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네 사정부터 설명해 보렴.”
“실은 제가요, 대공님이 하도 수상하기에 뒷조사를 하려 했는데….”
“블레이크가 수상해 보였어? 어떤 점에서?”
“‘블레이크 프로이젠. 프로이젠 공국의 군주.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과 표정이 트레이드마크. 그의 냉혹함은 가신들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다.’ 이게 대공님의 캐릭터인데, 아무래도 좀 다르잖아요.”
“아….”
그건 이미 그녀 역시 알고 있던 부분이었다.
“속에 든 내용물이 바뀌었어. 원래 블레이크의 몸에 들어가기로 돼 있던 윗세계 요원이 루카스 몸에 들어가 있더구나.”
“네, 네? 루카스 클랜튼? <타락한 연인>의 남주 말씀이세요?”
“그래.”
“헐…. 그럴 수가.”
“몰랐나 보구나.”
“네. 뒷조사 시작한 첫날 체포됐거든요.”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니?”
“집무실을 뒤지고 있는데 대공님이 들어오셨어요. 그래서 책상 밑에 숨었더니 병사들을 부르시더라고요. 아하하….”
“…….”
엘리제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얘는 안 되겠다.’
“이제 넌 중간지대로 돌아가렴.”
“네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어설픈 소녀 메리는, 그녀가 하는 일에 전혀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요! 어떻게 이 험한 곳에 엘리제 님을 홀로 두고…!”
“네가 있으면 내가 더 위험해질 것 같아서 돌려보내려 하는 거란다.”
“그럴 수가….”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던 메리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저는 돌아갈 수 없어요! 제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고요!”
“무슨 장면인데?”
“야비하게 웃는 대공비와 함께 야비하게 웃는 장면이요. ‘우후후’ 하고.”
메리는 한껏 야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전혀 야비해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다야?”
“네. 더 많이 등장하면 바로 걸릴 거라고 팀장님이 그러셨어요.”
“그럼 염려할 것 없겠구나. 메리라는 이름의 시녀를 한 명 구하면 되니까.”
“그럴 수가…!”
번번이 그렇게 충격받은 척해 봤자 엘리제에게는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제 특수능력이 엘리제 님께 도움이 되는 날이 분명 올 거예요!”
“특수능력? 그런 게 다 있어?”
“네! 매우 많아요! 일단 저는 선 채로 기절할 수 있어요. 가수면 상태로 전환하는 거죠. 두 시간 정도만 그렇게 기절해 주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답니다!”
엘리제는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질문했다.
“다른 건 또 없니?”
“저는 빠르고 힘이 세요! 정말 빠르고 정말 세요!”
“응. 그렇구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또 있니?”
“어….”
잠시 고민하던 메리는 슬그머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저 두 가지가 전부인 듯했다.
“좋아, 메리. 네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인정해. 하지만 여기는 일개 시녀인 네가 강한 힘을 뽐낼 기회는 별로 없을 듯하구나. 무엇보다 넌 블레이크에게 이미 한번 의심을 사지 않았니. 잘못해서 감옥에 또 갇히면 어쩌려고 그래.”
엘리제의 백번 맞는 말에 메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축 처진 어깨가 안쓰러웠다.
“감옥에서 고생이 심했을 텐데…. 너도 네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지 않니?”
“저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우리들의 세계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대로 아무 실적도 올리지 못하고 돌아가면 다신 기회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싶진 않아요.”
엘리제는 메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리 오지랖이 넓지 않았다. 불쌍하단 이유만으로 그녀를 남게 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네가 또 한 번 실수하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이 세계에 남아 있는 네 동료 모두 위험해질 거야. 난 아직 그들이 몇 명인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단다.”
설득에 가까운 엘리제의 말에 메리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아는데요?”
“…뭐? 정말?”
“네! 황궁의 지나가는 시종13, 클랜튼 후작가의 마부2….”
“잠깐. 그렇게 말해 봤자 알아듣기 힘들어. 그래도 꽤 훌륭한 단서구나.”
“제가 도움이 됐어요?”
“그래. 이렇게 중요한 걸 왜 가장 먼저 말하지 않았니?”
“헤헷….”
타박에 가까운 말이건만, 메리는 수줍어하며 웃었다.
엘리제는 곰곰이 생각했다. 메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그녀의 괴상한 특수능력보다 백배는 중요했다.
시녀로서의 그녀는 무용할지 모르지만, 어떻게든 쓸모를 찾자면 찾을 수 있다. 배역을 잘못 맡았다면 더 잘할 수 있는 배역으로 바꿔 주면 된다.
“좋아. 그럼 내가 블레이크에게 말해 널 내 개인 시녀로 두도록 할게.”
“세상에, 정말요?”
놀란 눈으로 엘리제를 쳐다보던 메리의 얼굴에 맑고 환한 웃음이 번졌다.
“감사해요, 엘리제 님! 최선을 다해 보필할게요!”
너무 좋아하는 그녀에게 차마 ‘가만히 있는 게 날 도와주는 거란다’라고 말할 수 없어서, 엘리제는 그냥 고개만 한번 끄덕여 주었다.
***
블레이크가 성에 돌아온 건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케이트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엘리제는 그를 맞이하러 방을 나섰다.
메리 브룩에 대한 얘기를 그에게 어떻게 꺼내야 할지 엘리제는 다소 고민이 되었다. 감옥에 있던 그녀를 멋대로 데리고 나온 것만으로도 월권일지 몰랐다.
‘일단 블레이크의 기분이 어떤지 좀 살펴야겠어.’
가능한 한 그의 기분이 좋을 때 말을 꺼내는 편이 좋으리라.
층계를 내려오자 이제 막 성안으로 들어선 블레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칼에 화려한 외양을 가진 남자가 블레이크의 곁에서 생글대며 웃고 있었다.
‘누구지?’
다가오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블레이크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부인.”
“잘 다녀오셨어요?”
그는 다소 초조해 보였다.
“맞이하러 나오실 필요 없었는데….”
“어떻게 그래요. 제 부탁 때문이었는데.”
“호오, 그런 거였나?”
앞으로 불쑥 나선 붉은 머리칼의 남자를 보며 블레이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렉스.”
‘…렉스? 그런 이름의 등장인물이 있던가?’
“어서 부인에게 날 소개해 줘야지, 블레이크. 아니면 내가 직접 할까?”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거로 보아 꽤 친한 사이 같았다. 블레이크는 한숨을 한번 내쉬곤 엘리제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렉스 러셀. 황태자십니다.”
“네?”
엘리제는 깜짝 놀라 굳어 버렸다.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타락한 연인> 속 황태자의 이름과도, 외양과도 전혀 맞지 않았다.
악역이라 해도 경중이 있는 법. 출연 분량을 보면 알 수 있듯, 대공비의 경우엔 그리 대단한 악역이 아니었다. 진짜는 따로 있었고, <타락한 연인>이란 제목이 나올 만한 환경을 조성한다.
바로 황태자 베일롯 러셀. 친척인 프로이젠 대공과 흡사한 검푸른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지금 응접실 소파에 앉아 생글대고 있는 렉스 러셀은, 현실에선 거의 보기 힘든 붉은 머리칼에 주황빛이 감도는 금안의 소유자였다.
“차향이 아주 좋은걸.”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쿠키를 하나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이것도 맛있고.”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의 부스러기를 훑으며 그가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워.”
수치심을 주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성적 어필인지는 모르겠다. 엘리제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타락한 연인> 속 대공비의 이름 역시 본래 엘리제가 아니었다. 본래 존재하던 배역의 이름이 달라지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한다.
‘저자도 빙의자일 가능성이 커.’
“황궁엔 제대로 된 요리사가 없는 모양이군.”
블레이크의 비아냥거림에 그는 가볍게 웃었다.
“아무리 솜씨가 좋아 봤자 매일 먹으면 질리지. 가끔은 새로운 게 탐나지 않나?”
이제 막 결혼한 새신부를 저런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황태자. 친분이 있다 하여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다소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어도 명확한 근거 없이 비난할 순 없는 것이다.
블레이크의 기분은 점점 저조해지고 있었다.
‘아, 안 되는데…’
이따가 메리에 대한 걸 얘기하려면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런데 태자 전하께선 어떻게 이리 갑작스레 방문하게 되셨나요?”
왜 별다른 약속도 없이 남의 집을 방문했냐는 의미의 다소 불경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렉스는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이 친구가 제도로 통하는 이동 마법진 사용 허가 신청서를 보냈지 뭔가. 본래는 황궁 소속 마법사가 파견되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만, 하도 신기하여 내가 직접 와봤지. 정말로 신청자가 ‘그’ 프로이젠 대공인가 하고.”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것뿐이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 직전에 말이지. 그런데 아까 얼핏 듣자하니… 제도행을 부탁한 게 자네 부인이라고?”
블레이크의 미간이 구겨졌다.
“적당히 해. 내 성에서 쫓아내기 전에. 황태자의 자격이 아닌 황궁 소속 마법사 자격으로 방문하였음을 잊지 마.”
그의 냉정한 말에 렉스는 재미없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일은 제대로 처리해야겠지. 인장을 가져오지 그러나, 블레이크.”
“함께 집무실로 가지.”
“난 여기서 자네 부인과 좀 더 얘길 나눠 보고 싶은데.”
‘음…?’
엘리제는 힐끔 블레이크를 쳐다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공의 인장은 아무나 손댈 수 없다. 렉스와 함께 집무실로 가든지 블레이크 본인이 직접 가져오는 수밖에 없었다.
“뭐해? 어서 가져오지 않고.”
저의가 의심스러운 렉스의 말에도 블레이크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부인.”
그의 굳은 얼굴을 보며 엘리제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태자 전하의 말 상대는 제가 잘해 드릴 테니 염려 말고 다녀오세요.”
엘리제는 황태자와 둘이 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상대 역시 빙의자라면 블레이크가 없을 때 좀 더 편하게 정보를 캐낼 수 있지 않을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치십시오.”
“블레이크, 날 너무 최악으로 보는 거 아닌가. 아무렴 새신부에게 손대려고.”
불신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본 블레이크는 다소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드디어 방해꾼을 쫓아냈군.”
그가 나가자마자, 렉스는 냉큼 엘리제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엘리제는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봤다.
‘태세전환이 빠른 것도 수준급이군.’
신경질적으로 거리를 벌리자, 그는 주저 없이 거리를 좁혔다.
“그러지 마.”
그의 금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당겨 안으며 그가 속삭였다.
“잘 있었어, 엘리제?”
엘리제의 눈썹이 움찔했다.
“이런. 외모가 바뀌어서 못 알아보는 건가? 나야, 카인. 카인 리베르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