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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이 배역은 정말 기가 막히게 골랐네.’







화목한 가족, 둘도 없는 친구 사이 등을 매 순간 연기해야 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만으로도 피곤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엘리제 님 곁엔 제가 있잖아요!”







씩씩하게 말하는 메리를 보며 엘리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응. 네가 있어서 너무 괜찮네.”







그녀의 대답이 뜻밖이었는지 메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참, 엘리제 님도.”







그러곤 양손으로 볼을 감싸고선 몸을 배배 꼬아댔다. 메리에게 행복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준 후에 엘리제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있잖아, 메리. 네게 물어볼 게 좀 있는데.”



“네, 뭔데요?”



“이거 뭔지 알지? 대본이 들어 있는 중간지대의 아이템.”







엘리제의 손짓에 메리의 시선이 그녀의 약지로 향했다.







“네. 전에 보여주셨잖아요.”



“혹시 이거, 업그레이드할 방법이 있니?”



“……?”







메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아니, 혹시 대본 외에도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환상 컨트롤타워에 요청한다든지 하는 일말이야.”



“에에? 그런 게 가능해요?”



“…….”







‘역시나 얘는 아는 게 거의 없구나.’







엘리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이런 거 사용해 본 적 없어?”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건 타워에도 몇 개 없어서요. 저 같은 말단 조사관에게까진 지급되지 않아요.”



“그래? 그렇게 따지면 나야말로 신참인데.”



“엘리제 님은 스카우트되신 거니까요. 경력자 대우를 받고 계신 거예요.”







엘리제가 코웃음을 치자, 메리가 그녀에게 바짝 달라붙더니 소곤댔다.







“이건 비밀인데, 저희 환상 컨트롤타워 말고 다른 타워 몇 군데에서도 엘리제 님을 영입하고 싶어 했다고 들었어요.”



“…다른 타워가 더 있어?”







그런 얘긴 금시초문이었다.







“그럼요. 환상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 파견되는 쪽도 있고, 중간지대의 얼굴격인 홍보부나 외교부도 있고요. 다양하죠.”



“그렇구나. 전혀 몰랐네. 워낙 시간이 없어서 필립에겐 이번 임무에 관련된 사항 몇 가지밖에 듣지 못했거든.”







다른 타워들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면 필립에게 이러저러한 내용을 전달받았지만, 그녀는 부러 듣지 못한 척했다. 혹시 필립이 말해준 내용이 사실과 다를 경우를 염두에 두고 메리를 통해 재차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얘는 거짓말엔 정말 서툰 것 같으니까.’







“아아, 그러셨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는 건 모두 알려드릴게요!”



“그래 주겠니? 정말 고마워, 메리.”







엘리제는 생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자, 그럼 메리는 뭘 알고 있는지 볼까?’







메리는 엘리제가 기대한 대로 제가 알고 있는 중간지대에 대한 얘길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더불어 윗세계와 지하세계에 대한 것도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







엘리제는 필립에게 들은 내용과 메리가 들려준 내용을 종합하여 머릿속에 가정하였던 것들을 확인, 정리했다.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았던 방식에 따라 사후, 윗세계나 중간지대 혹은 지하세계의 구성원이 된다. 이러한 사후 세계가 언제부터 존재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세 곳 중 가장 마지막에 생겨난 곳은 중간지대였다. 아마도 사람들의 역사와 비슷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간지대라 하면 윗세계와 지하세계 사이의 중립 구역처럼 들리겠지만, 실상은 윗세계와 협력할 때가 더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따로 감시하지 않아도 윗세계의 요원들은 세계의 룰을 깨지 않지만, 악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친 짓거리를 일삼기 때문이다.







“이미 균형은 기운 거나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개입하지 않으면 10명 중 8, 9명은 악마들 손아귀에 떨어질걸요. 지하세계의 공장에 갇히면 으으으, 얼마나 끔찍한지도 모르고.”







몸서리치는 메리를 보며 엘리제가 물었다.







“그렇게 열악하니? 영화에 묘사된 걸 보면 클럽 같은 데서 흥청망청 놀던데.”



“에이, 그건 관광코스고요.”



“아.”







엘리제는 무슨 말인지 금세 납득했다.







“고지식한 데다가 룰을 영악하게 이용할 줄도 모르는 윗세계 요원들은 악마의 간계를 못 이겨요. 우리로선 속이 터지는데, 그래도 막상 가진 이능만 따지면 윗세계 요원들이야말로 악마들의 천적이니까 어떻게든 써먹는 거죠.”



“그렇구나.”







엘리제의 머릿속에 500년 경력을 자랑하던 루카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후우…. 다 걔 같으면 말 다 했지.’







어쨌든 몇 가지 추가로 알게 된 사실을 제외하면 필립이 말해준 정보와 메리가 말해준 정보가 일치했다.







‘그건 다행이긴 한데….’







유감스럽게도 메리는 중간지대에 존재하는 아이템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당연히 시스템 버전이라는 게 존재한다든지, 특정 구역에서 중간지대와 일시적으로 연결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역시 엘리제 님은 대단하세요!”



“…아니, 뭐 내가 살던 시대엔 이런 류의 기계가 꽤 발달돼 있었으니까.”



“저는 그런 쪽으로 잘 모르지만, 알만한 조사관이 한 명 있긴 해요.”



“응? 정말?”



“네! 전에 말씀드렸던 클랜튼 후작가의 마부2 역을 맡은 조사관이요. 걔는 타워의 아이템 개발부 소속이거든요.”



“그런 애가 왜 조사관으로 파견을 나왔니?”



“자기가 만든 거 실험해 본다고…. 숨겨놓고 내놓질 않으니 어쩔 수 없이 필립이 보내줬어요.”



“…….”







아무래도 메리 못지않게 정상이 아닌 조사관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클랜튼 후작가의 마부 역을 맡은 조사관이라…. 루카스에게 미리 부탁을 해놔야겠는걸.’







엘리제는 협탁 서랍에서 편지지와 펜, 잉크를 꺼냈다. 그녀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내용을 대충 휘갈겨 쓰곤 곧바로 메리에게 넘겼다.







“루카스에게 바로 편지 좀 붙여줘. 편지를 어떻게 부치는지 모르겠으면 케이트나 버나드에게 부탁하면 될 거야.”



“네! 금방 다녀올게요!”







메리는 극비 서류라도 되는 양 편지를 받아 들고 품에 갈무리했다. 침실 문을 살짝 열고는 첩보 영화라도 찍는 양 두리번거리다 후다닥 뛰어나가는 꼴이 못 봐줄 지경이었다.







‘조사관들이 다들 쟤 같으면 정말 큰일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엘리제는 욕실로 들어갔다. 메리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꽤 지체되긴 했지만 보온 마법이 걸린 욕조의 물에선 뽀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편리한 세계야.’







속옷까지 훌훌 벗고 욕조 안에 들어가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며 엘리제는 다시 반지를 톡톡 두드렸다. 노란 점 하나가 지도 곳곳을 열심히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걸 메리한테 보여줘, 말아.’







메리가 아무리 순수해 보이고 천진하게 행동한다 해도 엘리제는 그녀와 모든 정보를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메리는 엘리제가 아닌 필립의 부하직원이며 중간지대 환상 컨트롤타워의 조사관이었다. 세계에 꼭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던 그녀의 마음가짐이 언젠가 엘리제의 개인적인 이익과 상충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쟤는 너무 솔직해. 거짓말을 해도 바로 티가 날 거야.’







악마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돌아다니는 이상, 메리가 그와 마주칠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둬야 했다.







조사관을 찾는 데 필요한 정보는 공유하되 몇 가지 정도는 감출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루카스와의 거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뭘 대가로 그를 돕기로 했는지, 그녀는 메리에게 말하지 않았다.







‘환상 호수 얘기도 일단은 하지 말자.’







나름 이용할 구석이 있는 것들인데 중간지대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도로 회수하거나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면 그녀 손해가 아닌가.







‘천천히, 가능한 한 안전하고 확실한 루트로만 움직이자.’







어차피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에 있었다. 안락하고 즐거운 사후세계 생활을 보장받으려면 변수를 최대한 없애야 했다.







‘그리고 카인, 그놈과의 악연을 깨끗이 마무리 짓는 거야.’







생각을 모두 정리한 엘리제는 머릿속을 깨끗이 비우고 느긋하게 욕조에 몸을 기댔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피부의 천적이 아닌가. 기껏 최고급 입욕제를 풀어 호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때를 즐기지 못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끝나면 마사지도 해달라고 해야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날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며 엘리제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











블레이크와 루오스 백작의 대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엘리제는 홀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녀가 요청한 대로 스콘과 홍차, 과일 샐러드가 식탁 위에 차려졌다.







버터 향 가득한 스콘을 한 입 베어 물며 엘리제는 행복한 신음을 흘렸다.







‘이게 사는 거지.’







다이어트, 체중 관리, 몸매 관리로 인해 먹는 것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그녀에게 아무리 먹어도 비실비실한 지금의 몸은 축복이었다.







프로이젠 대공성의 요리장 커크는 정말 최고였다. 재료가 신선한 덕도 있겠지만, 이토록 맛있는 스콘을 엘리제는 살아생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엘리제는 케이트가 꾸린 짐 목록을 서면으로 확인했다. 필요한 건 모두 제도에서 구할 수 있기에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다만 엘리제는 케이트가 꼭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들이 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번 케이트의 유능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공성에서 지내며 엘리제가 한 번이라도 ‘좋다’라고 평가한 건 대부분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특히 포도주가 매우 마음에 들어.’







물론 제도에 가도 좋은 품질의 포도주를 구할 수 있겠지만, 원래 술이란 건 다다익선 아닌가. 맛과 향이 다를 테니 새로 구하는 건 그것대로 즐기면 그만이었다.







‘찻잔 세트까지는 안 챙겨도 됐을 텐데.’







그래도 케이트의 세심함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건 당연했다.







엘리제가 찻잔을 내려놓고 마지막 남은 스콘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식당 문이 열렸다. 그녀가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는 사이, 식탁으로 다가온 블레이크가 그녀 곁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내가 늦었군요.”







서둘러 온 게 역력한 기색이었다.







“아니에요. 여태 식사도 못 했죠? 이럴 줄 알았으면 기다릴 걸 그랬네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블레이크가 식탁 위를 눈으로 슥 훑었다. 손바닥만 한 접시에 남아 있는 빵 부스러기와 그만큼 작은 샐러드 접시 그리고 찻잔을 한 번씩 보고서 그녀를 바라봤다.







“설마 이게 전부입니까?”



“네?”



“이것밖에 먹지 않았냐는 말입니다.”



“아…. 네. 그렇긴 한데….”







그는 시종을 명하여 요리장 커크를 불러오게 했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안감이 가득한 얼굴로 주방에서 나온 요리장 커크가 블레이크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싸늘한 눈으로 커크를 바라보며 블레이크가 말했다.







“커크. 대공비의 식사가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닌가. 설마 내가 확인하지 않을 땐 늘 이런 식이었던 건가.”



“앗, 블레이크. 제가 부탁한 거예요.”







엘리제가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으나 블레이크의 차가운 시선은 커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블레이크와 엘리제를 바라본 그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제 실수입니다. 다시는 이럴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게 있을 시엔 정찬에 더하여 내오도록. 남기시더라도 부인의 모든 식사를 충실히 준비토록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블레이크는 굳었던 표정을 살짝 풀었다.







“좋아, 믿겠다. 부인이 자네의 요리 솜씨를 여러 번 칭찬하더군. 나와 다시 식사할 테니 최선을 다해 주었으면 좋겠군.”



“네, 전하. 맡겨주십시오.”







잔뜩 기합이 든 표정으로 대답한 커크가 허둥지둥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블레이크의 시선이 엘리제를 향했다. 엘리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이럴 땐 그가 정말 대귀족인 게 실감이 났다.







“엘리제.”



“네?”



“클랜튼에서 어찌 지냈든 이제 부인은 공국의 왕비입니다. 나는 그대의 시중을 드는 이들이 부인을 모시기 편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이 싫습니다.”







‘아닌데, 나 은근 까칠한 사람인데.’







“그리고 너무 적게 드시는 것 같습니다.”







그거에 대해선 할 말이 있었다.







“제가 원래 아침을 잘 안 먹어 버릇해서요.”







그는 놀란 표정으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럼 부인의 몸이 이토록 연약한 이유가….”



“아니에요. 그냥 먹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블레이크는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클랜튼에 대한 그의 평가가 매우 안 좋아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엘리제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모르겠다. 알게 뭐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