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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하듯 잠들었던 엘리제가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 하나를 까딱여 보았다. 다행히 죽진 않았다.







‘아, 난 이미 죽었지.’







키득대며 눈동자를 굴렸을 때, 침대 곁에 우두커니 선 시커먼 남자가 시야에 들어찼다. 깜짝 놀라 튀어나올 뻔한 험한 말을 꿀꺽 삼키며 엘리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루카스?”







무표정한 얼굴의 루카스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제는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음음, 소리를 냈다. 얼마나 울어 댔는지 쉬어 버린 목이 아팠다.







“고생이 많군.”







얼굴 보기 매우 민망한 일이 있었음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가 그러하다 보니 엘리제 역시 ‘뭐 어때’ 하는 심정이 돼 버렸다. 그래서 뻔뻔스레 고개를 치켜들고 그에게 투덜댔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인 건 알죠?”



“왜 나 때문이지?”



“당신이 내 남편 몸에 제대로 들어갔으면 이럴 일은 없잖아요.”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 잘못이라고 인정하길 바라나?”







도통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표정과 말투. 엘리제는 욱하는 심정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벗은 몸이 드러나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관이라는 듯 훑는 게 느껴지자 엘리제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제 아름다운 몸매를 과시하듯 노출하는 걸 즐기는 그녀였지만, 감정 없는 저런 시선은 사양이었다.







‘하긴, 요원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천사 비슷한 존재일 거 아냐. 성욕은 있나 모르겠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 아닌 존재를 상대로 열 올릴 필요는 없었다.







“됐어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네 도움이 필요한 이상, 난 네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줄 의무가 있다.”







이 요원인지 천사인지 모를 남자는 감정과 사회성이 결여된 게 분명했다. 엘리제는 후, 한숨을 내쉬고선 그에게 말했다.







“어쨌든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나 말해 봐요. 들어 보고 판단할 테니까.”



“연기지도를 해 다오.”







엘리제는 한동안 침묵한 채 그를 쳐다봤다.







“뭐요?”



“연기지도라 했다만…. 그 표정은 뭐지?”







엘리제는 딱 잘라 말했다.







“가망이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다. 나는 신께서 인정한 이 시대 최고의 요원이다.”



“그분, 엄청 너그러우시네.”



“당연하지. 신께선 인내와 자비가 무한하시다.”







이제까지 봐온 중에 가장 생동감 있는 얼굴로 그는 주장했다.







“네. 그러신 것 같네요.”







건성으로 대답하고서 그녀는 다시금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곧 여길 떠나야 해요. 시간도 부족하다고요.”



“그건 방법이 있다.”







그는 간략히 자신이 세운 계획을 설명했다.







시나리오상에 명시되지 않은 대공 부부의 초반 행보를 남주 루카스 클랜튼의 동선과 겹치도록 맞출 방법이 딱 하나 있었다. 블레이크에 빙의될 예정이었기에 그가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흠. 가능성이 있긴 한데….”







엘리제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블레이크가 내 부탁을 들어줄지 모르겠네요. 대공이라면 평소에도 꽤 바쁠 텐데.”



“네가 요청하면 그는 거절하지 못한다.”



“어떻게 확신하죠?”



“보면 모르나?”







루카스의 한쪽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게 웃는 표정임을 이제 엘리제는 알 수 있었다.







“네 몸에 완전히 빠져 있잖나.”



“뭐, 흔한 일이긴 하죠. 내 별명이 한때 경국지색이었잖아.”







맡은 배역 때문에 얻은 별명이었지만, 엘리제는 뻔뻔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이 있던 시절에 태어났으면 진짜로 한 나라 멸망시켰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의 표정이 다시금 싸늘하게 변했다.







“조심하는 게 좋아. 우쭐대다간 뒤통수 맞기 십상이다.”







뒤통수 맞아 죽은 이력이 있는 엘리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뭐예요? 재수 없게!”



“재수 같은 건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건 사람의 선택이 만든….”



“아 됐어요.”







엘리제는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골치 아픈 말은 듣지 않는 게 이득이다. 그보단 확실히 해야 할 게 있었다.







“당신을 도와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대가나 말해 줘요.”



“어떤 걸 원하지?”



“뭐든 가능해요? 예를 들어 나를 저 윗세계에 살게 해준다든지. 아니면 어떤 놈의 영혼을 내가 있는 곳에 데려와 준다든지.”



“영혼 하나의 거취 정도야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다.”







엘리제는 오, 하고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연기력은 형편없어도 그는 정말 꽤 능력 있는 요원인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럼 내 바람은 이 일이 무사히 끝나고서 말할게요. 괜찮죠?”



“알겠다.”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문가를 힐끔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만 가봐야겠군. 그자가 곧 돌아올 테니.”







엘리제는 헉, 소리를 내며 도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그에게 마구 손짓했다.







“어서 가요. 난 이제부터 자는 척할 거예요.”







또 한 번 아까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겁먹은 그녀의 표정이 우스웠는지 그의 입꼬리가 다시금 씰룩였다.







“곧 보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창을 통해 나간 것인지, 서늘한 바람이 한차례 방 안을 훑고 사라졌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카스의 말대로 오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엘리제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노크 없이 들어왔고,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어 그의 걸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엘리제는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왜 또 온 거야? 새신부를 복상사시킬 셈인가?’







그가 도통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엘리제는 관심을 끄고 생각에 잠겼다.







윗세계 요원이라는 작자가 무슨 문제가 생겨 남주 몸에 들어갔다면, 지금 블레이크에 몸에 들어 있는 건 혹시 남주의 영혼인가?







블레이크 프로이젠 대공은 시나리오상의 비중이 크지 않다. 대사도 그만큼 적기에 본래 어떤 성격의 남자인지 드러난 게 없다.







‘어떻게 확인하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문득 침대 한편에 무게가 실렸다.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엘리제….”







또다. 부인이 아닌 ‘엘리제’. 관계 중이라면 흥분한 탓에 이름을 불렀다 하겠지만, 지금은 왜일까.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인 거로 보아 그녀를 불러 깨우려는 목적은 아닌 듯했다. 어쨌든 그의 목소리와 숨결이 살갗에 닿을 정도였기에 엘리제는 바짝 긴장했다.







옆으로 누워 있는 그녀의 목덜미, 오목하게 팬 곳에 무언가가 닿았다. 아마도 손가락 같았다. 이윽고 그것은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졌다.







어깨까지 걸쳐 있던 이불이 끌어 내려졌다. 벗은 몸에 닿은 서늘한 공기와 간지러운 손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등을 타고 내려온 그의 손은 그녀의 엉덩이에서 방향을 틀었다. 도톰하게 부어 있는 꽃잎 위를 스치듯 긁고 지나가더니 손바닥으로 음부 전체를 감쌌다.







‘뭐, 뭐 하는 거야…?’







그의 입에서 하아, 낮은 한숨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도 잠든 척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긴장한 탓에 배 속과 아래가 움찔거렸다. 그의 의도를 몰라 더욱 몸이 굳었다.







그곳을 몇 번 부드럽게 문지르던 그가 손가락 하나를 그녀의 밀지에 쑤욱 밀어 넣었다. 정액과 애액이 범벅되어 고여 있던 탓에 그의 손가락은 쉽게 빨려 들어갔다. 엘리제는 신음하지 않으려 재빨리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가늠하듯 손목을 돌려 속살을 더듬던 그가 이윽고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다시금 손목을 돌리더니 손가락을 구부려 입구까지 쭉, 긁듯이 빼냈다.







‘윽…!’







소리는 삼켰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이 움찔거렸다.







안에 고여 있던 희뿌연 한 액체들이 투둑, 소리를 내며 시트에 흩뿌려졌다. 다시 손가락이 들어왔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안에 있는 정액을 빼내려는 의도 같았다.







그러나 그의 반복되는 행동에 흥분한 그녀의 몸은 새로이 애액을 흘려 댔다. 급기야 살짝 가버리기까지 했다. 손가락을 물어뜯듯 조여 대는 속살을 느릿하게 더듬던 그가 결국 포기한 듯 손을 빼냈다.







이미 그의 숨결은 한계까지 거칠어져 있었다.







‘들켰…을 것 같은데.’







이쯤 되면 자는 척한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지금 눈을 떴다간 2차전이 시작될 것이다. 백번 생각해도 몸살 날 게 분명했다.







‘내일 루카스 배웅하는 장면이 있다고.’







컨디션 관리는 배우 본인의 몫이다. 엘리제는 좀 더 힘주어 눈을 감고 꿋꿋하게 자는 척을 했다.







알아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해 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다행히도 그는 본래의 목적대로 행동했다.







뜨끈하게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다리 사이를 조심스레 닦아준 것이다. 찝찝했던 아래가 한결 개운해졌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깨끗이 씻어내고 싶어도, 같이 씻자고 했던 아까의 말을 그가 기억할까 봐 불가했다.







‘참자. 참아야 한다.’







굴욕적인 후퇴는 내일의 전진을 위한 거라며 엘리제가 자기 위안을 하는 중, 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초 특유의 알싸한 향이 풍기는 거로 보아 약병을 연 듯했다.







‘…약까지 발라 주려고?’







그럴 것까진 없는데, 싶으면서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보살핌 받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는 그녀의 안쪽과 입구에 꼼꼼하게 약을 발라 주었다. 내벽을 더듬는 손가락이 다소 차갑고 미끈거려 기분이 이상했지만, 열심히 다른 생각을 한 덕분에 엘리제는 성공적으로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충분히 약을 바르고 나서야 그가 손가락을 빼냈다. 다시 한번 낮은 한숨이 흘렀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이 보지 않아도 선했다.







‘빌어먹게 다정하네.’







엘리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엘리제에게 마음이 있었든, 혹은 부인이라서든. 블레이크 프로이젠은 엘리제를 몹시도 아꼈다.







그가 엘리제의 등 뒤에 몸을 붙여 누웠다. 무게가 얹어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단단하고도 뜨거웠다. 닿은 곳을 통해 전해지는 열기가 엘리제의 몸까지 뜨겁게 덥혔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남자를….’







작정하고 꼬셔 보자, 엘리제는 생각했다.







믿지 않고, 마음 주지 않고 그저 유혹하여 이용하는 건 엘리제에게 꽤나 익숙한 일이었다. 간이고 쓸개고 모두 다 내줄 만큼 빠져들게 하면, 그녀가 무얼 하든 블레이크는 도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엘리제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괜찮은 남자를 합법적으로 꼬시는 입장이라니,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