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보기
-7-





연명 치료를 포기한다 해서 삶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엘리제는 죽고 싶지 않았다.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다.







두 번의 파양과 해외 입양, 양부모의 학대, 가출하여 밑바닥을 전전했던 청소년기.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천운이었다. 그러나 동양인 출신으로 정상에 오르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후로도 그녀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고작 한 달, 길어야 반년이라는 말에 미칠 듯이 억울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제 쉬어도 되겠구나’ 하며 안도했다.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평생에 걸친 고단함이었다. 거의 일주일가량을 두문불출하며 엘리제는 자고, 먹고, 쉬었다.







물리도록 먹었던 샐러드 대신 피자와 햄버거, 감자튀김을 배터지게 먹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운동을 쉬고 소파와 한 몸이 되었다.







밖이 시끄럽든 말든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놓은 지 오래라 그녀가 숨 쉬는 공간만은 마냥 고요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수고한 자신에게 주는 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찾아왔다. 평생의 동료요 라이벌이었던 남자, 카인 리베르토.







[엘리제. 널 외롭게 죽게 하진 않을 거야.]







엘리제는 하도 데굴거려 부은 얼굴로 푸스스 웃었다.







[왜, 뭐. 같이 죽어 주기라도 하게?]







그녀의 우스갯소리에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못 본 사이 까칠해진 얼굴이 갑작스레 섬뜩해 보였다.







[어떻게 알았어?]











***











잠든 척만 한다는 게 정말로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엘리제는 꿈의 잔재를 털어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살갗에 소름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엘리제는 참신하게 미친놈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굳이 루카스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자만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에 뒤통수를 치는 건 상대가 아닌 자신이어야 한다.







‘물론 안 치고 안 맞는 게 가장 좋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이곳이 이야기 속이라는 점이다. 나름의 권선징악이 존재했고, 위기를 타파할 열쇠가 존재했다.







‘현실이었다면 그딴 게 있을 턱이 없지.’







엘리제는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위엔 그녀 혼자였다. 푹신한 카펫에 발을 디디고 끙차, 힘을 주며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럭저럭 걸을 만했다.







엘리제는 캄캄한 방 안을 가로질러 창가로 걸어갔다.







‘몇 시쯤 됐으려나. 저녁 먹을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커튼을 걷자마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엘리제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뭐야…. 설마, 아침이야?”







어쩐지 밖이 부산한 것 같았다. 루카스가 떠나는 시각은 오전. 그녀의 눈이 당혹감에 커졌다. 아무리 체력이 바닥인 몸이라지만 저녁과 밤을 그대로 지나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자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촬영 날 늦잠 잔 꼴이잖아! 망했다!’







후다닥 침대로 되돌아와 설렁줄을 당긴 엘리제는 욕실로 직행했다.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허겁지겁 씻고 욕실에서 나오니 어제는 보지 못했던 얼굴이 있었다. 지금 엘리제의 모습이 가관이었을 텐데도 그녀의 표정에선 당혹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정한 시녀복 차림의 그녀가 엘리제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전하. 시녀장 케이트 윈슬레예요.”







매우 급한 상황이긴 했지만, 엘리제는 시녀장 정도 되는 인물과의 첫 대면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몸을 꼿꼿이 세운 엘리제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반갑네, 시녀장. 어제는 보지 못한 것 같은데.”



“송구합니다. 가문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가 오늘 아침 돌아왔습니다.”



“그렇군. 일은 잘 해결되었나?”



“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명을 길게 늘어놓지도, 그렇다고 뻣뻣하게 굴지도 않는 그녀의 태도가 엘리제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만약 유능하기까지 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시녀장.”



“케이트라 부르시면 됩니다.”



“그래, 케이트. 오늘 내 오라버니…. 클랜튼 경이 성을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벌써 출발하셨나?”



“아닙니다. 채비는 마치셨지만, 아직 성을 떠나진 않으셨습니다.”



“다행이군. 배웅하고 싶었는데.”



“그럼 준비를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탁하지.”



“네, 비전하.”







고개를 숙여 보인 케이트가 데리고 온 시녀 중 하나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려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곤 직접 드레스룸으로 가서 페티코트 없이 입을 수 있는 간소한 드레스로 여러 벌을 골라 왔다.







그때쯤 밖으로 나간 시녀가 다른 시녀 여러 명을 데려왔고, 각자 분담하여 그녀의 치장을 도왔다.







자연스레 웨이브 진 연보라색 머리는 틀어 올리는 대신 곱게 빗어 내렸고, 엘리제가 고른 간소한 드레스를 입었다. 화장은 피부 정돈 후 입술에만 옅게 분홍빛을 더하는 것으로 끝냈다. 어려진 나이 덕에 그 정도로 충분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최소한의 치장을 마쳤을 땐 삼십 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엘리제는 재차 확인했다.







“아직 떠나지 않으신 거 맞겠지?”







창밖을 확인한 케이트가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답했다.







“네. 클랜튼 가의 마차가 여전히 본성 앞에 있는 거로 보아 아직 떠나지 않으신 듯합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엘리제는 방을 나섰다. 중앙 계단 쪽을 향하여 복도를 걷는 길에 엘리제는 시종장 버나드와 마주쳤다.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듯, 버나드는 엘리제를 보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인사했다.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비전하.”



“그래. 혹시 날 기다린 것인가?”



“네. 실은 주인님께서 비전하와 조찬을 함께하시겠다며 식사를 거르셨습니다. 오찬도 아직이시라….”



“이 시각까지? 전하께선 어디에 계시나?”



“연무장에 계십니다. 클랜튼 경과 본성 기사들의 대련을 참관하고 계십니다.”







버나드는 성안 기사들의 청으로 루카스가 그들을 상대해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네프러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그를 동경해서든 혹은 호승심이든 실력 있는 기사들이 시시때때로 루카스에게 대련을 청한다는 원작상의 설정이 있었는데, 프로이젠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렇군. 알겠네.”







그리 대답한 엘리제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자 시녀장 케이트가 그녀를 쫓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송구하오나 비전하, 어디로 향하시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전하께서도 마침 연무장에 계시다 하지 않나. 거기로 가려 하네.”



“아, 그럼….”







케이트가 옆의 시녀에게 명하여 엘리제의 외투를 가져오게 했다.







“밖이 조금 쌀쌀하니 걸치시지요.”







그녀가 입은 얇고 하얀 드레스가 대외용으로 부적절한 듯했다. 엘리제는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시녀가 가져다준 감색 외투를 걸쳤다.







성을 나오고서야 엘리제는 새삼 이곳이 이야기 속이라는 걸 실감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높고 견고한 성벽, 공기 속에 섞인 이질적인 냄새,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의 표정과 눈빛.







생전에 중세 유럽 배경의 50부작 드라마에 출연한 적도 있는 그녀지만, 아무리 공들여 지어 놓은 세트장이라 할지라도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프로이젠의 기사단 숙소와 연무장은 본성 뒤편에 있었다. 아직 거리가 먼데도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기사들의 연무장 주변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시녀 하나가 병사에게 무어라 말을 전하자 화들짝 놀란 병사가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여기서 기다리시지요. 위험한 곳입니다.”



“그러지.”







케이트의 염려 섞인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무장 안쪽, 루카스의 환한 금발이 얼핏 보였다. 늦지 않아 다행이었다. 한두 번으로 끝냈어야 할 대련을 여태 하느라 힘들었을 테지만.







‘뭐, 능력 있는 요원이랬으니까.’







어련히 싸움도 잘하지 않을까,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엘리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루카스와 블레이크가 나오길 기다렸다.







“부인.”







먼저 나온 것은 블레이크였다.







오늘도 그는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가슴 근육 탓에 팽팽히 당겨진 셔츠가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엘리제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취향에 부합하는 남편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전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한 보 앞에 멈춰선 그가 살피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피곤해 보입니다. 좀 더 쉬지 않고요.”



“아니에요. 지난밤엔 제가 깜빡…. 잠들어 버렸나 봐요.”







어제 일이 떠오른 양, 엘리제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블레이크가 그런 그녀에게 손을 뻗어 외투를 좀 더 꼼꼼히 여며 주었다.







“무리하게 하지 않겠노라 약조해 놓고. 미안합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죄책감에 물든 얼굴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면서도 연신 엘리제의 얼굴과 목덜미 같은 곳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와아, 눈빛 봐.’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더욱 안달 나게 만들면 얼마나 즐거울까. 어제 블레이크가 보여준 모습들이 떠올라 엘리제는 괜스레 그를 쿡쿡 찔러 보고 싶어졌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들며 엘리제가 그에게 말했다.







“저 때문에 조찬도 거르셨다면서요.”



“부인께서 언제 깰지 몰라 먹지 않았습니다.”



“다음부턴 먼저 드셔요. 이 시각까지 식사하지 않으시면 어떡해요.”



“괜찮습니다. 부인을 기다리는 건 아주 기쁜 일입니다. 조금도 힘들지 않으니 개의치 마십시오.”







잠시 말을 멈췄던 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족이지 않습니까.”



“가족….”



“부인만이 나의 유일한 가족입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당장 내일부터 일찍 일어나 그와 함께 식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했다. 제대로 된 가족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본 적 없는 그녀에게 당연하단 듯 매 끼니를 함께할 사람이 생긴다는 건.







물론 모든 것이 허구지만, 그런데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시녀에게 꼭 깨워 달라고 말해 둬야겠네요.”



“괜찮다면 내가 매일 깨워드리지요.”



“네? 전하께서요?”



“싫습니까?”



“아, 아니요.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그렇게 하지요.”







긍정적인 답을 얻은 블레이크가 환히 웃었다. 주변까지 화악 밝아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기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







표정관리를 잘 하던 케이트까지 다소 놀란 얼굴인 걸 보면 흔치 않은 일이 확실했다.







‘이 남자 정말 왜 이렇게 귀엽담.’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좀 더 그를 관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엘리제는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블레이크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엘리제의 반지가 부르르 진동했다. 새로운 장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