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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얘기지만 엘리제는 이동 마법진을 처음 보았다. 마차가 웬 거대한 원형 경기장 같은 곳으로 들어가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게 하나의 마법진일 줄은 몰랐다.







블레이크를 비롯하여 프로이젠의 기사 수십 명, 엘리제가 타고 있는 마차와 시녀들을 태운 마차, 그 외 짐 마차와 말 수십 필. 그 모든 것이 마법진 안에 한 번에 들어가고도 남았다.







블레이크는 엘리제에게 이동 마법진의 구동 방식이나 사용법에 대해 따로 말해주지 않았다. 클랜튼에서 프로이젠으로 올 때도 사용했으니, 그녀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태연함을 가장하였으나 속으로는 바짝 긴장한 채, 엘리제는 마법진이 구동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돔 형태로 마법진을 감싼 벽면이 시퍼런 빛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에 공명하듯 그들이 선 공간이 웅웅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팟!







플래시라도 터진 듯 갑작스레 터져 나온 강렬한 빛에 엘리제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살짝 어지럼증이 일었을 뿐 그 외엔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새 빛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고, 그들은 아까와는 다른 출구를 통해 마법진을 빠져나왔다.







“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대공성이 거대하다고 생각했지만, 제도의 규모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끝과 끝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진 성벽은 높이마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성벽 앞을 넓고 깊은 해자가 둘러 감싸고 있었고, 뒤편으론 험준해 보이는 산맥이 굳건하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었다.







미리 전갈을 받았는지 마법진 밖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그중 선두에 선 건 엘리제가 익히 아는 이였다.







‘루카스. 마중 나와 있었네.’







찬란한 금발에 미형의 얼굴, 백색 제복 차림의 루카스는 마치 동화 속에서 갓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말까지 백마였다.







‘저런 게 바로 주인공 보정인가.’







루카스를 둘러싼 공간만 유독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다. 만약 대본대로 눈부신 미소까지 겸하여 있었다면 어느 여자도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윗세계 요원은 웃는 데 재능이 없었고, 무표정하다 못해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에서 내린 그가 다가오자 블레이크 역시 말에서 내렸다. 지위상으론 굳이 그럴 필요 없었지만 루카스가 엘리제의 오빠인 것을 고려한 것이다.







“제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루카스의 인사에 블레이크 역시 답례했다.







“이렇게 금방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저 역시 그렇습니다. 비전하께선….”







루카스의 시선이 그의 어깨 뒤, 가장 화려하고 견고해 보이는 마차를 향했다.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면서도 블레이크는 남매의 재회를 막지 못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부인 역시 경을 만나고 싶을 테니.”



“배려에 감사합니다.”







몸을 돌려 엘리제가 탄 마차를 향하는 블레이크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창을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리제는 반가운 티를 내지 않도록 애쓰기로 마음먹었다. 블레이크가 벌써부터 경계심을 갖기 시작하면 앞으로의 계획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표정을 가다듬은 블레이크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부인.”







그를 보며 엘리제는 부러 환히 미소 지었다.







“벌써 도착한 건가요?”



“아직 제도에 입성하지 않았습니다만 마중 나온 기사 중에 클랜튼 경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잠시 내려서 인사해도 좋습니다.”



“아….”







그리 밝지 않은 표정으로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다소 냉랭히 느껴지는 그녀의 반응에 블레이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가 예상했던 반응과 그녀의 모습이 너무 달랐던 것이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린 엘리제는 초야 다음 날과는 달리 루카스에게 달려가 안기지 않았다. 그저 블레이크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선 후 예를 갖춰 인사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다시 뵙네요, 오라버니.”



“잘 지냈습니까?”



“물론이죠.”







옆에 선 블레이크에게 살며시 팔짱을 끼며 그녀가 생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 워낙에 절 아껴 주셔서, 부족함 없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지냈답니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루카스는 ‘저건 또 무슨 수작인가’ 싶었는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에 블레이크의 얼굴만 활짝 폈다. 그는 얼굴 가득 번져 나가는 미소를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됐다.’







블레이크의 반응에 엘리제는 내심 안도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도 잘 지내셨죠?”



“저야 늘 비슷하지요.”



“당분간 제도에 머물 테니 볼 기회가 많겠네요.”



“초대해 주시면 언제든 만나러 가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루카스는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놓았다.







“확인 완료했습니다, 부단장님.”







루카스 대신 대열을 훑으며 허가 내용을 확인한 네프러스의 기사가 서류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루카스와 블레이크가 서류 끄트머리에 나란히 서명하는 것으로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그럼 이만 출발할까요. 인원 체크는 끝난 것 같습니다만.”



“그러시지요.”







루카스와의 짧은 인사 후 엘리제는 다시 마차로 되돌아왔다. 혼자 남자, 엘리제는 창의 커튼을 닫곤 루카스가 몰래 쥐여 준 쪽지를 펴보았다.







‘바로 찾아갈 테니 테라스 문을 열어둘 것.’







엘리제는 만약을 대비해 쪽지를 옷 속 깊이 넣어 감추었다. 그러곤 반지를 톡톡 두드려 지도를 열었다.







예상했던 대로 무수히 많은 점들이 지도를 뒤덮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건 검정색 점이었다.







‘아마도 엑스트라들이겠지.’







<타락한 연인> 대본에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엑스트라들이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검은 점 다음으로 많은 건, 파란 점이었다.







‘케이트가 파란 점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름 정도는 등장하는 조연을 표시하는 게 아닐까.’







그리 짐작하며 엘리제는 유심히 지도를 살폈다. 워낙에 까만색 점이 많아 다른 색 점들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회색 점이, 확실치는 않지만 대충 두 개인 것 같고……. 노란색 점이 두 개, 초록색 점이 하나구나.’







노란색 점은 중간지대의 조사관인 엘리제와 메리를 표시하고 있었고 새롭게 등장한 초록색 점은 윗세계 요원, 루카스일 것이다.







‘그럼 회색 점은 뭘까.’







그녀가 파악한 바로는 블레이크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그 회색 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치상 프로이젠의 기사들 중에 존재했다. 그게 누군지 알아내더라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려면 좀 더 단서가 필요할 듯했다.







‘어쨌든 반지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클랜튼의 마부로 빙의한 조사관을 구출하는 게 급선무야.’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까마득히 높고 견고해 보이는 성벽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엘리제는 새삼 심장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각, 네프러스 기사단의 호위하에 프로이젠 대공 내외와 기사단은 제도에 입성했다.











***











아무리 위세 높은 가문이라 한들 제도의 타운하우스는 어느 정도 실용성을 생각하여 짓기 마련이다. 부지를 구하는 것부터가 어려울뿐더러 땅값과 유지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디에나 그렇든 예외는 있었다. 프로이젠 대공가의 타운하우스가 바로 그러했다.







줄지어 늘어서 있던 다른 귀족 가문의 타운하우스들이 차지한 면적의 네다섯 배는 될 법한 면적에, 작게나마 정원까지 갖춘 대저택이 황궁과 불과 5분 거리에 존재했다.







프로이젠 대공가의 타운하우스 관리자는 시종장 버나드의 형, 멜릭 게일이었다.







“비전하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게일 남작가의 가주로 소싯적 아카데미 행정 학부를 차석으로 졸업한 수재이기도 했다. 그는 주로 영지에 상주하는 블레이크를 대신해 프로이젠을 대변하는 보좌관 역할도 겸하여 맡고 있었다.







멜릭이 엘리제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블레이크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나는 황궁에 먼저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아…. 급한 볼일이 있다고 하셨죠? 제 걱정은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



“미안합니다. 최대한 빨리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급하다면서 구구절절 엘리제의 손을 붙들고 사과한 그가 멜릭을 보며 당부했다.







“멜릭, 나를 대하듯 부인을 모셔야 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주군.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연후에야 블레이크는 안심하고 말에 올랐다.







기사 두엇과 함께 황궁을 향해 가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던 엘리제가 힐끔 멜릭을 쳐다보았다. 차분한 인상에 외알 안경을 낀 중년의 남자는 중세시대 배경에 종종 등장하는 집사를 연상케 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멜릭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비전하께서 머무실 처소를 단장해 두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였을 텐데 애썼군.”







엘리제는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에서 짐을 내리던 케이트와 메리도 재빨리 가방을 챙겨선 그녀를 뒤따랐다.







커다란 가방 두 개를 양손에 든 메리는 하나를 더 제 입에 물려다가 케이트에게 제지당했다.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그녀를 엘리제는 모른 척했다.







‘난 저런 애 몰라.’







다행히 멜릭은 뒤쪽에서 이는 소요를 능숙하게 무시했다.







중앙 계단을 향해 걸으며 멜릭이 엘리제에게 말했다.







“안주인께서 부재하신 지 오래라 저택 내부 장식이 비전하께서 보시기에 많이 미흡할 겁니다.”



“이해하네. 앞으로는 내가 신경 쓰도록 하지.”







그녀의 말에 줄곧 차분하던 그의 얼굴에 급 화색이 돌았다. 아무래도 그동안 안팎으로 이일 저일 떠맡느라 고생이 컸던 듯했다.







“비전하께서 방문하신다는 소식에 모두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래? 어째서?”



“주군께선 제도에 머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셔서, 볼일이 끝나면 바로 영지로 가버리셨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여태 주인 없는 저택이나 다름없었지요.”



“아….”



“비전하께서 동행하셨으니 이번엔 오래 머무시겠지요?”



“못해도 한 달은 있을 계획이네.”







이번에도 그는 몹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는 감격에 차 혼잣말까지 중얼거렸다.







저택의 3층은 본성과 거의 비슷한 구조였다. 블레이크의 집무실이 복도 끝에 있었고, 그의 방과 엘리제의 방 사이에 부부 침실이 있었다. 다만, 복도를 거쳐 침실로 들어갈 수 있던 본성과 달리 여기는 각 방 사이에도 문이 있어 바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잠글 순 없나?’







엘리제는 천천히 자신의 방과 부부 침실을 둘러보았다. 미흡할 거라는 말과 달리 내부를 채운 가구들은 우아하며 고급스러웠다. 커튼과 침구, 카펫 역시 본성의 것들보다 세련되어 보였다.







“훌륭하군. 수고했네, 멜릭.”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받아 둔 카탈로그들은 일단 탁자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알겠네. 아, 그리고 저녁 식사는 전하께서 귀가하시면 함께 들 테니 그때 함께 준비해 주게.”



“네, 알겠습니다.”







멜릭이 가고나자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방에도 들어가 보았다. 거의 머무는 일이 없다더니, 이제 막 단장한 그녀의 방보다도 휑했다.







그녀가 방을 돌아보는 사이 메리와 케이트는 엘리제가 바로 입을 옷들을 드레스룸에 정리했다. 가방 세 개를 비우자 얼추 필요한 것들은 채워진 모습이었다.







케이트의 도움을 받아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은 엘리제는 먼저 그녀들을 물렸다.







“나머지 짐 정리는 나중에 마저 하지. 조금 곤하군.”







루카스에게 메리를 소개시키는 건 일단 다음으로 미뤘다. 오늘은 앞으로의 계획에 있어 중요한 것들을 그와 미리 상의해야 했다.







“아…. 네, 비전하. 그럼 푹 쉬세요.”



“그래.”







케이트와 메리가 방에서 나가고 나자 엘리제는 루카스와 약조한 대로 테라스 문을 열어 두었다. 기다렸다는 듯 방 안에 흘러들어온 서늘한 바람에 하얀 커튼이 펄럭이며 춤을 췄다.







몇 걸음 물러나 침대에 걸터앉은 엘리제 앞에 그림자가 졌다. 엘리제는 아까와 달리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루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