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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루오스. 그리고 바트 루오스. 프로이젠의 가신인 루오스 백작가의 형제.
엘리제에게 부러진 검날을 날린 기사들이었다. 블레이크가 호명한 그들의 이름이 어쩐지 낯설지 않아 오늘 아침 미리 찾아봤었다. 역시나 그들은 <타락한 연인>에 잠깐이나마 등장하는 인물들이었다.
방 안에 들어온 그들은 다짜고짜 엘리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응?’
“비전하!”
“부디 무슨 벌이든 내려주십시오!”
귀가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외침에 엘리제는 흠칫하여 몸을 뒤로 물렸다.
‘저 중에 누가 바트고 누가 앨런이지?’
이런 상황에서 그게 그토록 중요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형인 바트 루오스. 그는 마나를 머금은 검날을 잘라낼 정도의 실력자였다. 실력만 두고 본다면 기사단장 클로드에 필적하지만,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과하게 흥분하면 예의 사태처럼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있었다.
반면에 앨런은 유순하며 침착했다. 그는 클로드를 제외한 모두가 꺼리는 바트의 대련 상대를 기꺼이 자처하며 형의 단점을 커버하려 애썼다.
‘그러나 둘 중 내게 더 필요한 건 바트 루오스지.’
원작에서 바트 루오스는 주군인 프로이젠 대공보다 대공비 엘리제를 더 따른다. 그녀의 명을 받아 여주를 골탕 먹이는 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대공비의 사주를 받아 대공에게 거짓말을 고하기도 여러 번. 나중에는 그녀의 죄를 뒤집어쓰기까지 한다.
그러니 미리부터 그를 길들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앨런인데…’
앨런 루오스는 바트가 점점 엘리제에게 물들어 기사의 도리를 저버리자, 결국 형의 반대편에 서서 원작 여주를 돕는 인물이었다. 원작의 설정이 그러하니 엘리제에게 이용당하기는커녕 사사건건 방해할 가능성이 컸다.
‘흠…. 어쩐다.’
엘리제는 고민에 빠졌다.
제도에 가기까지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만약 그때까지 어느 정도 이상 이들을 제 편으로 만들어 놓지 못하면, 제도에서 루카스와 은밀히 만나기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이들이 아니더라도 블레이크가 내게 호위 기사를 붙일 것은 분명해.’
지금은 본성에 머물고 있으니 자유롭게 다니도록 내버려 두지만, 대공비의 안전을 생각하면 제도에서까지 그럴 리는 없다. 자칫 융통성 없는 기사가 따라붙었다가는 꼼짝달싹 못 하게 된다.
그럴 바엔 한 명이라도 충성심 강한 이들 형제를 호위로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바트 루오스?”
엘리제의 부름에 왼편에 있던 기사가 답했다.
“네, 비전하.”
“앨런 루오스.”
“네, 비전하.”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에 다소 험상궂어 보이는 쪽이 바트였고 상대적으로 호리호리하며 부드러워 보이는 고수머리를 가진 쪽이 앨런이었다.
“내가 끝내 벌을 내리지 않으면, 그대들은 어찌할 생각이지?”
“비전하를 해할 뻔한 손목을 내놓겠습니다.”
바트의 단호한 대답에 앨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 건 원치 않아.”
“하면 목숨이라도….”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내게 충성해 볼 텐가?”
엘리제의 말에 바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다갈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떨렸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원작의 설정이라는 거, 무섭구나.’
“받아만 주신다면 이 한목숨 비전하께 온전히 바쳐 충성할 것입니다.”
앨런은 말릴 새 없이 충성을 맹세하는 바트를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앨런 루오스. 경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군.”
“아닙니다. 저 또한 비전하께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다만….”
“다만?”
“기사로서 대공 전하께 이미 충성을 맹세한바, 주인을 바꾸려면 주군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전하께 먼저 다녀오도록 해. 그 후에, 경들에게 나의 안전을 맡기겠다. 물론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말이지.”
“네, 비전하.”
힘 있게 외친 바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지간히 성격도 급하고 다혈질이네.’
따라 일어선 앨런이 형의 옆구리를 찔러 함께 예를 취하곤 방을 나갔다. 방 한편에 서 있던 메리가 그녀에게 쪼르르 다가왔다.
“엘리제 님은 제가 지켜드리면 되는데요.”
“넌 내 비장의 한 수니까.”
엘리제의 말에 메리는 텁, 하고 제 입을 막았다. 감동하여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그런… 제게 그렇게나 막중한….”
“응. 그러니까 넌 되도록 네 능력을 숨기고 평범한 시녀인 척해야 하는 거야.”
“네! 염려 마세요, 엘리제 님!”
“그나저나 쟤들을 어떻게 구슬려서 내 편으로 만든담.”
엘리제는 턱을 괴고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타락한 연인> 속 대공비가 어떻게 바트를 제 편으로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비중 적은 조연이다 보니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역시 미인계?”
연기를 아무리 잘한다고 해봤자 따지고 보면 그녀가 가진 능력이 그것뿐이지 않은가.
“아니야. 그랬다가 홱 돌아 버리면 곤란해.”
엘리제는 아무리 자신이 예쁘다 한들 남자를 멋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뻐서 더 그랬다. 현혹하는 것까진 얼마든지 가능할지 몰라도 이후 상대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이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카리스마 같은 거로 휘어잡으면 딱인데. 없던 충성심도 생겨나게 만드는 뭔가 없을까?”
생각하니 엘리제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해도, 메리의 괴력은 정말 굉장하지 않은가.
“메리, 나는 왜 너 같이 편리한 능력이 없니?”
엘리제의 말에 메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필립이 아무 얘기 안 했어요? 보통 조사관들은 한두 개씩 특수능력을 부여받기 마련인데.”
“대충 상황 브리핑만 받고 끝이었어. 좀 급하긴 했거든.”
“아아…. 그럴 수가. 그런 중요한 얘길 빼먹다니, 필립이 나빴네요.”
“그렇지? 뭔가는 있는 거겠지?”
“그럼요. 함께 찾아봐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답지 않게 믿음직스러운 그녀의 말에 엘리제는 꽤 놀랐다. 메리에게 이런 면도 있구나 싶었다.
“어떻게 도와줄 건데?”
“음…. 일단,”
메리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혹시 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번 뛰어내려 보시는 건 어때요?”
“…….”
한순간이나마 무언가를 기대했던 저 자신을 욕하며 엘리제는 도로 창문을 닫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악마 놈이 내게서 뭔가 냄새가 난다고 그랬는데. 세계관 보정 받은 거냐고도 말했어.”
“앗, 그래요?”
메리가 제게 달라붙어 개처럼 킁킁대는 걸 엘리제는 참고 기다려 주었다.
“스테이크 드셨군요! 아, 나도 먹고 싶다!”
“…….”
혼자 찾아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엘리제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일주일 안에 기본 요가 자세 열 동작 정도는 할 수 있는 몸으로 만드는 게 그녀의 첫 번째 목표였다.
***
블레이크는 바트와 앨런의 청을 수락했고, 직후 그녀를 찾아왔다.
안 그래도 제도에 가기 전 그녀의 호위 기사를 정할 생각이었던 듯 그는 그들 외에도 다른 몇몇 기사들에 대해 그녀에게 거론했다.
“최소한 넷 이상은 상시 부인을 호위해야 합니다.”
“그렇게 많이 데리고 다녀야 한다고요? 제도의 치안이 그렇게 안 좋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요? 몇 명의 호위 기사를 대동하시나요?”
“나와 부인은 다르지 않습니까. 프로이젠의 대공을 해할 수 있는 이는 황제 폐하 외엔 없습니다.”
“전 그런 당신의 부인이에요.”
물론 엘리제는 블레이크가 하는 말뜻을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손아귀 힘만으로 침대 상판을 부쉈다. 그건 단순히 힘이 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프로이젠 공국이 독립된 왕국 못지않은 자치권을 가진 이유. 세 개나 되는 기사단을 보유해야 하는 이유. 그 모든 것엔 이유가 있었다.
블레이크 프로이젠은 많은 전장을 경험한 지휘관이었다. 그 자체의 무력 또한 평범한 수준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대공이라는 작위를 생각지 않더라도 그에게 함부로 덤벼들 사람은 없었다.
반면 엘리제의 경우엔 부녀자에 불과하다. 그녀가 대공비라서, 혹은 대공비인 줄 모르고 위협을 가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제는 끝까지 우겨야 할 이유가 있었다. 호위 기사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녀와 루카스가 세운 계획은 실행하기 어려워진다.
“당신과 함께 있는 한 전 안전할 거예요.”
“그야 당연합니다.”
“그럼 됐네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내가 부인 곁에 없을 때를 말하는 겁니다.”
“그럴 일이 많을까요?”
“그리 많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 나 대신 부인을 지켜줄 호위가 필요합니다.”
“그런 경우엔 꼭 바트 경, 앨런 경과 동행할게요. 물론 메리도요. 제 개인 시녀 겸 호위로 메리만 한 아이도 없죠.”
이쯤 되자 블레이크는 더는 그녀를 설득하길 포기했다. 더 무언가를 말해 엘리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되도록 내가 부인과 늘 동행하도록 하지요.”
“감사해요, 블레이크.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돼요.”
와락 품에 기대오는 그녀를 블레이크가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 소리가 급격히 빨라지는 것이 천 너머 그녀의 귀에 고스란히 들려 왔다.
‘이렇게 알기 쉬워서야.’
가슴이 간질간질해져 괜스레 하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 그의 몸은 그녀에게 너무 투명하게 반응했다.
“부인….”
그녀를 향한 그의 목소리에 은근한 기대감이 실려 있었다.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과 닿은 몸의 열기가 익숙했다.
엘리제는 뜨끔 했다. 지금은 오후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고 그녀는 이대로 하루를 날리기가 싫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그녀의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그만두지 않는다는 걸 이제 엘리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저…. 블레이크, 부탁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그래서 엘리제는 슬그머니 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 내성 안도 채 구경하지 못해서요. 둘러보러 다녀와도 될까요?”
“아…. 이런. 그렇군요. 내가 너무, 음. 미안합니다.”
당혹스러웠는지 그가 허둥대며 말을 더듬었다.
“아니에요. 당신도 바쁘실 테니….”
“말했지 않습니까. 부인에 대한 일보다 내게 더 중요한 건 없습니다.”
“그럼, 당신이 직접 구경시켜 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기뻐요! 금방 채비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엘리제가 뒤꿈치를 들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블레이크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윽.”
엘리제의 작은 신음에 그가 황급히 그녀를 놔주곤 한걸음 물러났다. 짙은 색 그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그녀의 눈에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천천히 준비하고 내려오십시오.”
확연히 부푼 블레이크의 그곳을 모른 척하며 엘리제가 빙긋이 웃었다.
“네, 블레이크.”
블레이크의 몸이 한차례 더 움찔, 경직됐다.
그가 거의 도망치듯 방을 나간 후에야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여러 가지 의미가 뒤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발정기야 뭐야.’
눈만 마주치면 덤벼들려 하는 그를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체력 강화는 필수임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