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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정액이 묻은 그녀의 손수건을 처분하려면 소각하는 편이 가장 확실했다. 엘리제의 침실 벽난로엔 아직 불씨가 없었고, 루카스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걸 그대로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럴래요?”
별 고민 없이 대답하는 엘리제를 보며 그가 표정을 굳혔다.
“주변인들을 조심하도록 해. 드러나지 않은 빙의자가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름 유능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조사관 역할은 처음이다. 루카스는 왠지 불안감이 들었다.
“알겠어요. 아, 그런데 당신…. 빙의자는 보기만 해도 알아요?”
“아니. 내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악마나 중간지대의 조사관, 혹은 같은 요원뿐이다. 그래서 악마 놈들이 제3의 빙의자들을 끌어들여 체스 말처럼 이용하는 거지.”
“그 제3의 빙의자들은 다 어디서 데려오는 건데요?”
“현실 세계. 놈들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거나 죽기 직전인 사람의 영혼에 접근해 거짓과 진실이 교묘히 섞인 말로 꾀어 계약을 맺는다.”
엘리제의 머릿속에 렉스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어떤 조건인지는 모르나 카인 리베르토 역시 악마의 꾐에 넘어가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어리석게도.
“…거기에 당하는 사람이 은근 많나 보군요.”
“그래. 요즘은 한창 환상 세계에 빙의물이 쏟아지는 시점이라 큰 거부감 없이 계약을 맺더군. 매우 드문 일이다만 악마와의 내기에서 이기는 사람도 분명 있으니까.”
“흐음…. 당신들은 그런 방법 생각 안 해봤어요?”
“그런 건 불법이다.”
“…….”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잘라 말하는 루카스의 대답에, 엘리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가 어디서든 득세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참, 다음에 만날 땐 메리를 소개해 드릴게요. 메리는 얼마 전에 구출한 중간지대 조사관이에요. 제 개인 시녀 역할인데, 힘이 엄청나게 세요. 나름 당신과 잘 맞을 것 같기도 하네요.”
순수함만을 가지고 말하자면 아마도 그와 메리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메리라…. 기억해 두지.”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테라스로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이미 해가 저물어 바깥은 캄캄했다.
“들키지 말고 조심히 가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다음에 보지.”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그는 눈 깜짝할 사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늘한 밤바람에 커튼이 홀로 펄럭댔다.
잠시간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테라스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되게 쿨하네.”
중얼거리며 엘리제는 활짝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은 루카스가 그녀는 마냥 신기했다. 관계를 갖든 무얼 하든 아무렇지 않은 건 엘리제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다 경험이 많아서였다. 그와 그녀는 애초에 조건이 다르지 않은가.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엘리제는 루카스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적어도 민망함에 눈을 못 마주친다든지, 말이라도 더듬지 않았을까.
‘역시 아무나 요원이 되는 건 아닌가 보네.’
그 어려운 자격 요건을 갖춰 윗세계의 주민이 된 루카스였다. 아마 오늘의 일도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한 과정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딱히 성공 보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사명감이 투철한 건가.’
성공하고 싶은 욕망,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 사랑받고 싶은 욕망. 그 모든 욕망을 채우려 아등바등 발버둥 치며 살았던 그녀에게 그는 영 이해 못 할 사람이었다.
‘아무렴 어때. 내겐 잘된 일이지.’
네가 여자로 보인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며 질척거릴 사람이 아니라서 마음이 가벼웠다.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도울 수 있는 건 돕고, 그녀 역시 그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
프로이젠 대공저를 빠져나온 루카스는 집으로 가는 대신 황궁 쪽으로 향했다.
‘렉스 러셀이 악마라니.’
엘리제에게 들은 정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블레이크 프로이젠 대공이 입궁한 게 삼십 분 전쯤이었다.
‘이왕이면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들어 보는 것도 괜찮겠군.’
윗세계 요원인 그는 잠복, 은신, 추적 등에 능했다.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네프러스의 단장은 물론이거니와 마법적 능력이 탁월한 악마조차 그에겐 가소로웠다. 다만 이유 없이 놈을 제압하거나 무력을 행사해선 안 되기에 규칙을 지킬 뿐.
‘무엇보다 아직은 내 정체가 드러나선 안 된다.’
환상 세계에 들어와 분탕질을 치는 악마치고 루카스를 모르는 놈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가 실수로 남주 몸을 차지했다는 걸 알면 골탕을 먹이려 온갖 짓을 다 벌일 것이다.
생각을 이어 나가는 사이 그는 황궁에 당도했다. 궁을 감싼 성벽은 고개를 완전히 젖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높았지만, 루카스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황궁의 담을 넘었다. 루카스가 황태자궁까지 가는 동안 그의 기척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네프러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루카스 클랜튼의 주 업무는 황후를 경호하는 것이기에, 그는 <타락한 연인>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 한 번도 황태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물론 황태자궁의 구조도 알지 못했다.
감각을 곤두세운 채 궁 외곽을 돌던 그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정말이군.’
악마의 기척이 매우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다. 그가 멈춰 선 곳 바로 벽 너머였다. 아마도 그곳이 황태자 렉스 러셀의 방인 모양이었다.
테라스 그늘에 스며든 루카스는 곧바로 감각을 확장했다.
“미안하게 됐군, 블레이크. 이 밤에 찾아올 줄 몰랐거든.”
방 안에 있는 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렉스, 대체 무슨 생각이지?”
황태자의 몸에 빙의한 악마 렉스 러셀과 본래 루카스가 빙의해야 했던 프로이젠 대공의 목소리였다.
***
블레이크는 지금 머리끝까지 짜증이 치밀어 오른 상태였다. 엘리제에게 저택 안내도 해주지 못한 채 입궁했는데 렉스는 그를 한참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다.
루오스 백작에게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방문 약속을 잡았건만 황태자는 그를 복도에 세워둔 채 헛짓거리를 했다.
대화를 시작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자 하나를 끼고선 보란 듯이 주물럭거렸다. 얼마나 질펀하게 놀았는지 이미 방 안엔 음란한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인사 먼저 하지, 카밀라. 프로이젠 대공이다.”
렉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가 블레이크에게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처음 뵈어요, 대공님. 카밀라 투리스예요.”
코르티잔인 줄 알았던 여자의 정체가 귀족 영애, 그것도 나름대로 힘 있는 자작가 고명딸이란 사실에 블레이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여자의 체구는 언뜻 엘리제와 비슷해 보였다. 보랏빛이 은은히 감도는 머리카락 색 또한 그러했다. 일부러 보여 주기 위함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반갑군, 영애. 괜찮다면 자리를 좀 피해 주면 좋겠는데.”
“어찌할까요, 전하?”
카밀라가 렉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아, 그냥 있어.”
블레이크의 살벌한 눈빛에 그가 입꼬리를 늘이며 웃었다.
“듣는 귀가 신경 쓰이면 얘 귀를 막아 줄게. 이 밤에 연약한 영애를 홀로 있게 만들 순 없잖아? 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약속을 잡던가.”
이를 부득 갈고서 블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제 귀를 막고서 무슨 얘길 하시려고. 설마 제 흉을 보시려는 건 아니죠?”
“응. 네 흉보려고. 그러니 얌전히 귀 막고 있어.”
카밀라의 농담 섞인 말에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대꾸한 렉스가 그녀의 귀를 양손으로 막는 시늉을 했다. 적은 양의 마나가 일렁이며 그녀를 덮었다.
카밀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거로 보아 청각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봉한 모양이었다. 입술을 비죽이는 그녀를 렉스가 끌어다 제 무릎에 앉혔다.
“자, 이제 말해 보지. 뭐가 그리 급해서 한달음에 달려왔나, 블레이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룰을 바꾸지 않으면 이번 친선 시합에 프로이젠은 참가하지 않겠다.”
뜻밖이라는 듯 렉스가 눈썹을 스윽 들어 올렸다. 블레이크가 대공비뿐만 아니라 프로이젠 전체의 불참을 통보할 줄은 몰랐다. 이는 단순한 청탁이 아닌 협박에 가까웠다.
프로이젠 기사단은 네프러스 기사단과 더불어 명실공히 제국의 양대 검이었다. 그들이 모두 불참한다면 기사와 마법사 세력 간 균형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서 주관하는 행사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대공가가 받게 될 불이익은 고려치 않는 건가?”
렉스의 말에 블레이크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들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해보던가. 황태자 전하께서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한동안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병석에 누운 황제를 대신해 황태자가 정무 회의를 주관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아직 제국의 주인이 아니었다. 매년 주최되는 친선 시합의 룰을 임의로 바꾼 걸 충분히 문제 삼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렉의 말대로 프로이젠 대공의 힘은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드넓은 사막과 초원에서 연합과 분열을 되풀이하며 시시때때로 국경을 침범하는 쿠말족을 막아 내고 있는 게 바로 프로이젠의 기사단이었다. 보유한 광산도 여럿이었으며 영토도 비옥했다.
재력이든 군사력이든 일개 귀족가 수준이 아닌 프로이젠이 등을 돌리면 아무리 황태자라 한들 입장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눈싸움에서 먼저 백기를 든 건 렉스 쪽이었다. 그는 무슨 얘길 하나 궁금한지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는 카밀라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어때? 얘 예쁘지?”
“…….”
물론 블레이크는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싸늘한 표정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얘 줄 테니까 네 부인 나한테 줄래?”
“■■, ■■■■■. 다시 한번 말해봐. 그 입을 찢어 줄 테니까.”
황태자에게 그 정도의 욕설을 퍼붓는 건 황족 모욕죄에 해당했다. 그러나 렉스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원래의 황태자라면 어떨지 몰라도 악마인 그에게 블레이크가 보내는 분노와 살의는 마냥 달콤했다.
“블레이크, 그거 아나? 아직 폐하께서 자네가 제출한 혼인신고서에 서명하지 않으셨다는 거.”
“…뭐?”
“중도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아직 서류가 올라가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그는 카밀라가 걸친 가운 속에 손을 밀어 넣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시점에 클랜튼에서 혼인 무효를 신청하면 일이 어떻게 될까?”
“이미 초야를 함께한 사이다. 혼인신고서가 없다 한들 소송에 들어가면 내가 이겨.”
“대신 엘리제 클랜튼은 자신의 처녀 상실을 공개적으로 증명해야 하지.”
블레이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신을 섬기는 고결한 신관이 음흉한 마음을 품을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여인으로서는 조금 수치스럽지 않을까 싶은데.”
렉스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소송이 진행되는 중엔 클랜튼 후작가 측에서 그녀를 보호한다는 것도 자네에게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