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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설마 저게 웃는 거야? 환하게?’
엘리제는 황당함을 감추려 노력하며 그에게로 다가가 포옹했다.
“오라버니…! 정말 다행이에요. 떠나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그럴 수야 있나요. 큰일 치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에요. 모두가 겪는 일인걸요.”
엘리제는 그를 올려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표정과 달리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대사를 살짝 더듬은 데다가 도통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투라니. 다정이 지나친 블레이크에 이어 두 번째 난관이었다.
‘왜 이래 정말…?’
루카스의 입꼬리는 이제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블레이크가 다가와 어깨를 감쌀 때까지, 엘리제는 루카스의 어색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타락한 연인>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식사 장면은 질투와 견제가 핵심이다.
대공비는 사실 이 시점에 이미 제 의붓오빠, 루카스 클랜튼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그의 감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교묘하게 이용하는 영리한 여자다.
이를테면 남주를 어장 속 물고기 취급한 것이다.
“오라버니, 날 보러 또 와줄 거죠?”
그런 점에서 엘리제의 연기는 완벽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남매간의 애틋한 우애를 가장하고 있었다. 어린 척, 순진한 척, 애처롭게 테이블 너머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나이프를 쥔 블레이크의 손등에 퍼런 핏줄이 도드라졌다. 굳게 다문 입매로 엘리제는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재밌는 장면인데 말이야.’
만약 원작에서처럼 루카스가 블레이크의 질투심에 더욱 활활 불을 붙여 주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감동한 얼굴로 눈가를 붉히며….
“진심입니까.”
-라고 말했다면 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카스처럼 무표정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초리로 저런 대사를 읊어 버리면, ‘어이가 없군. 감히 날 오라 가라 하겠다는 거냐.’ 정도의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블레이크는 안쓰러워하는 눈빛으로 엘리제를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가족에게 저런 취급을 받고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걸까. 본래대로라면 미간을 찌푸린 채 루카스를 노려봤어야 했다.
‘후우…. 저 발연기.’
이러한 상황에서 다음 대사를 내뱉어야 하는 엘리제는 표정관리를 철저히 해야 했다.
“무리한 부탁인 거겠죠…?”
지문대로 엘리제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견뎌 볼게요. 제 걱정은 마세요. 물론 매우 쓸쓸하겠지만….”
교태 대신 가련함을 가장했다.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지그시 물고 고개를 떨구는 그녀에게 블레이크와 루카스의 시선이 동시에 따라붙었다.
루카스는 굳은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우는 겁니까?”
‘아주 한 대 치겠다.’
엘리제는 혀를 쯧쯧 찼다. 당황한 나머지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와야 할 루카스는 다음 지문이 생각나지 않는 듯 그대로 멈춰 있었다.
“부인. 내가 있지 않습니까. 쓸쓸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루카스를 견제하며 과시하듯 말해야 하는 대사건만, 블레이크는 슬퍼하는 엘리제를 보며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뒤늦게 쭈뼛쭈뼛 다가온 루카스가 그녀의 어깨를 어색하게 토닥였다.
“원하면 언제든 올 테니, 울지 마십시오.”
‘이 꽉 물고 말하지 말라고!’
엘리제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더욱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
식사시간 동안 루카스가 보인 연기를 한마디로 평하자면, 정말 형편없었다.
대사를 틀리진 않았지만, 등장인물 소개에 명시된 남주의 성격과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건 고사하고 시종일관 무표정했으며, 다정함이 느껴져야 하는 대사가 마치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원수나 다름없는 현실 남매를 연기하는 거라면 딱 맞았을 대화요 분위기였다.
그래서 엘리제는 오찬 후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을 때, 이미 방 안에 숨어들어 있던 루카스를 보고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됐다.”
배역과 다른 사람임을 명시하듯 말도 짧아졌다.
“…그러게요. 그런 것 같네요.”
엘리제는 혀를 찼다. 웃으면 꽃잎이라도 날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저 무뚝뚝한 어투라니.
“혹시 당신이, 본래 내 남편 몸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그 위쪽 세계 요원인가요?”
“그래. 넌 중간지대 환상 컨트롤타워의 조사관이겠군.”
“맞아요. ‘임시’이긴 하지만.”
“임시?”
“네. 전 죽고 나서 거의 바로 이곳에 보내졌어요. 이 세계에 갇혀 있는 조사관들을 구출하기 위해서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생전에 직업이 뭐였지?”
“배우요. 꽤 잘나갔었죠.”
“과연. 그래서 전혀 위화감이 없었군.”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중간지대 조사관들의 연기력은 정말 형편없었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던데요.”
“인정한다.”
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당연하단 듯 말했다.
“블레이크 프로이젠 역할은 몇 달에 걸쳐 연습했었다. 의심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 이젠 무용지물이 됐지만.”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왜 내 남편이 아닌 그 몸에 들어갔어요?”
“나도 모르겠다. 블레이크 프로이젠의 몸에 들어가려는 순간 에러가 발생했다. 영체에 가해진 강한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이 몸 안이었다.”
“…그래도 돼요? 루카스는 시나리오의 남자주인공이잖아요.”
루카스는 대답 없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 큰일인 거구나.’
캐릭터의 성격만 문제인 게 아닐 것이다. 압도적인 대사의 양을 소화해 내야 하는 데다가 출연 분량이 많은 만큼 자유도도 현저히 떨어진다. 그의 목적이 무엇이든 제대로 완수하긴 틀린 셈이었다.
“지금이라도 옮겨가면 안 돼요?”
“그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했겠지.”
“…머리 좀 그만 쥐어뜯어요. 자기 거 아니라고 막 쓰네.”
엘리제는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려 떼어내곤 헝클어진 머리칼을 원래대로 정돈해 주었다. 그가 누구 한 명 죽일 것 같은 눈빛으로 허공을 쏘아보며 말했다.
“내 오백 년 경력에 흠이 생겼다.”
“예. 뭐, 그러시겠죠.”
오백 년이라니. 참 현실적이지 않은 시간이다. 그의 경력에 생길 흠 따위야 알 바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곤란하다.
‘이 자가 임무를 말아먹으면, 내게도 분명 지장이 있을 거야.’
엘리제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네 도움이 절실하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거야.”
“물론 나도 그러고 싶죠.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도와요? 혹시 다시 돌아갈 방법이라도….”
그때, 루카스가 입술 앞에 검지를 세우곤 그녀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쉿.”
그의 녹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엘리제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그가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
황당한 심정으로 침대 밑을 들여다보려는데 문득 그녀의 등 뒤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엘리제는 숙였던 허리를 펴고 몸을 돌렸다.
“부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블레이크였다. 헉, 소리가 나기 전에 엘리제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어떡하지? 들키면 큰일 날 텐데.’
“…부인? 안에 없습니까?”
허둥대다 대답할 타이밍을 놓친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직접 문으로 가 손잡이를 돌렸다.
오후의 햇살이 한가득 비쳐드는 방 안과 다르게 성의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문 앞에 우뚝 선 블레이크 역시 복도의 어둠에 묻힌 듯 보였다.
괜스레 심장이 쿵쿵쿵 뛰었다. 못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이를 내색할 그녀가 아니었다.
“들어오세요.”
엘리제는 눈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다.
방 안에 들어선 그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리곤 뺨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도 늘 인사 대신 키스를 할 모양이었다.
“쉬고 있었습니까.”
“네. 조금 노곤해서요. 전하께선 무슨 일로….”
“일이 있어야 보러 올 사이는 아니지요.”
“아….”
그가 바짝 몸을 붙여오는 바람에 엘리제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하지만 지금은 용건이 있어 들렀습니다.”
다소 긴장한 듯한 그녀를 내려다보며 블레이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지난밤에 내가 부인의 침대를 망가뜨렸지요.”
엘리제를 놓아준 그가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혹시 그가 침대 밑을 살피기라도 할까 봐, 엘리제는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침대 머리맡 앞에 멈춰선 블레이크는 금이 간 나무판을 요리조리 들여다보며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침대를 교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견고하고 안락한 거로.”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엘리제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초야를 보내다 침대를 망가뜨린 새신랑이라니. 제법 마음에 드는 설정 아닌가.
그러나 지금 엘리제는 블레이크의 발치에서 겨우 몇 뼘 떨어진 곳에 누워 있는 루카스로 인해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그래서 미소만을 살짝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혹시 원하는 재질이나 디자인이 있습니까?”
엘리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아 고민하는 척을 했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적어도 침대 밑을 들여다보려 허리를 숙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치마 속을 들여다볼 목적이 아니고서야.
“글쎄요.”
듣기로 <타락한 연인>은 중세 유럽과 비슷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마법이 등장하는 등 판타지 요소가 가미돼 있으니 마냥 같지는 않을 것이다. 가구를 만드는 데 어떤 소재가 유행하는지 지금의 그녀로선 알 턱이 없었다.
“침대는 전하께 맡길게요. 최대한 튼튼해야 할 것 같네요.”
엘리제는 침대 헤드를 쥔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힘이 넘치셔서.”
순간, 그의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런.’
그저 장난스러운 말과 행동이었다. 그를 자극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다.
뒤늦게 뜨끔한 엘리제가 슬그머니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엘리제의 손이 제게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블레이크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부인.”
손목을 움켜쥔 거센 힘에, 엘리제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넓고 단단한 가슴과 툭 튀어나온 목울대를 지나 그의 새파란 눈이 엘리제의 시야에 들어찼다. 어느 샌가 자리한 짙은 정염이 그 안에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 하루 몇 번이나 갈망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이대로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차피 바꿀 침대, 조금 더 망가뜨린들 상관없겠지요.”
‘맙소사.’
이미 늦었다. 그에게서 전해져 오는 열기와 숨소리만으로도 엘리제는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떡하지?’
제게로 성큼 다가오는 그를 어떻게 밀어내야 할지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주춤주춤 물러나 봤자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침대 위였다.
엘리제는 한쪽 무릎을 침대 위에 올리는 그를 보며 다급히 외쳤다.
“전하,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