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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장 케이트의 안목은 오늘도 역시나 훌륭했다. 엘리제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어깨를 드러낸 나들이용 드레스 위에 숄을 둘렀다. 망사 베일이 달린 모자와 양산도 잊지 않았다.
외성까지 둘러보려면 말이나 마차가 필수였기에 엘리제와 블레이크는 지붕이 없는 마차를 이용했다. 기사단장 클로드와 바트 루오스 포함, 말을 탄 기사 넷이 마차를 호위했다.
엘리제는 유심히 성의 안팎 풍경을 눈에 담았다. 대본만 봐서는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특히 <타락한 연인>은 로맨스에 치중된 영화이기에 더욱 그랬다. 세계관이나 시대적 배경, 일반인들의 생활상 등이 대본 속에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이 세계에 대해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내성 안이 대공 부부를 위한 거주공간이라면 내성 밖과 외성 안은 도시와 같았다. 용도에 따라 거주지구와 상업지구 등 구역이 나누어져 있었다.
“가게들이 많네요.”
“제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필요한 것을 구하는 데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프로이젠에서 직접 관리하는 상단 중에는 물품 이동 마법진을 개별 보유한 곳도 있으니까요. 주요 지역의 산물들은 모두 당일 내 받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제는 떡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물론 속내는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마법이란 거 엄청 좋잖아! 어쩐지 해산물이고 뭐고 갓 잡은 양 싱싱하더라니!’
“클랜튼 후작도 마법에 능하시지요?”
“네?”
“듣기론 아카데미를 최연소로 수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엘리제는 당연히 그런 설정 따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라는 표정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내겐 아버지가 있지. 루카스에겐 어머니가 있고. 둘이 재혼했다는 설정이잖아. 여태 그 생각은 못 했는데. 설마 제도에서 만나진 않겠지?’
<타락한 연인>에 클랜튼 후작 내외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작이 보여 주는 장면 외에 어딘가에서 그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루카스에게 편지를 보내야겠네. 사진이랑 정보 좀 보내 달라고 해야지.’
가족에 대한 다른 얘기가 더 나올까 봐, 엘리제는 은근슬쩍 그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당신은요?”
“아카데미 말입니까?”
“네.”
“난 행정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행정이요?”
엘리제는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베스트(Vest)까지 갖춘 완벽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몸이 어떠한지 엘리제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어깨와 가슴, 복부, 등, 허벅지, 어느 한 곳 가리지 않고 촘촘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 행정 학부라니. 뭔가 낭비같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놀랐나 보군요. 클랜튼 경은 기사 학부 출신이지요.”
“…네.”
원작 남주 루카스 클랜튼이 어느 학부 출신인지에 대해서도 엘리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엘리제는 이번에도 말을 아끼며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히 블레이크는 그에 대해 더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난 프로이젠의 군주니까요. 원하건 원치 않건, 난 기사로서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에 해당하지요.”
하긴 초야 다음 날에도 그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 그가 머무는 장소는 집무실이었고 처리해야 할 대부분의 일이 행정 업무일 것이다.
갑작스레 엘리제는 몹시도 궁금한 게 생겼다.
‘이걸 물어봐도 될까? 엄청 궁금한데. 하지만 물어보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머뭇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질문 하나만…. 아, 아니에요.”
“내게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십시오.”
“하지만, 기분 나쁘실 것 같아서.”
“그럴 일 없습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엘리제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당신과 오라버니는 겨뤄 본 적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엘리제는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그게 왜…. 궁금합니까?”
“그야 당연히….”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질문한 거였다. 본래 누구나 그런 것을 궁금해 하잖은가.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둥.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고, 엘리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적당한 대답을 찾아냈다.
“당신이 제 남편이니까요?”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누가 뭐래도 제가 의지할 사람은 블레이크 당신이잖아요. 상대가 누구든 전 당신이 이겼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당신을 응원할 거고요.”
“…그렇습니까.”
그의 입가에 기쁨의 미소가 살며시 지어졌다. 대충 잘 넘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리제는 다시 바깥 구경을 하러 고개를 돌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기대에 꼭 부응하겠습니다.”
“네?”
“아니. 아닙니다. 나온 김에 가게들을 한번 둘러보겠습니까?”
“좋아요.”
안 그래도 궁금했던 터라, 엘리제는 기꺼운 얼굴로 대답했다.
***
쇼핑. 그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 특히 여행지에서의 쇼핑은 더욱 그러하다.
‘여기가 여행지는 아니지만.’
이미 제도행에 앞서 드레스를 주문해 놨지만, 엘리제는 이왕 나온 김에 몇 벌 더 샀다. 보석도 사고 구두도 샀다.
대공가의 경제 사정이 어떤지 몰라 처음엔 다소 조심스러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금세 알게 됐다. 대공비의 품위 유지비 명목으로 책정된 액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내 남편, 부자구나!’
엘리제는 흐뭇해졌다. 얼굴도 잘생기고, 몸도 좋고, 밤일도 잘하는데 갑부이기까지 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 일이 있을까.
쇼핑을 마치고 시원한 음료 한잔을 마시러 들어갔더니 카페에 있던 손님들이 알아서 모두 나가 주었다. 무얼 마실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블레이크가 손수 빼준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맛있는 음료와 디저트들이 테이블 가득 차려졌다.
그녀의 남편은 그야말로 없던 애정도 샘솟을 만한 재력과 권력의 소유자였다.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그녀를 유심히 살피던 블레이크가 말했다.
“네. 정말 좋아요. 선물해 주신 옷들 잘 입을게요. 고마워요, 블레이크.”
“…별것 아닙니다. 선물이라 할 것도 없이 부인의 것이고요.”
“그래도 선물이라고 할래요. 그래야 기분이 좋잖아요.”
“그렇습니까.”
“네. 누군가에게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거든요.”
생전에 재력가와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지 않았지만, 엘리제는 주로 자신이 쓸 건 제 돈으로 사는 편이었다. 그때 뭘 사줬으니 이러면 안 된다는 둥, 돈만 밝히는 꽃뱀이라는 둥 뒤늦게 지껄이는 소리가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무명시절에도 그녀는 굶을지언정 얻어먹지 못했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갚아 줘야 직성이 풀렸다. 자존심 혹은 지지 못하는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여러 번 뒤통수를 맞은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고도 단 한 사람, 저도 모르게 믿었다가 결국 마지막에 제대로 당했다. 유일했건만, 엘리제는 그에게마저 배신당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지금도 이유 없는 호의나 순수한 애정 같은 것들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가 블레이크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어서였다. 선의, 혹은 진실한 사랑 같은 건 본래 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게 아닌가.
“엘리제….”
그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클랜튼에선, 부인을 아껴 주지 않은 겁니까?”
예상외의 질문에 엘리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 그건 나도 모르는데.’
클랜튼 후작 부부의 얼굴도 모르는데 거기에서의 취급을 그녀가 알 리 없다. 엘리제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잘 모를 땐 상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애매한 대응이 최고다.
“아니에요. 많이 아껴 주셨어요.”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빛이 어떠할지 엘리제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으으…. 이런 분위기 질색인데.’
그래도 엘리제는 꾹 참았다. 어쨌든 그녀에 대한 그의 감정에 안쓰러움이 더해지는 건 나쁜 징조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를 연민할 때 대상의 허물과 실수를 어느 정도 눈감아 주는 법이다. 너그러워진다 할 수 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해야지.’
“미안합니다. 내가 괜한 질문을….”
그가 죄책감 어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표정 짓게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몇 배로 아껴 줄게요.”
‘그래. 바로 그거지.’
바람직한 그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엘리제는 들썩이는 입꼬리를 열심히 붙잡았다. 그녀의 입가가 의도치 않게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엘리제….”
이에 블레이크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음은 당연했다.
‘아, 괜히 좀 미안한데.’
괜스레 겸연쩍어진 엘리제는 블레이크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응?’
그러다 그녀는 뜻밖의 사람과 갑작스레 눈이 마주쳤다. 카페의 문 앞에 서 있던 바트 루오스였다.
그는 그녀와 시선이 맞닿은 순간 화들짝 놀라며 다른 곳을 바라보는 척했다. 그래서 엘리제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날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저렇게 놀라는 걸 보면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
‘흐음….’
엘리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카페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성으로 돌아가는 대신 엘리제를 외성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보여줄 게 있습니다.”
“이 시간에요?”
“밤에 봐야 더 특별합니다.”
엘리제는 그가 살짝 흥분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숨겨 놓은 보물을 보여주고 싶어 잔뜩 들떠 있는 어린아이 같았다. 엘리제는 꼬치꼬치 묻는 대신 깜짝 놀랄 준비를 하며 그를 따라갔다.
대공성 북쪽엔 영주민 출입이 금지된 자그마한 숲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엘리제와 블레이크는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단둘이 오솔길을 걸었다.
엘리제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숲의 청량함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아, 좋다.’
탁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맑은 공기와 해를 가려 주는 우거진 나무들, 곳곳에 피어 있는 야생화가 그녀의 마음을 여유롭게 만들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좌우의 나무들이 사라지고 탁 트인 장소가 나타났다.
“와, 여기 호수가 있었네요. 너무 예뻐요.”
밤하늘을 닮아 눈부신 별빛을 제 안에 빼곡하게 가둔 아름다운 호수가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렇지요.”
그것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블레이크는 아직 ‘짠!’ 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뭔가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