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꺼운 커튼의 틈으로 미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의 밝기로 보아 한낮이 분명했다. 그러나 방은 밤처럼 어둑했다. 그녀의 깊은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 같았다.
눈만 떴을 뿐, 엘리제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멍한 눈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슈트 차림의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블레이크 프로이젠 대공.’
그는 촛불에 의지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지워진 그의 얼굴은 그야말로 조각 같았다. 목을 살짝 덮는 길이의 짙푸른 머리칼과 시리도록 새파란 눈, 날카롭게 뻗은 콧날과 굳게 다문 입술의 조화가 다시없을 미남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엘리제는 이야기 속에 들어오기 직전 필립이 해준 말을 떠올려 보았다.
[자네 남편이 될 블레이크 프로이젠의 몸엔 저 위쪽 세계 요원이 빙의돼 있을걸세. 그쪽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라 우리와 일시적 동맹을 맺은 상태지. 대본에 등장하는 장면만 제대로 연기하면, 그 외의 시간엔 간섭하지 않고 편의를 봐줄 걸세.]
그 말을 듣고 안도했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해야 할 인물이 요원이라면 사적 영역에서 조금쯤은 긴장을 풀어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공사가 분명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남자라 도움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오히려 그편이 서로에게 나을지도 모르지.]
‘냉정. 냉정이라.’
백번 양보해도, 블레이크는 냉정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저 남자는 누구일까. 어떻게 대해야 하지?’
엘리제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정했다.
‘일단은 저 남자의 정체를 파악해야 해. 그게 급선무야.’
엘리제가 부러 바스락대자 퍼뜩 고개를 든 블레이크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깼습니까?”
서류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그를 보며 엘리제 역시 상체를 일으켰다. 몸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는 이불을 붙잡아 가슴골만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도록 끌어올리곤 내리뜬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이건만 엘리제는 이 순간에도 자신이 아름다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난 죽어서도 예뻤을 거야.’
비록 살해당했지만.
“전하….”
급하게 투입된 터라 엘리제는 첫 장면, 즉 초야 부분 대본밖에 읽어 두지 못했다. 배역까지 달라진 상황에서 캐릭터의 성격과 배경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최대한 말수를 줄여야 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침대에 걸터앉은 블레이크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엘리제는 그의 눈빛에 깃든 감정이 염려뿐이 아님을 눈치챘다.
아무렴 지금의 제 모습을 보고 어느 남자가 멀쩡하랴. 요염함과 가련함을 한 몸에 두르고 사내를 쥐락펴락하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배어 나오는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동양인이면서 세계적인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는 게 어디 보통 일이던가.
“…씻고 싶어요.”
살짝 떨려 나오는 목소리까지.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했다.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 전에 간단하게라도 요기를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래가 얼마나 엉망일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몹시 찝찝할뿐더러 제 완벽한 이미지 관리에도 좋지 않았다. 이런 모습으로 그와 마주 앉아 식사할 순 없었다.
“알겠습니다.”
블레이크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조금만 더 쉬고 있어요.”
볼을 스치는 그의 손은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그는 침대 머리맡의 설렁줄을 당기는 대신 방을 나섰다. 직접 시종을 불러 준비시킬 모양이었다.
방문이 닫힌 후에도 잠시간 숨죽이고 있던 엘리제는 재빨리 이불을 뒤집어쓰곤 약지의 반지를 톡톡 두드렸다.
정교한 문양이 세공된 그녀의 결혼반지는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었다. 특수한 기능을 가진 중간지대의 아이템이었다. 여기엔 그녀가 연기해야 할 <타락한 연인> 시나리오 대본 역시 실려 있었다.
그녀의 손짓에 반응하여 반지 위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패널 디스플레이가 떠올랐다. 엘리제는 패널을 조작하여 빠르게 초반 스크립트를 읽어 내려갔다.
‘아. 남주가 아직 성 안에 있네. 다음 등장이 그와의 대화구나.’
<타락한 연인>의 남주 루카스 클랜튼과 대공비 엘리제는 각기 어머니 아버지가 재혼하여 남매가 된 케이스였다.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법적으로 가족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
시나리오상 루카스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신방 앞을 서성댄 거로도 모자라, 동생을 만나고 가겠다며 온종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역시 대단한 순정남이야.’
물론 그의 마음은 얼마 후 등장하는 여주에게로 고스란히 옮겨간다.
‘내가 맡은 배역은 그 여주를 못살게 구는 시누이 역할이고.’
<타락한 연인>에 캐스팅됐던 배우들을 한 명씩 떠올려보던 엘리제는 미간을 찡그렸다. 실제 자신의 상대역이자 남주 역할을 맡았던 ‘그’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미친놈.’
엘리제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곤 제 몫의 대사를 암기하는 데 집중했다. 방이 캄캄하여 시각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얼마 남지 않았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오라버니, 날 보러 또 와줄 거죠?”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견뎌 볼게요. 제 걱정은 마세요. 물론 매우 많이 쓸쓸하겠지만….”
고도로 집중해 있던 엘리제는 노크 소리는 물론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비전하, 기침하셨습니까.”
바로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엘리제는 화들짝 놀라 디스플레이를 종료시켰다.
‘들었나…?’
뒤집어썼던 이불을 살며시 내리자 침대 곁에 서 있는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목욕 시중을 들러 온 모양이었다. 표정으로 봐서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들었어도 뭐 어쩌겠는가. 엘리제는 속 편히 생각했다.
‘그나저나, 대사를 아직 다 못 외웠는데 어쩌지.’
혼자 있을 기회가 다시 또 생기기를 바랄 수밖에. 엘리제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시녀의 안내를 받았다. 고개를 치켜들고 우아하고 당당하게 걸었다.
호화로운 욕조와 시녀들의 시중, 최고급 향유와 마사지, 값비싸고 화려한 보석과 드레스.
‘일단은 호화로운 귀족 생활을 즐겨야지.’
엘리제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
“비전하, 너무 아름다우세요.”
“어쩌면 이렇게 피부도 고우신지.”
치장한 모습을 거울에 비춰본 엘리제의 얼굴에 만족감이 드러났다.
‘십 년이나 어려지다니.’
눈동자 색과 머리색을 제외하곤 열아홉 살이었을 때의 제 모습과 동일했다. 엘리제는 땋아서 틀어 올린 연보라색 머리칼을 살며시 매만졌다. 머리와 같은 색의 눈동자도 마음에 들었다. 청초해 보이면서 한편으론 나른해 보였다.
엘리제는 제 검은 머리칼과 진갈색 눈을 딱히 싫어하진 않았지만,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배우 생활을 하며 배역에 제한을 받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게. 예쁘네.”
시녀들의 칭찬에 엘리제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겸양 떨어 무엇 하겠는가. 그녀는 예의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다행히 엘리제의 남편, 블레이크의 눈에도 그녀는 몹시 예뻐 보였던 모양이다. 방에 들어와서 그녀를 보자마자 얼어붙은 걸 보면.
엘리제는 생긋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전하.”
“…부인.”
천천히 다가온 그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사방에서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제는 슬쩍 시선을 돌려 시녀들을 쳐다봤다.
“너희들은 이만 물러가렴.”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시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차례로 방에서 나갔다.
둘만 남고 나서야 엘리제는 블레이크를 올려다보았다. 시녀들이 있든지 없든지 그는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 많이 피곤하진 않습니까?”
“네. 이젠 괜찮아요. 전하의 배려 덕에 푹 쉬었는걸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럼 함께 오찬을 들까요.”
“좋아요.”
엘리제는 그의 오른팔에 가볍게 팔짱을 꼈다. 가슴이 닿은 탓일까, 그의 몸이 살짝 경직됐다.
‘와, 장난치고 싶어.’
보아하니 조금만 더 그를 자극했다간 오찬이고 뭐고 번쩍 안아 들어 침대로 갈 것 같았다. 그런 일상이 몹시도 흥미롭게 느껴지는 그녀였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남주를 만나야 할 때니까.’
아니나 다를까.
“클랜튼 경도 동석할 겁니다.”
블레이크가 남주, 루카스 클랜튼의 오찬 참석을 알려 왔다.
“오라버니가 아직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나요?”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 엘리제는 놀란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인을 보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더군요.”
“아….”
엘리제는 사르르 미소 지었다. 이것 역시 연기였지만 블레이크는 당연히 알아채지 못했다.
“클랜튼 경과… 사이가 좋은 듯합니다.”
조금 불편한 목소리로 그가 루카스와 엘리제의 관계를 떠보았다. 물론 엘리제는 그의 의중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얼굴로 해맑게 대답했다.
“네, 그런 편이에요. 어쩔 땐 아버지보다 더 의지가 되어서… 오라버니가 절 많이 아껴주셨거든요.”
“…그래도 이제 부인에겐 내가 있지요.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한 어조로 말하는 그가 엘리제에겐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기뻐요. 저 역시 전하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아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이미 부인은, 충분히 내게 그렇습니다.”
아아, 이 사람. 진짜 달다. 엘리제는 속으로 한참을 킥킥대며 웃었다. 동맹 관계의 요원은 아닐지라도 그녀 마음에 쏙 드는 남자였다.
그와 동행하여 걸으며 엘리제는 성의 구조를 대강 기억해 두었다.
초야를 보낸 침실은 본성의 3층에 있었고, 같은 층에 블레이크의 집무실과 서재가 있었다. 2층에는 귀빈실을 비롯한 수많은 방이 있었는데 일일이 둘러보려면 족히 몇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피로연이 열렸던 중앙 홀과 응접실, 만찬실은 모두 1층에 위치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며 얼핏 밖을 내다보니 본성 외에도 몇 개의 커다란 건물들이 안쪽 성벽 안에 있었다. 안쪽 성벽의 높이가 높아 그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감시탑 간의 거리로 미루어 외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굉장하네. 왕성이나 다름없구나.’
평범한 귀족의 수준이 아니라는 걸 엘리제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1층에 당도하자 만찬실 앞을 지키던 시종들이 둘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제는 티 나지 않게 심호흡했다. 크랭크인 직전 집중을 위한 그녀의 습관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환한 금발이 보였다. 장면의 시작을 알리듯, 약지에 낀 반지가 진동했다.
“대공 전하.”
흰색 제복 차림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이번 장면의 첫 대사였다.
‘저 사람이 원작 남주, 루카스 클랜튼.’
그는 황가를 수호하는 네프러스 기사단의 부단장이며, 후작이 인정한 클랜튼의 후계자다.
‘금발 녹안에 미청년이라…. 외모만 보면 정말 동화 속 왕자님 같네.’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엘리제.”
그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씰룩였다. 엘리제는 대본상의 그의 행동묘사를 떠올렸다. 분명, ‘환하게 웃으며’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