 웃었다. 카밀라는 렉스의 상황 파악 능력이 참 엉망이라고 생각했다. 차가운 기운을 풀풀 날리고 있는 대공은 한눈에 보기에도 기분이 최악이었다.







“사양하지.”







카밀라의 예상대로 블레이크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흐음. 뭐, 그래. 내일 정무 회의에서 또 볼 테니.”







블레이크는 방을 나가기 전, 끼고 있던 흰색 장갑을 벗어 가차 없이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그럼 이만.”







렉스와 카밀라는 나란히 선 채로 쾅 소리를 내며 닫힌 방문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죠?”



“음. 대공이 좀 까칠하긴 하지?”



“그 정도가 아닌데요.”







카밀라는 한순간이나마 엘리제를 부러워했던 저 자신이 어이없었다. 블레이크 프로이젠은 분명 견줄 데 없이 잘난 남자였지만, 남편감으로는 최악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