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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입고 방을 나가도 되는 걸까?”
부러 얼굴을 굳히며 묻자 케이트의 시원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염려 마세요. 3층 복도를 비워 둘게요.”
그녀의 목적과 정확히 부합하기에, 엘리제는 내숭 떨지 않고 케이트가 가져온 옷 중 하나를 골라 입었다. 속이 살짝 비치는 검은색 레이스 슬립이었다.
“이 위에 가운을 걸치고 가시면 될 거예요.”
“그래. 고마워.”
엘리제는 케이트가 건네준 실크 가운을 슬립 위에 걸쳤다.
“아, 케이트. 메리는 지금 어디에 있니?”
“일단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제 방에 숨겨 놨어요.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대로 있을 거예요.”
“그래, 잘했어. 덕분에 마음이 놓이는구나.”
그녀의 칭찬에 케이트의 볼이 살짝 불그스름해졌다.
“그러시다니 다행이에요. 야식을 챙겨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케이트가 방을 나가자 엘리제는 단단히 여몄던 가운을 다소 느슨하게 만들고는 허리끈을 풀기 쉽게 매듭지었다. 관능적인 느낌이 들도록 살짝 화장을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리저리 거울에 비춰 보며 제 모습을 확인한 엘리제는 만족스레 미소 지었다.
“완벽해.”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고자거나 게이일 것이다.
오래지 않아 케이트가 돌아왔다. 포도주와 잔 두 개, 먹기 좋게 썰린 치즈와 햄. 준비는 완벽했다.
“그럼, 즐거운 밤 보내세요.”
그녀에게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서 케이트는 방을 나갔다.
잠시간 고민하던 엘리제는 포도주를 한 잔 가득 따라 단번에 들이켰다. 음미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마시기엔 아까운 술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까지 블레이크에게 보인 대공비의 이미지를 생각해야 했다.
‘술기운이 아니고서야 대공비 쪽에서 이렇게 먼저 적극적으로 유혹할 리가 없으니까. 괜한 의심을 사선 곤란해.’
살짝 술기운이 돌기를 기다려 엘리제는 복도로 나갔다. 야식을 준비하러 갈 때 미리 말해두었는지, 3층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블레이크의 집무실 앞에 선 엘리제는 길게 심호흡했다. 이제 연기를 시작할 때였다.
노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문이 열렸다.
“…엘리제?”
블레이크는 놀란 눈으로 복도에 선 그녀를 내려다봤다.
“나를 보러 온 겁니까?”
“네. 많이 바쁘신가요?”
“아니, 아닙니다. 들어와요.”
집무실 안으로 그녀를 들인 블레이크는 허둥지둥했다.
“금방 마무리할 테니 소파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겠습니까.”
“그럴게요. 천천히 하세요.”
엘리제는 소파 앞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선 미리 잔 두 개를 채웠다. 그러곤 부러 옷차림을 흐트러뜨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가운의 틈새가 벌어지며 그녀의 가슴골과 뽀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엘리제는 슬리퍼를 벗고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렸다.
다급히 서류를 정리하던 블레이크의 손에서 후두둑 종이 뭉치가 떨어졌다.
“그런 차림으로 여기까지 온 겁니까?”
그는 몹시도 놀란 듯 보였다.
“네. 자기 전에 잠시 들른 거라서요.”
“누구 마주친 사람은….”
“없어요. 3층 복도가 휑하던데요.”
블레이크는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종이들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그는 테이블 위의 포도주병과 엘리제의 붉어진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엘리제가 선수를 쳤다.
“술 창고를 둘러보니 좋은 포도주가 많더라고요. 먼저 조금 마셨어요.”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엘리제는 헤실헤실 웃다가 말고 갑작스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을 내리깔며 가련하게 몸을 움츠렸다. 술에 취한 척하는 건 그녀 정도의 경력을 가진 배우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괜찮은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엘리제는 제 곁에 앉은 그에게 몸을 기댔다.
“어쩐지 조금 울적한 것 같아요.”
“설마, 클랜튼에 돌아가고 싶은 겁니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외롭고 서글퍼서…. 잠도 오지 않고….”
블레이크는 어두워진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내가 있지 않습니까.”
엘리제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품에 와락 안겨들었다.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타선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제게 너무 잘해 주셔서,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요. 대공비가 이래선 안 되는데….”
“엘리제….”
엘리제는 엉덩이에 깔린 그의 것이 크기를 키우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그녀는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죄송해요. 조금 취했나 봐요. 저도 모르게 이런 추태를….”
그러며 그의 품에서 떨어지려는 듯 몸을 살짝 뒤로 물렸다.
“추태라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를 블레이크가 다급히 당겨 안았다.
“오히려 내게 속내를 털어놔 줘서 기쁩니다. 엘리제, 난 당신의 위로가 되고 싶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감출 필요 없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남편으로서 난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엘리제는 순간, 있는 줄도 몰랐던 양심이 쿡쿡 찔리는 걸 느꼈다.
‘와…. 쓸데없이 너무 다정하다니까.’
그러나 그렇다 해서 감동하거나 그에게 마음이 가는 건 아니었다.
‘연기일 뿐이니까.’
만약 이러한 말과 행동에 일일이 넘어가고 마음 줄 것 같았으면, 배우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테랑 배우들은 완벽하게 자신을 숨긴다.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제 존재를 지우고 배역의 인생을 살다가도 촬영이 끝나면 순식간에 저 자신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전환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면 수많은 불상사가 생긴다. 상대 배우와 사랑에 빠졌다가 실연당하기도 하고, 현실과의 격차에 우울증을 겪기도 하며,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한다.
‘허튼 생각 말고 집중해야 해.’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는 그녀가 감동하여서 그런 거라 착각했는지, 블레이크는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엘리제.”
엘리제는 고개를 들고 그의 새파란 눈을 마주 바라봤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의 가슴을 짚었다.
“블레이크…. 나를 위로해 줘요. 내겐 당신이 필요해요.”
그의 심장이 쿵쿵쿵, 세차게 뛰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기꺼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어느새 매듭이 풀려 있던 엘리제의 가운이 소파 밑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어 소파에 눕히는 블레이크의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거듭 말했듯, 외롭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슬립 아래로 파고들었다. 술기운에 상기된 얼굴로, 엘리제는 고개를 젖혔다. 벌어진 입술에서 포도주의 알싸함이 섞인 달콤한 숨결이 흘렀다.
블레이크가 그녀의 매끈한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말려 올라간 슬립 아래 드러난 망사 속옷은 야하게 젖어 있었다.
“으응…. 블레이크….”
달뜬 목소리로 엘리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블레이크는 낮게 신음했다. 그녀의 모든 몸짓이, 행위 하나하나가 그를 유혹했다. 이성을 유지하는 건 도저히 불가했다.
엘리제의 부드러운 가슴골에 얼굴을 묻은 블레이크는, 그녀의 입가에 지어진 회심의 미소를 미처 보지 못했다. 꼿꼿한 핑크빛 정점을 빨며 그녀의 젖은 속옷을 벗겨냈다.
전희에 공을 들일 여유가 지금의 그에겐 없었다. 엘리제 역시 바라지 않는 듯, 그를 위해 활짝 다리를 벌려 주었다. 그녀의 속살이 그를 빨아들이듯 게걸스레 삼켰다. 술기운 탓인지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그녀의 안에서 그는 낮게 신음했다.
한번 맛보면 도저히 끊을 수 없는 마약보다 한층 더 강한 쾌락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전율케 했다. 허리짓이 거세질수록, 호흡이 가빠질수록, 더욱 그랬다.
그는 짐승처럼 그녀를 탐했고, 그녀는 짐승을 조련하듯 그를 제 다리 사이에 가두어 달랬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
“허락받았어.”
다음날, 엘리제는 메리를 방에 불러 말했다. 단장을 돕던 시녀들은 잠시 방 밖에 물린 후였다.
“오늘부터 메리 넌 내 개인 시녀야.”
“네에? 정말요?”
“응. 네가 내 사촌의 처제의 시녀와 육촌지간이라고 둘러댔어.”
“어….”
메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그런 줄 알아.”
“네! 감사해요, 엘리제 님!”
“활기차서 좋구나.”
엘리제는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응. 블레이크와 함께 기사단에 인사하러 갈 거야. 너도 따라오렴.”
메리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의 시작이군요.”
“아니니까 어깨에 힘 빼. 그런 표정 짓지도 말고.”
“앗, 네.”
그녀는 순식간에 특유의 해맑은 얼굴로 돌아갔다.
홀로 찾아갔던 며칠 전과 달리 엘리제는 단정하면서도 우아하게 단장하고선 블레이크와 함께 연무장을 찾았다.
블레이크는 엘리제의 뒤를 따르는 메리를 한두 번 쳐다보다가 곧 관심을 껐다.
기사단원들은 한창 훈련에 임해 있었다. 안주인이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기합 소리가 우렁찼다.
“프로이젠 공국의 기사단은 황가의 네프러스 기사단 못지않게 명성이 높습니다. 청, 홍, 백의 세 기사단이 돌아가며 공국의 국경과 본성, 주요 거점들을 지킵니다. 지금 본성을 지키는 기사단은 청의 기사단입니다.”
“그렇군요. 실제로 보니 굉장하네요.”
엘리제는 대련에 임하고 있는 기사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몇몇 기사들의 검에선 뭔가 빛 같은 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게 뭐지? 광선검인가?’
한때 <별의 전쟁> 팬이었던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마법도 신기했지만 광선검이야말로 그녀의 로망이었다.
기사단을 정렬시키기 위해 단장과 대화 중이던 블레이크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고,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평소보다 과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로 대련에 임하던 기사의 검 하나가 부러져 그녀 쪽으로 날아든 것이다.
“앗!”
검날이 훙훙 소리를 내며 매서운 속도로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엘리제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제게로 날아드는 쇳덩어리를 쳐다보았다.
‘죽는 건가?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지?’
그때였다.
“이얍!”
갑작스러운 기합과 함께 누군가의 손이 검날을 잡았다. 그러곤 움켜쥐었다.
우지끈.
엘리제는 자신의 코앞에서 쇳덩이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
연무장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헤헷.”
뿌듯한 얼굴로 메리가 뒤통수를 긁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