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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 후, 블레이크는 성의 주요 사용인들을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시종장 버나드와 시녀장 케이트를 비롯하여 주치의 리암과 요리장 커크, 식료품 창고를 관리하는 도우슨, 술 관리자 시밀 등을 비롯하여 열댓 명의 관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이 크다 보니 그만큼 모든 일이 세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블레이크의 엘리제에 대한 유난스러운 태도 덕분일까. 그들은 그녀를 매우 깍듯하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에 엘리제는 만족스럽게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들이 그녀를 존중한다면 그녀 역시 그들의 좋은 주인이 되어 줄 것이다.
신분제가 없어도 눈에 보이지 않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다 온 그녀이니만큼 ‘갑질하지 않으면서 대우받는 법’은 익히 알고 있었다.
블레이크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성의 열쇠가 든 상자를 그녀에게 건넸다.
“나의 소유는 이제 모두 부인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건네받은 상자의 무게에 엘리제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뭐, 뭐야. 뭐가 이렇게 무거워?’
“이런….”
블레이크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곤 상자를 도로 가져갔다.
“이건 내가 직접 방에 가져다드리지요.”
상자의 무게도 무게지만, 근육이라곤 조금도 붙어 있지 않는 몸이 문제였다. 체력 단련이 필요함을 엘리제는 다시 한번 절감했다.
“기사단은 내일 정식으로 방문토록 합시다. 겸사겸사 성을 둘러보지요.”
“네, 알겠어요.”
인사가 끝나고 모든 사용인이 물러나고도 엘리제는 그의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전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블레이크는 그녀를 데리고 가 소파에 앉혔다.
“말해 보십시오.”
그는 다소 긴장한 듯 보였다. 그녀의 화가 풀리지 않았을 거라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한 달 뒤에 열리는 태자 전하의 생신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요.”
“제도에…. 방문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네. 물론 전하와 함께요.”
블레이크는 고민에 빠져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그러는 이유를 엘리제는 모르지 않았다. <타락한 연인> 속 블레이크와 황태자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 가정에 충실한 블레이크와 달리 황태자는 온갖 타락의 온상이었다.
그와 말 섞는 것조차 불쾌해하는 블레이크가, 황태자의 생일 축하 연회에 참석하고 싶겠는가.
“안되나요?”
“꼭… 가고 싶습니까?”
“네. 이번 시즌을 놓치면 내년에나 함께 폐하를 알현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그사이 아이라도 생기면 더 미뤄질 테고요.”
“아이…라고요.”
그의 시선이 저절로 그녀의 배를 향했다.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배에 힘을 주었다. 격렬한 섹스 후 허기가 져 밥을 너무 많이 먹었다.
“전하께서 절… 많이 아껴 주시니, 오래 걸리지 않겠죠.”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타락한 연인>이 진행되는 동안 대공비는 임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블레이크가 그걸 어찌 알겠는가.
멍해졌던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겠군요.”
뭘 상상한 것인지, 그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럼 허락해 주시는 거죠?”
블레이크는 기대감에 찬 얼굴로 환하게 웃는 그녀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럽…시다. 그렇게 하지요.”
“기뻐요! 감사해요, 전하!”
엘리제는 모든 화가 풀린 듯,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런데, 부인.”
그녀를 제 품에 조금 더 당겨 안으며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괜찮다면, 내게도 이름을 허락해 주지 않겠습니까. 불편하다면 사적인 자리에서만이라도 좋습니다.”
‘이 남자 은근히 뒤끝 있네.’
아무래도 루카스가 ‘엘리제’라 불러댄 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럼요. 전하께서 이름을 불러 주시면 저 역시 매우 기쁠 거예요.”
까짓 이름 좀 허락하면 어떠한가. 엘리제는 제도에 도착하기 전까지 최대한 그의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제도에 가서 루카스를 최대한 자주 만나야 하기에.
“내 이름도, 이제부터 그대의 것입니다.”
‘달아! 달다고!’
온몸이 간질간질하여, 엘리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마카롱 스무 개를 그 자리에서 입에 털어 넣은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블레이크는 공국 내에 있는 마법 센터를 방문하기 위해 성을 나섰다. 자연히 기사단 방문은 미뤄졌다.
제도로 통하는 대규모 이동 마법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꽤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했다. 영주가 직접 가서 신청해야 함은 물론 정확한 인원수도 미리 황궁에 보고해야 했다.
블레이크가 성을 비운 사이 엘리제는 케이트를 대동하여 성안을 둘러보았다. 루카스를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의 최우선 임무는 중간지대 조사관 구출이었다. 혹시 성안에 억류된 조사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야 않겠지만.’
3층은 구조가 단순하여 딱히 돌아볼 필요가 없었기에 엘리제는 2층으로 내려갔다. 수십은 되어 보이는 방문들을 계단에 서서 쳐다보던 엘리제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일단은 쉽고 재밌는 일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하로 가자.”
“네, 비전하.”
성의 지하엔 어마어마한 규모의 식료품 창고와 술 창고가 있었다. 미리 얘기를 들었음에도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입이 턱 벌어졌다. 나무통이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었다.
술의 종류에 따라 공간이 나뉘어 있었고, 나무통 위쪽 선반에는 시음용으로 빼놓은 포도주병이 수십 개 꽂혀 있었다.
성의 술 관리인인 시밀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안내해 주었다.
“여기서 가장 좋은 포도주가 뭐지?”
“여기 이쪽 라인의 포도주입니다.”
엘리제의 연보라색 눈이 호기심에 반짝였다.
“잘 관리되고 있는지 시음해 보고 싶은데.”
그녀의 말에 그는 선반의 포도주병 중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개봉했다. 잔에 차오른 붉은 액체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엘리제는 음미하듯 한 모금 머금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호, 여기서 이런 보물을…!’
한 모금 머금고 잠시 후에 다시 또 한 모금 머금고, 연신 홀짝대다 보니 잔은 금세 비었다.
“관리를 매우 잘한 모양이군. 훌륭해.”
후한 칭찬을 받은 시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비전하.”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함께 마시고 싶은데.”
“제가 따로 챙겨놓겠습니다.”
케이트가 눈치 빠르게 나서서는 포도주병을 챙겼다. 시밀은 같은 거로 한 병을 더 꺼내 케이트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런 유능한 관리자가 있으니 전하께서 든든하시겠어.”
기분이 좋아 생글생글 웃으며 엘리제는 술 창고를 나왔다. 시밀은 기쁘게 그녀를 배웅했다.
다음으로 엘리제는 식료품 창고를 들렀다. 한 바퀴 둘러보고선 아까처럼 칭찬을 남발했다.
“대공성의 관리인들은 모두 성실하군. 앞으로도 지금처럼 애써 주게. 그대들의 노고를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테니.”
“네, 비전하. 명심하겠습니다.”
잔뜩 긴장해 있던 도우슨은 안도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엘리제는 거기서도 다양한 종류의 치즈를 맛보고, 포도주에 곁들이기 가장 좋은 것으로 추천받아 챙겼다. 도우슨은 그녀가 요청하지 않은 햄까지 몇 종류 챙겨 주었다.
‘신난다.’
수월하게 군것질거리를 챙긴 엘리제는 흡족한 얼굴로 식료품 창고를 나왔다.
왔던 길로 돌아나가려던 그녀는 어쩐지 케이트의 동선이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의 시야를 가로막으려는 듯 한쪽을 어색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엘리제는 계단을 오를 듯하다 재빨리 방향을 틀었다.
“비켜보려무나.”
커다란 종이봉투를 든 케이트의 움직임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앗, 비전하.”
엘리제의 예상대로, 케이트의 뒤편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이 계단으로 내려가면 뭐가 있지?”
“흉악한 범죄자들을 가둬둔 감옥이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겁먹고 안갈 줄 알았겠지만.
“그래?”
엘리제는 주저 없이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케이트가 깜짝 놀라 그녀를 만류했다.
“여긴 귀하신 분이 걸음 하실 곳은 아니에요.”
“글쎄.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어서 비켜 보렴.”
나긋한 목소리에 깃든 단호한 의지에 케이트는 어쩔 수 없이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성인 남자 둘 이상은 나란히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좁은 통로에 나선형 계단이었다. 별거 있겠나 싶어 엘리제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의 나무문을 지키던 병사 둘이 당황한 얼굴로 그녀와 케이트를 쳐다보았다.
“비전하십니다. 문을 여세요.”
“아, 네…!”
열쇠를 가지고 있던 병사가 황급히 문을 열어 주었다.
안쪽에도 간수 둘이 있었지만, 엘리제는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같은 지하임에도 식료품 창고와 술 창고가 있는 위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음침했다. 간수가 등불을 받쳐 들고 엘리제를 뒤따르며 갇혀 있는 죄인들의 죄목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엘리제는 유심히 그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대부분 살인, 강도와 같이 중간지대 조사관이 하지 않을 법한 흉악 범죄 죄인들이었다.
‘하긴. 억류됐다고 한들 설마 감옥에 있겠어?’
그리 높지 않던 기대감을 완전히 지우고 돌아나가려던 차였다. 갑작스레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살려 주세요! 구해 주세요! 전 죄를 짓지 않았어요!”
가장 안쪽 감옥이었다. 어린 여자의 목소리에 엘리제는 그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컴컴하여 비어 있는 줄 알았더니 사람이 있었다.
“타 영지의 첩자로 판명되어 가둬둔 아이입니다.”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앳되었다. 열대여섯 살 남짓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꼬질꼬질한 시녀복 차림이었다.
“메리로군요.”
“메리?”
“네. 성의 시녀였는데, 대공님의 집무실에 숨어들어 수상한 짓을 하는 바람에….”
“수상한 짓?”
“억울해요! 전 정말 그러려던 게…!”
그때, 문득 메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리제 님?”
그리 말했다가는 헙, 하고 제 입을 틀어막는다.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감옥에 있는 전직 시녀가 얼굴만 보고 어찌 그녀를 알아본단 말인가.
‘어. 설마…’
환상 컨트롤타워의 조사관을 벌써 한 명 찾은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예감이 들었다.
***
메리 브룩. 몰락 귀족의 딸로 대공성에 들어온 지 한 달가량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 이 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 어떻게 된 건지 말해 봐.”
방에 단둘이 남자 엘리제는 제 몫으로 차려진 다과를 그녀에게 밀어 주었다. 메리는 흐어엉, 울며 빵과 과자를 입에 욱여넣었다.
“으어어 이 오이아이… 우우오….”
“아, 일단 먹고 말하자. 도저히 못 알아듣겠으니까.”
우물우물 입 안의 음식을 씹어 삼킨 메리는 엘리제가 밀어준 최고급 홍차를 보리차처럼 원샷했다.
“엘리제 님이 오시다니이이, 꿈만 같아요…!”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 너 근데 나를 어떻게 알아봤어?”
“팬이에요, 언니! <스파이 삼총사> 정말 재밌게 봤어요!”
엘리제는 이마를 짚었다.
중간지대 환상 컨트롤타워의 공중에 떠 있던 수천수만의 모니터들. 곳곳에서 튀어나와 반갑게 손을 흔들던 타워 직원들. 아무래도 그녀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의 애청자들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