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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을 경험할 때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해가 떠오른 시각이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수면에 쏟아져 반짝이고 있었다.
엘리제는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경관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어찌 되었는지 반지의 빛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혹시나 잘못되었을까 봐 불안했지만, 혼자 남을 때까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엘리제는 블레이크와 함께 호숫가를 떠났다.
숲 입구에서 기다리던 기사들은 떠나기 전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피곤한 기색도 없었다.
“주군.”
기사단장 클로드가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밤새 수고했군. 이만 돌아가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대공의 모습에 클로드는 엘리제와 블레이크를 번갈아 쳐다보다 힘차게 대답했다.
“네!”
환상 속에서 한숨 푹 잔 덕분인지 엘리제도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신기하네.’
그녀의 본래 체력이라면 블레이크와의 섹스만으로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엘리제는 오랜만에 조금 걸었다고 허벅지와 종아리가 좀 뭉친 것 외엔 아무렇지 않았다.
블레이크가 다정히 그녀의 허리를 감아 마차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고마워요.”
엘리제의 눈웃음에 그의 표정이 다시 또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기사들에게 보이는 근엄하고 서늘한 표정과 지금의 격차가 너무 커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귀엽기는.’
엘리제는 그와 나란히 앉아 마차가 출발하길 기다렸다. 기사들이 말에 오르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엘리제는 문득 블레이크의 어깨너머, 기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음.’
이번에도 바트 루오스였다.
그는 엘리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틈만 나면 그녀 쪽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대체 왜 저러는 거람.’
어떤 이유가 있든 지나치게 어리숙한 행동이었다. 스무 살은 가뿐히 넘었을 법한 실력 있는 기사가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좀 더 눈여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엘리제는 바트에게서 시선을 뗐다.
***
외성을 지나며 기별이 갔는지, 본성 앞엔 시종장 버나드와 시녀장 케이트가 함께 나와 있었다.
“별일 없었나?”
블레이크의 질문에 버나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루오스 백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루오스 백작이라면 프로이젠의 가신이자 바트와 앨런의 아버지였다.
“백작이? 온다는 얘길 못 들은 것 같은데.”
“급히 상의드릴 게 있다고 어제 오후쯤 방문하여 지금까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블레이크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엘리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다녀오세요. 내내 기다린 걸 보면 중요한 일일 텐데.”
“…알겠습니다. 쉬고 있어요. 금방 갈 테니.”
‘뭘 또 금방 온대. 천천히 와도 되는데.’
1층에서 그와 헤어진 엘리제는 3층에 있는 그녀의 침실로 돌아왔다.
엘리제를 따라 들어온 케이트가 그녀의 탈의를 도와주었다. 환상 속에서 블레이크의 엄청난 악력에 한번 쫘악 찢어졌던 가여운 드레스는 상한 곳 하나 없이 말짱했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응. 부탁해.”
케이트가 욕실 쪽으로 사라지자 엘리제는 냉큼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되었으니 업그레이드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때였다.
‘설마 대본까지 날아간 건 아니겠지.’
엘리제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반지를 톡톡 두드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생겨난 패널 디스플레이에 알림창이 하나 떠 있었다.
『시스템 버전 업그레이드가 비정상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구성요소가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역시나 업그레이드는 실패했구나.’
엘리제는 알림창의 확인 버튼을 누른 후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인터페이스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원래는 없던 메뉴바까지 생겨 있었다.
‘이건 뭐지.’
메뉴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좌르륵 목록이 떠올랐다. 엘리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타락한 연인(ch21)
▶대본
▷작품소개
▷등장인물 열람
▷지도』
업그레이드 이전엔 목록을 골라서 들어갈 것도 없이 대본 하나만 달랑 들어 있었다. 원작의 제목과 채널 표시, 작품소개, 등장인물 열람, 지도 모두 새로 생긴 항목이었다. 엘리제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품소개’를 눌러 보았다.
『구성요소가 불완전합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료해 주세요.』
“…….”
엘리제는 불안한 마음으로 ‘등장인물 열람’도 눌러 보았다.
『구성요소가 불완전합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료해 주세요.』
이번에도 같은 내용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뭐야, 되는 게 없잖아.”
기대감을 저버린 채 엘리제는 마지막으로 ‘지도’ 항목을 눌렀다.
『구성요소가 불완전합니다. 제한된 정보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완료해 주세요.』
알림창의 문구가 이전 두 개의 메뉴 때와는 조금 달랐다. 알림창을 끄자 화면에 검은색 선들이 빠르게 그어지더니 어떠한 형상을 만들었다.
“오…?”
완성되자 도면처럼 보이는 그것이 무얼 보여 주고 있는지 엘리제는 금방 알아봤다.
‘대공성 지도잖아!’
부분부분 뿌연 곳도 있었지만, 그녀가 있는 3층의 경우 거의 빠진 곳 없이 표시되고 있었다. 아마도 직접 탐색한 곳만 정확히 보여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점들은 뭐지?’
다양한 색깔의 점들이 도면 곳곳에 찍혀 있었다. 색깔은 제각각이었다. 파란색도 있었고 노란색, 회색도 있었다.
‘여긴 내 방인데.’
엘리제가 있는 방에도 노란 점이 하나 찍혀 있었다. 그리고 욕실로 보이는 곳에는 파란색 점이 찍혀 있었다.
‘혹시 등장인물의 위치를 보여 주는 건가?’
색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같은 3층, 블레이크의 서재엔 회색 점이 하나 있었다.
엘리제는 화면을 아래층으로 넘겨 보았다. 2층 계단 쪽에서 노란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사라진 노란 점은 3층 계단 쪽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러곤 빠르게 엘리제의 침실 쪽으로 이동했다.
엘리제가 패널을 종료하는 순간,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엘리제 님!”
엘리제는 덮어썼던 이불을 천천히 내렸다. 반쯤 예상하였던 대로 메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진짜네. 이거 꽤 쓸 만하겠는데.’
문을 닫고 쪼르르 침대 앞으로 다가온 메리가 털썩 주저앉았다.
“저를 빼놓고 외출을 하시다니이…. 게다가 외박까지…. 어떻게 그러실 수가아….”
“네가 날 따라가면 대공성에서 벌어지는 심상치 않은 일들을 누가 내게 보고하니?”
그녀의 징징거림이 듣기 싫었던 엘리제는 아무 말이나 대충 내뱉었다. 목욕 준비를 위해 욕실에 들어간 케이트가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기에, 엘리제는 일단 반지에 관한 얘긴 꺼내지 않았다. 몹시 궁금하긴 하지만 메리의 성격상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심상치 않은 일들이요?”
메리가 눈을 끔뻑였다.
“그래. 내가 자릴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말해 보렴.”
“어. 어….”
버퍼링이라도 걸린 듯 버벅대던 메리가 아, 하고 손뼉을 짝 쳤다.
“제도로 가져갈 짐 챙기는 게 어제부로 모두 끝났어요.”
“그래?”
“네. 시녀장님이 커다란 가방 10개를 꺼내더니 촤촤촥…!”
“…알겠으니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렴.”
“편지가 한 통 왔고요.”
“누구에게서?”
엘리제의 물음에 오른손을 입가에 구부려 붙인 메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루카스 님이요.”
“비공식으로?”
“아니요? 아닌데요. 저기 화장대 위에 있어요.”
그런데 왜 비밀인 척하고 난리람, 생각하며 엘리제가 턱짓했다.
“좀 가져다주렴.”
“네!”
섭섭함은 그새 모두 해소되었는지, 메리가 쾌활한 표정으로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메리.”
“무엇이든 시켜만 주세요, 엘리제 님!”
“응, 그래. 거기 얌전히 서 있으렴.”
엘리제가 편지의 겉봉을 뜯는 사이 케이트가 욕실에서 나왔다.
“비전하, 목욕 준비가 끝났습니다.”
입욕제의 은은한 향내가 침실까지 흘러들었다.
“제가 목욕 시중을….”
“아니, 괜찮네. 느긋하게 있고 싶으니까. 제도에 갈 짐을 꾸리느라 수고했다고 들었는데, 따로 부를 때까지 좀 쉬도록 해.”
메리를 힐끔 쳐다본 케이트가 엘리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 비전하.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그렇게 하지.”
케이트가 방을 나가자, 엘리제는 루카스에게서 온 편지를 펼쳐 보았다.
‘나의 비둘기에게…라니. 나를 그딴 새대가리와 비교해?’
아마도 뭔가 애칭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아무거나 창밖에 보이는 걸 가져다 쓴 것 같았다.
“뭐래요?”
편지 내용이 궁금했는지 메리가 고개를 쭉 빼고 기웃거렸다.
“봐.”
메리에게 편지를 넘기고 엘리제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제도에서 지내는 자기의 일상을 세세히 적은 그의 편지는 보고서만큼 딱딱하고 정나미가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엘리제는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자기 힘드니까 빨리 좀 와 달라 이거지.’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긴 했다. 그에게 얻어낼 게 있는 이상 순조로이 임무를 마치도록 협조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연기력은 하루 이틀 가르친다고 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후 열흘이 지난 건가?”
날짜를 헤아려 보던 메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로 열흘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열흘 동안 내게 온 편지가 이것뿐이야? 친구도 없나?”
딱히 답을 기대하고 말한 게 아닌데 냉큼 메리가 답을 들려주었다.
“엘리제 클랜튼 평판 최악이잖아요. 친구 하나도 없대요.”
“뭐야, 넌 나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았어.”
“하녀들이 하는 얘길 들었죠.”
엘리제는 전혀 몰랐다. 대공비로서 지내는 동안 사용인들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티를 낸 적이 없었기에.
‘친구라…. 하긴, 없는 게 더 편하긴 하려나.’
친구랍시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계속 찾아오고 편지를 보내면 골치 아플 것 같긴 했다.
‘내가 친구를 사귀어 봤어야지.’
물론 카메라가 돌고 있는 곳, 혹은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인 척 구는 동료들이 몇 있긴 했지만 돌아서면 쌩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깎아내리느라 바빴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틀어박혔을 때 그녀에게 사적으로 연락을 취하거나 찾아온 동료는 카인 리베르토가 유일했다. 나머지는 에이전시 관계자들과 변호사, 기삿거리 좀 따내려는 기자들이었다.
‘그놈도 결국 친구는 아니었던 거니까. 한 명도 없었던 게 맞는 거지.’
탑스타였던 엘리제와 고귀한 대공비 엘리제가 똑같이 친구가 없다는 게 좀 우습긴 했지만,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연락 없는 게 친구뿐만이 아니잖아. 가족 사이도 나쁜 건가?’
일방적으로 눈 밖에 난 건지 아니면 서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화목한 가족의 모습은 아닐 거란 생각이 아주 살짝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법도 발달한 이 세상에서 아무 기별 없이 이토록 조용할 순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