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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







이미 충분히 젖어 있는 상황에서 자칫 이렇게 힘을 주었다간 미끄러져 들어가고 만다. 엘리제는 항의하듯 그의 어깨를 힘주어 밀었다.







“전하…?”







그녀와 블레이크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맞닿았다. 고작 반 뼘쯤. 가까운 거리 탓에 엘리제는 그의 새파란 눈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엘리제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의 눈빛에 서린 지독히도 깊고 짙은 정염. 그것을 만약 연기라 한다면, 블레이크는 정말 엄청난 천재임이 분명하다.







“설마 정말로…?”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미간에 깊은 금이 갔다.







“초야입니다. 혼인을 무르고 싶습니까.”







물론 엘리제는 초야를 치르고 블레이크 프로이젠 대공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시나리오상으론 분명 그러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연기는 완벽해야 한다. 대본에 명시된 장면까지는.







그러나 지금은 대본에 명시된 장면이 끝난 시점이었고 지켜보는 다른 조연들도 없었다. 한마디로 연기가 필요 없는 상황 아닌가.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멈춰 달라 해도 늦은 듯하여.”



“……!”







엘리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것이 파고들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나왔다. 매끄럽게 진입한 건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까지였다. 그 이후로는 강제로 쑤셔 넣는 것과 진배없었다. 굵고 단단한 것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우며 우악스럽게 파고들고 있었다.







엘리제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눈은 부릅떠졌고 벌어진 입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어깨를 너무 세게 잡은 탓에 상처 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생각보다, 너무, 큭…. 좁군….”







블레이크가 힘겹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엘리제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몸을 반으로 가르는 듯한 충격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멈추지 않고 진입해 오던 것이 마침내 콱, 박혀 들었다.







“…숨을, 쉬는 편이 좋을 텐데….”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엘리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배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물감은 진짜였다.







‘지금, 이 남자와…?’







괴로운 듯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블레이크가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부인, 괜찮습니까.”







저를 반복하여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엘리제가 다급히 숨을 내쉬었다.







“옳지. 잘했습니다.”



“무슨…. 이게, 무슨….”







울먹이는 그녀를 블레이크는 뜻 모를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런 건 줄 몰랐습니까.”







그는 그녀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입술로 슥 훔쳐냈다. 그러곤 한 손을 그녀의 등 아래 밀어 넣어 살살 다독였다.







“클랜튼에선 미리 가르치지 않나 보군요. 직접 경험하며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엘리제는 저를 여기로 보낸 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맹 관계의 요원이라며, 대체 왜 이래? 뭔가 잘못됐잖아!’







고작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블레이크는 엘리제가 전해 들었던 ‘윗세계 요원’의 정보와 너무 달랐다. 공사가 분명하고 냉정하다더니,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혹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녀 역시 매우 급하게 투입된 터였다. 윗세계 요원이 이야기에 개입할 시기를 놓쳐 아직 빙의하지 못했다면.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블레이크에게 섣불리 다른 말을 꺼내선 안 된다. 남편인 그가 그녀를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만큼 운신의 폭이 줄어든다.







“부인. 엘리제. 나를 봐요. 응?”







눈을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가 걱정됐는지, 블레이크의 다독임은 계속됐다.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살며시 기댄 채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날 믿어요. 점점 괜찮아질 겁니다.”







엘리제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블레이크의 새파란 눈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호흡도 거칠어져 있었다.







일단은 제 몸에 묵직하게 박혀 있는 흉기를 신경 쓰는 게 급선무였다. 경험이 있던 건 죽기 전의 몸일 뿐. 이 몸은 도통 그의 것에 적응하질 못하고 있었다.







어느 새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잔뜩 힘이 들어간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힘을 빼라는 듯 가볍게 주무르기도 했다.







그의 손길 덕분에 엘리제의 몸은 조금씩 진정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 나아진 것 같군요.”







복잡한 그녀의 머릿속 사정도 모르고, 블레이크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대로 밤을 지새울 순 없습니다.”







살짝 몸을 물렸다가 쿡, 박아 넣는 몸짓에 엘리제는 ‘아!’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유심히 그녀의 얼굴을 살피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제 몸을 각인시키려는 듯 느릿하게 허리를 돌렸다.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었다. 괜스레 짜증이 난 엘리제가 그를 힘주어 밀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그녀가 저를 밀어내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오히려 제 어깨와 가슴 부근을 더듬더듬 오가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서는, 땀으로 젖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읏….”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혀를 내밀어 그녀의 손 중앙에서부터 약지까지 길게 핥아 올렸다. 손가락 하나하나의 끝을 입술로 자근대다, 이번엔 손목을 할짝댔다. 팔딱팔딱 맥이 뛰는 곳에 길게 입을 맞추곤 속삭인다.







“달짝지근한 향이 납니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욕조에 띄운 것은 장미일 텐데. 그럼 이건 부인의 살내입니까.”







도사린 맹수와 같은 그의 정염 어린 눈동자에,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나치게 자극적이다. 그가 몸에 두른 관능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걸까.







‘이 남자, 꽤 다정하잖아? 잠자리 상대로 나쁘지 않은걸.’







이제 엘리제는 그의 품에 편안히 안기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는 끝까지 할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 터.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면 그만이었다.







빠른 판단력과 적응력은 엘리제의 여러 장점 중 하나였다.







엘리제는 그가 말해준 대로 몸에 힘을 풀기 위해 애썼다. 화끈거리는 통증은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삽입 전 어느 정도 젖어 있던 덕에 살이 쓸리는 느낌은 없었다.







초야.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배려해서인지, 그는 제 욕심을 무도하게 채우려 들지 않았다.







이왕 살을 섞는 거, 그의 얼굴과 몸이 취향에 맞아 다행이었다.







‘아. 목소리도.’







그가 흘리는 낮은 신음은 엘리제의 귀에 몹시도 야하게 들렸다. 그녀의 본능은 제게 더 안달 내는 그를 바라고 있었다.







엘리제는 그의 가슴팍에 올려두었던 손을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굵고 단단한 어깨를 쓸고 올라가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호흡하며 뜨거운 숨결을 흘렸다.







경직됐던 몸이 자연스럽게 풀어져 녹아들듯 얽혀들었다. 꽃잎처럼 붉은 그녀의 입술을, 그가 집어삼키듯 머금었다.







벌어진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혀가 집요하게 그녀의 것을 옭아매며 탐했다.







“으응….”







입맞춤도 나쁘지 않았다. 엘리제는 점점 더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제게 완전히 빠져들어 열렬히 호흡을 주고받고 몸을 움직이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새 흥건히 젖어 든 아래가 즐거움을 보탰다. 고통은 온데간데없고 쾌락만이 남았다.







“하아, 엘리제….”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이름이 달았다.







깊이 삽입한 채 허리만을 돌리던 그가 조금씩 진퇴의 폭을 넓혔다. 절반가량 뽑아냈다 쑥 밀어 넣을 때마다 엘리제의 속살이 물어뜯듯 그에게 달라붙었다.







“미치겠군.”







상체를 세운 블레이크가 침대의 헤드를 부서져라 쥐었다. 철퍽거리며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몰아붙이는 힘이 거세졌다. 몸이 밀려 올라가는 걸 막기 위해 엘리제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좁혀진 거리만큼 깊어진 삽입에 허리가 튀었다. 가장 민감한 곳이 쉼 없이 눌리고 긁혔다. 애액이 울컥거리며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얕은 절정이 몇 번이나 그녀의 몸을 휩쓸고 차곡차곡 극치를 높여 갔다.







“으응, 읏…!”







교태 섞인 그녀의 신음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앗아갔다.







블레이크 역시 완전한 열락에 빠져들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이 정도로 자신을 흐트러뜨릴 수 있으리라곤 조금도 예상치 못했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한 팔로 휘어 감고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머리맡에서 우지끈 소리가 났다.







“아아…!”







엘리제의 고개가 젖혀졌다. 쥐어짜듯 조여 대는 속살에 블레이크 역시 더는 견디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안에 첫 정을 쏟아부었다. 거칠게 쉬어지는 숨만큼이나 거친 토정이었다.







“하아, 하아….”







그와 그녀 모두 그대로 멈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진정이 되며 주변을 살필 여력이 생겼다.







엘리제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든 그가 몸을 크게 움찔했다.







“……?”







블레이크는 금이 간 침대 헤드에서 손을 떼곤 제가 깨문 그녀의 목덜미를 살살 문질렀다.







“미안합니다. 자국이 남겠군요.”







엘리제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아까는 그토록 자신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더니 이제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은데.’







얼마나 심하게 물었기에 그러나 궁금했지만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노곤노곤했다. 이럴 때가 아닌데,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만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죽었고, 사후 세계를 경험했으며, 시나리오 속에 빙의했다. 게다가….







‘너무 오랜만의 섹스였어.’







새로 얻은 처녀 몸으로도 잔뜩 느꼈을 만큼,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그녀의 피로감을 눈치챘는지, 그가 조심스레 제 몸을 물렸다. 한 번으로 부족한 듯 그의 것은 여전했다. 젖은 채 끄덕거리는 모양새가 흉악스럽기 그지없었다.







따라붙은 엘리제의 시선에 그가 헛기침했다.







“오늘은…. 참겠습니다.”







만약 죽기 전 그 말을 들었다면, 엘리제는 참을 필요 없다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강한 승부욕은 침대 위에서도 예외 없이 발휘됐다.







그러나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새로 얻은 몸이 너무 허약했다. 최소한의 근육도 없이 마냥 말랑거리는 게, 조금만 무리해도 몸살을 앓을 것이다.







‘일단 체력부터 길러야겠는걸. 졸려 죽을 것 같아….’







엘리제는 그를 도발하는 대신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굴욕감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조차 애처로워 보였는지 블레이크의 눈매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녀를 번쩍 안아 든 그가 엉망이 된 시트를 걷어냈다.







“씻고 싶습니까.”







엘리제는 하품을 참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잠시간 내려다보던 블레이크가 그녀를 다시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그 역시 그녀 곁에 몸을 뉘었다.







“팔베도리도리 저었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잠시간 내려다보던 블레이크가 그녀를 다시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그 역시 그녀 곁에 몸을 뉘었다.







“팔베개 해주고 싶은데.”



“…개 해주고 싶은데.”



“…….”







저 두꺼운 팔을 베고 자면 분명 어깨와 목이 결릴 것이다.







그러나 딱히 거절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수줍은 새신부 역할은 이제 시작이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베개 대신 그의 팔에 머리를 올렸다. 그가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제게 닿는 시선이 얼마나 다정하고 부드러운지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이 남자는 그 요원일 수가 없었다. 냉정하긴커녕 다정이 과했다.







‘모르겠다….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하자.’







푹신한 이불이 제 몸을 감싸는 걸 느끼며 엘리제는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