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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제!”
블레이크가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메리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곧장 달려들어서는 엘리제를 품에 넣었다.
“괜찮습니까? 괜찮은 겁니까?”
저를 끌어안은 그의 몸이 그야말로 벌벌 떨리고 있어, 엘리제는 괜스레 겸연쩍었다.
‘하긴, 정말 죽을 뻔했지.’
한번 죽었었지만 또 죽는 건 사양이었다. 게다가 칼에 맞아 죽으면 매우 아프지 않을까. 아프지 않게 각별히 신경 써 죽여 줬던 카인 리베르토 생각이 아주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물론 고맙거나 한 건 전혀 아니지만, 방법만은 나쁘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요, 블레이크.”
제법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가슴에 워낙 세게 눌려있어서 그런가 웅얼거림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떨고 있는데 뭐가 괜찮단 말입니까.”
‘아니, 지금 떨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인데…’
아무래도 블레이크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온 기사단이 등 뒤에 있는 이 시점에, 한 손으로 그녀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물론 다친 곳이 없는 건지 살피느라 그런 거겠지만 엘리제로선 매우 민망했다.
엘리제는 간신히 한 손을 빼내어 제 귓불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정말로 괜찮아요. 그러니 놔주세요.”
“하지만….”
“어서요.”
그녀의 단호한 어투에 블레이크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놔주었다. 그런 연후에도 떨리는 눈으로 어디 상한 곳이 없는지 샅샅이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블레이크는 엘리제에게 정신이 팔려 메리의 괴력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제는 살짝 호흡을 골랐다. 자신의 목소리가 평상시와 다름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생긴 후에야 그녀는 메리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메리, 정말 고맙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손은 괜찮니?”
“네, 그럼요. 이깟 쇳, 읍읍…?”
엘리제는 감동한 척 재빨리 그녀의 머리를 당겨 안았다. 은근슬쩍 메리의 입을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득츠그 이쓰.(닥치고 있어)’라고 이 꽉 물고 속삭이자, 메리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라도 멈춘 듯 꼼짝하지 않고 이곳만을 바라보던 이들이 뒤늦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무, 무슨….”
“방금 저 시녀가….”
엘리제는 메리를 안고 돌아서 자연스럽게 제 몸으로 숨겼다.
“의원에게 손을 보여야 할 것 같으니 내 방에 가 있으렴.”
그리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잘 모아 손수건으로 둘둘 감아 버렸다. 물론 그 안에는 우그러진 쇳덩이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를테면 증거인멸이었다.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메리가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곤 본관 쪽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대체 왜 절뚝거리는 거지.’
뭔가 아픈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메리를 해결한 엘리제는 안도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블레이크는 몸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있었고, 엘리제는 놀라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급히 엘리제를 부축했고, 덕분에 그녀는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꼴을 면할 수 있었다.
‘뭐지? 방금….’
블레이크의 눈빛에서 발견한 난폭한 감정들로 인해 엘리제는 얼어붙은 채 그에게 기대 있었다.
그러는 사이, 허겁지겁 달려온 두 기사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명은 검날의 주인, 한 명은 검날을 부러뜨린 장본인인 듯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거의 동시에 외친 두 기사는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였다. 청의 기사단장 클로드 역시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단장인 제 책임입니다. 제가 모든 일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품에 기대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음…. 어쩐다.’
귓가에서 울리는 블레이크의 심장 소리는 빠르고 거셌다. 분노, 불안, 두려움, 살의. 그 모든 것이 뒤엉켜 그를 이토록 흥분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그녀가 나서지 않으면 저들 중 하나는 기어코 목숨을 잃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엘리제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이번 일은 저들만의 잘못이 아니에요.”
새파랗게 들끓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게 다소 무서웠지만, 엘리제는 꿋꿋하게 말했다.
“저는 프로이젠 기사단원들의 놀라운 실력을 보고 감탄했어요. 전하의 말씀대로 제국의 두 기둥이라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더군요.”
그녀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기사들과 블레이크 모두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대련용이라 하지만 불량한 품질의 검이 보급되었다니요. 제 시녀가 ‘차력’에 일가견이 있다고는 하지만 맨손으로 ‘부러뜨릴’ 정도더군요.”
엘리제는 부러 몇 단어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기사단장 클로드는 입을 뻐끔거렸다. 프로이젠 기사단에서 연습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마나를 담을 수 있는 등급의 스틸 블런트였다. 불량한 품질이라 불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엘리제의 말대로 이미 한 차례 부러졌고, 시녀의 손에서 한 번 더 부러졌다.
‘아니, 근데 단순히 부러뜨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클로드는 멍하니 생각했다. 물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 밖에 낼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 대공비가 기사들을 옹호하려 한다는 것만은 모두가 눈치챘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엔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같은 이유로 소중한 기사단원들 중 누군가가 다친다면 정말 가슴 아플 거예요.”
블레이크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말이 맞습니다. 대련 중 날이 부러지는 사고는 자칫 큰 부상을 부를 수 있지요.”
위험할 정도로 난폭해졌던 블레이크의 감정이 그녀의 몇 마디 말에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기사단 물품을 보급하는 이에게 말해 스틸 블런트의 등급을 한 단계 높이라 명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엘리제가 블레이크에게 좀 더 몸을 기대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사뭇 애교스럽게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저는 이러한 일에 무지해요. 하지만 전하께서 제 말에 귀 기울여 주시니, 얼마나 기사단을 아끼시는지 알 것 같아요. 함부로 움직인 저에게도 잘못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 일은 조용히 넘어가 주세요.”
“하지만, 부인….”
“무엇보다 기사단과 처음 인사하는 자리잖아요. 저로 인해 누군가 처벌받으면 모두가 절 껄끄럽게 생각할 거예요.”
“감히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부인은 나와 더불어 이 프로이젠 공국의 주인입니다.”
어쨌든 블레이크는 그녀를 배려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듯했다. 작게 한숨을 쉬곤 바닥에 무릎 꿇은 기사들에게 명하여 일어나게 했다.
“앨런 경과 바트 경은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대련을 펼친 두 기사, 앨런과 바트는 잠시 머뭇대다가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죄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사열을 준비하게, 클로드 경.”
“예, 주군.”
블레이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클로드가 절도 있게 예를 취하곤 기사단 사열을 위해 몸을 돌렸다. 곧바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건 그로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
기사단과의 인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엘리제는 방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메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메리, 넌 참 좋겠구나.”
“왜요?”
“생각이 없어서. 마냥 즐겁지?”
“앗, 어떻게 아셨어요? 엘리제 님은 정말 예리하세요!”
“…….”
엘리제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서 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어쨌든 날 구해준 건 고마워.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구나. 너처럼 힘이 센 사람은 처음 봤어.”
“아이참, 엘리제 님도….”
메리는 수줍어하며 몸을 꼬았다.
‘말을 돌려 하거나 두루뭉술하게 해서는 안 될 아이야. 예시를 들어서 정확하게 지침을 내려 놔야겠어.’
물론 그 전에, 메리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봐야 할 것이다.
“일단 손 좀 내밀어 보렴.”
“네? 왜요?”
의아해하면서도 메리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검날을 움켜쥐었던 손은 엘리제의 예상대로 조금의 상처도 없었다. 반면 한때 검날이었던 쇳덩이는 동그랗고 조그맣게 오그라져 있었다.
‘후… 이게 사람이야, 괴물이야.’
엘리제는 미리 준비해 놨던 붕대로 그녀의 손을 둘둘 감았다.
“며칠은 이러고 있어. 쓸데없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다친 척이라도 해야 해. 그리고 내가 부르기 전까지 방에서 나오지 말고.”
인제 와서야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 싶지만, 사람이란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도 한다.
메리가 우그러뜨린 검날도 챙겨 왔으니 어떻게든 수습 가능한 선에서 소문이 일단락될 것이다.
“네… 엘리제 님….”
메리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겨우 오늘부터 임무에 나서게 되었는데 다시 또 방에 틀어박히는 신세가 되어 속상한 모양이었다.
“곧 부를게. 염려 마.”
“정말요?”
“그래.”
확답을 받고서야 메리는 다시 해맑은 얼굴로 돌아가 그녀의 방을 떠났다. 붕대가 둘둘 감긴 팔을 신나게 휘두르면서. 뭐라 말려야 하지만, 엘리제는 이미 충분히 지쳐 있었다.
엘리제는 터덜터덜 침대로 돌아와 털썩 드러누웠다.
긴 한숨이 나왔다.
‘아까는 정말 죽을 뻔했어.’
코앞까지 쇄도했던 검날을 생각하니 새삼 심장이 서늘해졌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잘못되면 그 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분명 <타락한 연인>의 후반부에도 등장하는 대공비다.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러나 만약 메리를 감옥에서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줄 다른 누군가가 있었을까?
결론은 ‘아니다’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든지 이야기가 틀어질 수 있다는 소리야.’
그렇게 따지면 제도에 가는 일이 <타락한 연인>에 어떤 결과를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중간지대 조사관들 먼저 구해내야겠어.’
메리와 같이 그들에게도 특별한 능력이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저러한 생각을 드문드문 떠올리는 것도 잠시, 엘리제는 금세 깊이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
주삿바늘이 살에 파고드는 감각이 유독 섬뜩했다.
‘카인.’
[곧 편해질 거야, 엘리제.]
화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엘리제는 몽롱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그를 노려봤다. 생리적인 눈물이 눈가에 맺혔다가 볼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카인…’
[금방 따라갈게.]
귓가에 속삭이고서 그는 그녀의 눈 위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그녀를 안심시킬 때 짓곤 하던 녹을 듯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카인…!’
[잘 자, 나의 엘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