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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군.’







엘리제를 발견한 루카스가 한 손에 쥔 바스타드 소드를 횡으로 거세게 휘둘렀다. 쩡, 소리와 함께 그와 맞붙어 겨루던 기사가 주르륵 밀려났다. 현재 영주성을 지키는 기사 중에선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강자였으나 원작 남주 루카스 클랜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놀라 부릅뜬 눈을 본체만체하며, 루카스는 바닥에 떨어뜨려 놓았던 검집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왔으니 시간을 끄는 건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던 블레이크 역시 엘리제를 본 모양이었다. 입구를 향해 가는 그의 걸음이 다소 급해 보였다.







“배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의 공손한 인사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루카스가 검을 갈무리했다.







기사들 여럿이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주군의 아내이자 대공비가 된 여인, 엘리제 프로이젠. 모두가 그녀를 궁금해했다.







“엄청 아름다우시다던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전형적인 미녀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녀만큼 아름다운 여자도 드물 것이다.







<타락한 연인> 세계관에서 엘리제는 뭇 사내들을 제멋대로 쥐락펴락하는 팜므파탈의 매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순종적이며 가련미 넘치는 원작 여주의 매력과는 상극이라 할 수 있었다.







루카스는 엘리제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블레이크와 말을 주고받던 그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오라버니…!”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 가득 사르르 번져갔다. 지문상 그는 그녀와 몹시 닮은 미소를 지어 보여야 했다. 루카스는 최선을 다해 그녀의 웃음을 흉내 냈다. 그의 입꼬리가 경련하듯 어색하게 씰룩였다.







“가기 전에 볼 수 있어 기쁩니다.”



“아….”







그녀의 눈시울이 안쓰럽게 붉어졌다.







“정말 떠나시는군요.”



“본래 어제 떠나려 했는데, 늦어졌습니다. 대공께 폐를 끼쳤군요.”







제 목소리가 냉랭하게 들린다는 걸,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뭐 어쩌겠는가. 겨우 하루 이틀 노력하여 고쳐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클랜튼 경은 부인의 가족이 아닙니까. 얼마든지 더 머무셔도 상관없었을 겁니다.”







말은 그리해도 루카스를 향한 블레이크의 눈초리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물론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눈빛이 어떠하든 그저 대본대로 행동할 따름이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다니. 전하께선 너무도 친절하셔요.”







감동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기까지 하니, 블레이크의 마음이 어찌 녹아내리지 않겠는가.







“…그저 부인을 아낄 뿐입니다.”







아내를 대하는 대공의 태도는 사랑의 열병에 빠진 전형적인 사내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울리지 않게 사르르 미소까지 지어 가며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결혼한 지 고작 이틀 지났을 뿐인데 저렇게까지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참으로 대단한 여자라고 루카스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만 가지요. 더 지체하다간 클랜튼 경이 오늘 밤 머물 숙소를 찾지 못할 겁니다.”



“네, 그래요.”







아직은 기사단에 엘리제를 소개할 생각이 없는지, 블레이크는 그녀를 이끌어 연무장을 벗어났다. 심지어 대공은 그녀가 기사들의 시선에 닿지 않도록 완벽히 그녀를 가리는 동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담장 밖을 기웃거리던 기사들의 기대감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행동이었다.







한 걸음 뒤처져 걸으며 루카스는 블레이크와 엘리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본래 이야기 속의 그는 오찬 때보다 한층 가까워져서 다정히 대화를 주고받는 대공 부부를 보며 질투심을 불태워야 한다. 애타게 바랐던 엘리제의 옆자리를 빼앗기고도 축복을 빌어 주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야 한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블레이크로 연기 연습할 때 많이 지어 보았던 표정이었다.







파견되기 전 그의 스승은, 특정한 상황에 제대로 이입할 수 없을 땐 그와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다른 상상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루카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질투심.







‘애타게 바란 적은 없어도, 편리한 조력자를 빼앗긴 건 사실이지.’







엘리제의 연기력을 보건대, 그녀가 그의 조력자였다면 임무를 완수하기 매우 수월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관.







‘대사와 지문이 너무 많아. 언제 다 외우지. 보고서는 대체 어떻게 써서 올려야 하는가.’







자신의 처지를 떠올릴수록 루카스의 얼굴은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내 오백 년 경력에 흠이 가게 만든 원흉.’







블레이크를 향한 그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저 배역은 내 것이어야 했다.’







대단한 정도는 아니라도 분노 비슷한 감정이 조금씩 샘솟았다.







‘대사도 얼마 없는 최적의 포지션을 빼앗기다니…!’







그때, 심하게 몰입해 있던 그를 블레이크가 돌아보았다.







“……?”







‘아.’







루카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그들은 본성 앞, 클랜튼 후작가의 마차 앞에 당도해 있었다.







엘리제 역시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루카스의 괴상한 표정을 본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루카스는 서둘러 머릿속을 비웠다. 그는 순식간의 이전의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대사를 내뱉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엘리제, 부디 행복하기를….”



“오라버니….”







마차 문손잡이를 잡는 그를 바라보던 엘리제가 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부인….”







블레이크가 당황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나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더욱 심하게 흐느낄 따름이었다.







‘신기하군. 진짜로 눈에서 물이 나오다니.’







엘리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루카스가 블레이크에게 말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누이와 단둘이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서글프게 우는 엘리제와 루카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블레이크가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소. 그렇게 하시오.”







루카스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는 그녀를 마차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신 역시 따라 들어갔다. 문을 닫고 그녀 곁에 앉자, 마차 안엔 그녀의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딱딱한 몸짓으로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울지 마.”







더 울었다간 한 대 칠 목소리였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엘리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또 볼 수 있을까요? 가족들이 그리울 거예요.”







연기인 줄 뻔히 아는 루카스의 눈에도 그녀는 몹시 처연해 보였다.







우는 모습이 아름다운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눈물이 나면 콧물이 나기 마련이고, 흘러내리는 걸 닦아 내다 팽, 풀어야 한다. 그쯤 되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콧물은 나올 기미도 없었다. 지금의 그녀처럼 붉어진 눈으로 눈물만 뚝뚝 흘리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걸까.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면 연락해. 데리러 올 테니까.”



“오라버니….”



“나는 항상 네 편인 거 알지?”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매일같이 네 생각을 하겠지.”







감정 없는 목소리라 해도, 대사는 정확했다. 그는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기는커녕 투박한 손짓에는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어, 그녀의 두피가 당겨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힘을 좀 더 빼야 하는 건가.’







그가 고민하고 있을 때, 엘리제가 루카스의 허리를 꼬집었다. 그만하고 다음 지문으로 넘어가란 뜻이었다.







여기서 <타락한 연인>의 초반부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가 나온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루카스가 타인의 아내가 된 의붓동생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다.







‘빨리해요.’ 엘리제가 무릎으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이건 연습 못해 봤는데.’ 루카스가 곤란한 듯 중얼댔다. 대공 부부의 키스 장면이 작중에 등장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키스하는 모양새를 모르진 않았다.







‘인공호흡과 비슷하지.’







루카스는 양손으로 그녀의 볼을 덥석 감쌌다. 볼이 눌리며 그녀의 입술이 병아리처럼 벌어졌다. 그는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놀랄 정도로 말랑한 감촉에 일순 몸이 굳었다.







‘뭐지 이건?’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말랑한 입술을 머금고 빨았다. 달짝지근한 맛이 났다. 윗입술을 혀로 핥자 마찬가지로 달았다. 루카스는 열심히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여기서 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 짓만 계속했다.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속눈썹이 들리며 촉촉이 젖은 연보라색 눈이 드러났다. 그녀는 뭔가가 못마땅한 듯 찡그리고 있었다. ‘잘 보고 배워요.’ 그녀의 눈빛이 그에게 말했다.







“……!”







그의 목에 팔을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 그녀가, 눈을 내리감으며 비스듬히 고개를 틀었다. 어정쩡하게 닿아 있던 이제까지와 달리 입술이 완전히 맞물렸다.







살짝 기어 나온 그녀의 혀가 그의 이를 톡톡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벌어진 그의 입 안에 그녀의 혀가 매끄럽게 침입했다. 그의 혀를 능숙하게 옭아매곤 제게로 끌어왔다.







혀가 비벼지는 야릇한 감각에 휩싸여 그녀는 그를 탐했고, 그 역시 그녀를 따라 욕망이란 걸 흉내 냈다.







오가는 숨결이 뜨거웠다. 젖은 소리가 음란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이제 키스신을 리드하는 건 루카스 쪽이었다. 그녀의 입 안을 샅샅이 훑고, 정신없이 혀를 엮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그녀의 턱을 타고 흘렀다.







대본대로 그가 손을 미끄러뜨렸다. 엘리제는 정확한 타이밍에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곤 있는 힘껏 그를 밀쳤다.







“이러시면 안 돼요, 오라버니…!”







엘리제가 외치는 순간 마차의 문이 덜컥 열렸다. 역시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블레이크의 새파란 눈이 엘리제와 루카스를 향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분을 억누른 블레이크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